182 12. 끝과 시작
남일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더불어 장준환의 힘을 알게 되어 두려운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강우형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인지도 알게 되었다. 장준환에게 이런 힘이 있는데 그걸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가 버렸으니 말이다.
‘뭐. 그 일은 됐어.’
남일은 장준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준환 덕분에 엘 엔터테인먼트를 손아귀에 쥐게 되었으니 감사 인사는 전해야 했다. 물론 얻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긴 해야 하지만, 남일은 충분히 치를 용의가 있었다.
남일은 신호음은 가지만, 전화는 받지 않는 장준환에 당황하다가 갑작스레 명훈에게서 온 전화에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딱 봐도 축하를 하기 위해 온 전화이기에 살짝 마음을 놓은 상태로 전화를 받았으나, 명훈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건넸다.
“뭐? 세무 조사를 진행해?”
[네. 그렇습니다.]
남일은 크게 당황했다. 장준환이 뒤에서 막아 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말인가?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명훈의 목소리에 남일도 잠시 혼란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우선은 잠시 끊어 보라고 한 뒤 장준환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장준환은 여전히 연락을 받지 못했다. 원래라면 장준환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게 아닌가 걱정해야 하지만, 남일은 느낌이 싸했다. 일부러 전화를 안 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진짜로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만약 장준환이 남일과 나이수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일을 벌인 거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남일은 그리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사업을 할 때는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움직여야 했다.
남일은 몇 번이나 장준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받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한참을 고민하다가 나이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 가서 신호음이 잡히더니 장준환과 다르게 나이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래. 무슨 일이지?]
의기소침할 줄 알았던 나이수는 오히려 전화할 줄 알았다는 듯이 당당하게 남일의 전화를 받았다. 남일은 그 목소리에서 어쩌면 나이수가 장준환에게 모든 것을 말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준환이 파 놓은 함정에 우리 둘 모두가 걸린 것 같습니다.”
[우리 둘이라고?]
‘우리’라는 표현을 쓴 남일이 같잖다는 듯이 핸드폰 너머로 나이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긴 남일이 직접 나이수의 뒤통수를 때렸으니 이러한 반응이 당연했다.
그러나 나이수가 일방적으로 당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윗사람에게 말하여 세무 조사를 하게 한 사람도 나이수이니 어떤 의미에서는 남일도 나이수에게 당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같이 망하자는 겁니까?”
[그럼. 나 혼자만 망할 줄 알았나? 그렇죠?]
옆에 누군가 있는 듯한 뉘앙스에 남일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며 그 사람을 유추해 내었다. 그러자 하나의 결론이 내려졌다. 이 상황에서 나이수가 이 정도 여유를 부리게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불 보듯 뻔한 게 아닌가?
“장 회장님과 통화하게 해 주십시오.”
[통화하고 싶다는데 받겠습니까?]
남일의 예상이 맞는다는 듯이 정적이 흘렀다. 얼마 안 가서 넘겨받는 소리에 남일은 긴장한 것을 감추기 위해 크게 숨을 내쉰 후 말했다.
“나이수 회장이 거짓을 말한 겁니다. 저는 강우형 이사의 죽음에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풋.]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나이수의 웃음소리에 남일의 인상이 구겨졌다. 나이수가 옆에 있는 한 설득이 될 리가 없었다. 남일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려다가 장준환의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우리 둘이 따로 만나는 게 좋겠군요. 나이수 회장님을 내보낼 테니 우리가 늘 만나는 곳에서 만나죠.]
“네. 곧장 가겠습니다. 회장님. 저와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판단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장준환의 처지에서 보면 나이수 또한 믿을 수 없는 자이기에 따로 만나서 확인하려는 게 틀림이 없었다. 남일은 이미 장준환에게 했던 별명을 세뇌하듯이 머릿속에 담아 둔 상태였다. 말하는 과정 중에서 실수만 하지 않으면 되었다.
‘설마 녹음까지 하면서 만나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스스로 증거 목록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남일은 온갖 변명을 만들어 가며 장준환과 늘 만나는 한정식집으로 갔다.
어느새 나이수는 이미 가고 없는지 새로 차려진 상이 보였다. 물론 장준환의 앞에는 차 하나만 놓여 있었다.
남일은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설마 나이수 회장의 말을 믿는 건 아니시겠죠?”
“글쎄요. 자세한 건 들어 봐야 알겠죠.”
어디 실컷 말해 보라는 얼굴이라 남일은 새하얘진 머리와 다르게 준비해 둔 말을 빠르게 했다. 오롯이 살고자 하는 본능에서 나오는 말이었다.
“나이수 회장은 지금 우리 둘을 이간질하기 위해 거짓을 말한 겁니다.”
‘일단은 지금 위기를 넘겨야 해.’
나중에 힘을 키운 뒤 장준환에게 덤벼도 늦지 않았다. 엘 엔터테인먼트라는 돈 나오는 화수분이 있으니 시간을 들이면 힘을 크게 키울 수 있다. 강우형이 원했던 게 그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남일은 나이수의 말이 거짓임을 몇 번이나 호소하고, 호소했다.
“그렇다면 또 하나 제게 믿음을 증명해야 할 거예요.”
“그게 무엇이죠?”
“가온 엔터테인먼트.”
남일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장준환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들었기 때문에 매우 놀랐다. 남일은 말을 잃은 상태로 눈동자만 굴렸다.
“엘 엔터테인먼트를 가졌음에도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에는 아까운 회사죠?”
남일은 나이수가 어떤 심정으로 제게 당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인생을 다 바친 회사를 이런 식으로 허탈하게 빼앗길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남일이 아무 말 못 하고 울먹이며 장준환을 봤지만, 장준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현장에서 늘 빼앗던 사람인지라 이런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선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내줄 수는 없지요.”
