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12. 끝과 시작
원래라면 오랜 기간을 두고 천천히 무너졌어야 할 엘 엔터테인먼트지만, 수한의 손을 거치자 빠른 속도로 무너지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경영진에 대한 불만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리하여 경영진 교체를 안건으로 임시 주주 총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수한의 귀에 들려왔다.
“대단하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 돌아가지?”
“나비 효과 같은 게 아닐까 싶네요.”
수한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확실히 속도가 너무 빨라서 놀라긴 했다. 장준환이 미리 말해 주긴 했지만, 2차로 마약 사건이 터지면서 표절 사건과 엮이어 엘 엔터테인먼트를 향한 여론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이번 일을 통하여 경영진이 바뀔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그동안 해 온 게 있는데 쉽게 빼앗길까?”
“글쎄요. 그것까지는 저도 알 수가 없죠.”
나이수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게 남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성민은 매우 놀란 상태였다. 처음 수한에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수한이 장난치는 건가 의심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일에게까지 그 이야기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차려졌다.
‘이게 수한이가 말한 위험한 일인가?’
수한이 뒤에서 이 계획을 짰다는 사실을 나이수가 알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특히나 엘 엔터테인먼트를 빼앗기면 제정신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아니, 그전에 남일이 위험했다.
아무리 남일이 밉다고 해도 가족이다. 성민은 남일을 위험한 길로 내몰 수 없었다. 그런 성민의 생각을 안다는 것처럼 수한은 말했다.
“나이수 회장이 서 대표님을 해하게 놔둘 생각은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거 진짜야?”
“네. 절 믿으세요.”
혹시 몰라서 이미 남일의 곁에 경호원을 둔 상태였다. 물론 남일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수한은 신체적으로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성민이 도와주어 일이 진행된 건데 성민을 고려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에 관한 건 장준환에게도 미리 말해 둔 상태였다.
“그보다 결과가 궁금하네요.”
진짜로 수한의 생각대로 진행될지 궁금했다. 그와 별개로 수한은 가온 엔터테인먼트를 집어삼킬 계획을 조용히 진행했다. 내부적으로 알아본 결과 가온 엔터테인먼트는 처음부터 꽤 썩은 상태로 회사가 세워졌다.
나이수가 시작한 더러운 소문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부분은 전부 도려내고 삼켜야겠지.’
수한이 아무렇지 않게 마루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들의 일정을 살피자 성민은 여전히 걱정되었다. 이제는 수한뿐만이 아니라 남일까지 해서 걱정이 배가 되었다.
***
“괜찮아. 큰일은 없을 거야.”
남일은 갑작스레 전화를 건 성민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성민이 가족이라는 사실을 체감했다. 명훈의 말에 따라 성민을 의심했지만, 걱정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진심인 게 느껴졌다.
‘녀석.’
사업을 하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있는 게 당연했다. 남일도 그만 성민에 대한 의심을 풀기로 했다.
[그 나이수 회장, 강우형 이사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니 조심하세요.]
“그럼. 안 그래도 경호원을 쓸까 고민 중이야.”
남일도 그 일과 관련 있는 사람인지라 나이수가 최악의 경우 어떤 수를 쓸지까지 계산해 둔 상태였다. 눈엣가시 같은 강우형도 보낸 사람인데 남일이라고는 못 보낼까 싶었다.
그 연장선으로 남일은 임시 주주 총회를 준비하면서 짜증이 크게 났다. 나이수가 예전에 묻어 두었던 소문을 다시 꺼낸 탓이었다. 그러니까 남일이 그의 옛 경쟁자를 죽였다는 소문 말이다.
안 그래도 그 소문 때문에 과거에 꽤 고생했으므로 다시 나돌아다니는 소문에 남일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초조해서 그런 걸 겁니다.”