가온 엔터테인먼트를 기습해서 자료들을 쓸어 갔으니 뒤로 숨겨 놓은 돈들이 나올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준환의 말대로 남일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러면…….”
“그러면?”
“가온은 회장님이 소유하시는 겁니까?”
장준환이 소유한다면 그나마 위안 삼을 일이었다. 그러나 장준환은 고개를 저으며 다른 이에게 넘겨주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러면 누구……?”
말을 하면서도 남일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누구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물은 것이니 억울한 감정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장준환과 수한의 사이가 좋은 건 남일도 알고 있는 사실이니 말이다.
“하나를 가졌으면 하나를 버리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엘 엔터테인먼트에 비하면 가온 엔터테인먼트는 아직 중소 기획사라는 명칭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둘 중 어디를 고를 거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엘 엔터테인먼트였다. 남일은 주먹을 꽉 쥐며 물었다.
“이 생각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여쭐 수 있을까요?”
“나이수 회장님이 서 대표가 과연 믿을 만한 사람인지 시험해 보라고 하더군요.”
남일은 헛웃음이 나왔다. 역시나 나이수에게서 나온 생각일 줄 알았다. 남일이 수한을 극도로 싫어하니 가온을 넘겨주는 것으로 보복을 하는 거였다. 이제 남일은 선택해야 했다.
“가온을 김수한에게 넘겨주겠습니다.”
“잘 생각했어요. 그럼 서 대표 아니, 서 회장 앞으로도 잘 지내 봅시다.”
남일은 장준환이 건네는 손을 잡으며 울분을 그대로 삼켰다. 장준환의 말대로 엘 엔터테인먼트라는 대형 기획사를 얻게 되었으니 남일에게 있어 손해는 아니었다. 그러나 억울한 마음은 여전해서 남일은 이 일을 절대로 잊지 않기로 했다.
***
“합병?”
“네. 합병이요.”
담담하지만, 파급력이 큰 단어에 성민이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합병을 하겠다는 회사의 이름을 듣고는 경악했다.
“가온 엔터테인먼트?”
“네. 이미 서 회장님과 그러기로 합의를 봤습니다.”
수한을 만난 남일은 이를 제대로 가는 것 같았지만, 이 일을 진행한 사람이 장준환이다 보니 앞에서는 싫은 티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름은 마루 엔터테인먼트로 통합합니다.”
수한의 능력이 이 정도일 줄은 성민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랐다. 남일에게 엘 엔터테인먼트를 건네고, 가온 엔터테인먼트를 빼내 오다니 굉장한 수완이었다. 그 과정 중에서 나이수가 남일에게 따로 해를 끼치지도 않아서 불안해했던 성민도 그제야 안심했다.
“그중에서 필요한 인력만 데려오고 나머지는 내보낼 생각입니다.”
이미 가온을 넘기기 전에 남일이 필요한 인력을 데려갔을 테니 거를 사람도 많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성민이 모를 리가 없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한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연예인도 우리 소속이 되는 건가?”
“네. 그렇죠. 잘 말해 두면 될 것 같습니다.”
마루 엔터테인먼트 자체가 요즘 잘나가는 기획사이니 가온 연예인에게 있어서 이 합병은 그리 나쁠 것 없는 일이다. 오히려 마루 엔터테인먼트에서 어떤 방향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주고, 어떤 드라마 혹은 영화를 가져올지가 더 궁금한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일 많은데 앞으로는 더 많아지겠네.”
“네. 그렇죠.”
그래도 데려오면서 시끄러워지는 일은 없을 테니 수한으로서는 만족이었다. 수한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남일을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나이수의 성격상 좋게 끝내고 나올 리가 없었다.
‘자수는 언제쯤 한다고 했지?’
나이수에게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빼앗았으니 나이수도 더는 큰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그저 남일을 향한 복수심만 가득한 상태다. 그러니 장준환에게 수한을 밀어주자고 한 게 아닐까 싶었다. 그 조건으로 건 것이 바로 자수였다.
‘원래 그걸 의도하고 짠 계획이라는 걸 안다면 얼마나 허탈해할지 모르겠네.’
장준환은 수한에게 엘 엔터테인먼트를 원하면 주겠다고 했지만, 수한은 원하지 않았다. 가온 정도면 합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엘 엔터테인먼트는 수한에게 있어 커다란 짐이 될 가능성이 컸다.
더불어 수한이 원하는 대로 하기에는 온갖 반대에 부딪힐 게 뻔했다. 수한은 그 과정을 최대한 생략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우리 연애할 시기는 더 밀어지겠네요?”
“아휴. 너무 잘난 상사를 만나면 이런 문제가 또 생기네.”
성민은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실은 그동안 정들었던 사람들과 다시 일한다는 생각에 잔뜩 들뜬 상태였다. 남일의 일도 잘 풀렸으니 더는 걱정할 게 없었다.
‘근데 무언가 하나를 놓친 느낌인데?’
성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한을 보자 수한이 징그럽다는 듯이 성민을 봤다.
“남자끼리 이러지 맙시다.”
“나도 너 싫거든? 남자라면 이젠 질색이다. 질색이야.”
“네. 제발 부디 여자 만납시다.”
“와. 여자 만날 시간도 안 주면서 너무하네.”
성민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해도 수한은 전혀 받아들이는 얼굴이 아니었다. 성민은 할 수 없이 한숨을 내쉰 후 대표실에서 나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지었던 죄에 대한 처벌은 받게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성민이 고개를 돌리자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 사이로 열심히 일하는 수한이 보였다. 이대로 남일을 끝낼 리가 없기에 성민은 다른 무언가가 남았나 싶어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