장준환의 도움으로 세무 조사가 무마되었으므로 명훈이 옆에 바짝 붙어 남일을 안심하게 했다. 명훈에게도 지금이 마지막 기회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물론 운이 좋으면 수한처럼 다시 신생 기획사로 시작해 천천히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명훈은 돌아가는 것보다 힘들더라도 빠르게 정상에 오르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지금 남일에게 붙어 위를 기대하는 게 훨씬 편하고 좋은 방법이었다.
“제가 뭐 도와드릴 거 없을까요?”
“하던 일이나 제대로 해.”
“네. 알겠습니다.”
스트레스를 받는 것과 별개로 남일의 말과 행동에서 오만함이 새어 나왔다. 임시 주주 총회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엘 엔터테인먼트라는 대형 기획사를 손에 넣게 되니 말이다. 물론 그에 따른 출혈이 있긴 했지만, 가온과 비교하면 엘 엔터테인먼트는 충분히 피를 흘릴 가치가 있다.
‘가온은 배우 회사로 돌리면 될 것 같고, 엘은 아이돌 쪽으로 계속 진행하면 되겠군.’
모자란 돈은 장준환을 통해 투자받으면 되니 마음이 아주 여유로웠다. 주혁과 소원을 통해 가수 쪽 콘텐츠가 큰돈을 벌어들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남일은 탐욕으로 입맛을 다셨다.
“최명훈.”
“네. 대표님.”
“내가 무엇이든 하라고 하면 할 수 있나?”
“무엇이든요?”
“그래.”
“이미 하는 중인 걸요. 대표님이 시키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명훈은 평소처럼 남일의 입맛에 맞게 대답했지만, 묘하게 그 질문이 싸하게 느껴졌다. 특히나 저 ‘무엇이든’이라는 말이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게 해 주었다. 범법에 관해서 말하는 건가 싶어 명훈은 속으로 멈칫했지만, 남일의 앞에서는 티 내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라고 해도?”
“네?”
이번에는 안 놀랄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명훈은 진심으로 말하는 건가 싶어 남일을 봤지만, 남일의 얼굴에는 장난기 하나 없어서 소름이 돋았다. 특히나 차갑게 가라앉은 남일의 눈빛이 진심으로 느껴져서 명훈은 순간 자신이 줄을 잘못 선 게 아닌가 싶어 혼란스러워졌다.
“농담이야.”
“네?”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니까 해본 농담. 재미있잖아.”
명훈으로서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지만, 농담이라고 하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명훈은 이만 가 보라는 남일의 말에 고개를 바짝 숙인 뒤 나오면서도 이상하게 자신을 보던 남일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그거 아무리 봐도 진심이었는데.’
살아생전 그런 눈빛은 처음이었다. 명훈은 본심을 농담으로 숨긴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남일이 살인자라는 소문이 있으니 말이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저 눈빛을 보니 사실일 수도 있겠다.
‘그럴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 일어난다면 그 대상은 누구일까?’
요즘 사이가 안 좋다는 나이수가 떠올라야 하는 게 정상인데 이상하게 수한이 떠올랐다. 명훈은 팔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 걸 느끼며 사무실로 걸어갔다.
***
“말도 안 돼.”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이수가 주주 총회에 온 사람들을 봤지만, 그들은 조용히 나이수를 외면했다. 이 안에서 가장 환한 사람은 표정 관리를 전혀 하지 않은 남일이었다.
그렇게도 오래 사람들을 설득하고 다녔지만, 그 사람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이 순간을 벼르고 있던 탓이었다.
강우형이 가고 난 뒤 그 기회가 사라진 줄 알았으나, 그 기회는 서남일이라는 인물을 통해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
비록 남일의 소문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이미 옛날에 나돌았던 소문이다. 그리고 그 소문의 출처가 나이수라는 게 밝혀지자 나이수를 향한 여론이 더욱더 싸늘해졌다.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한 늙은이.’
엘 엔터테인먼트를 크게 키운 공은 인정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이제는 명예롭게 물러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시대를 물려줘야 한다는 게 대세 여론이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나이수 회장님.”
남일은 웃는 낯으로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나이수가 그 손을 잡을 리가 없었다. 강우형을 보내 버리는 데 1등 공신이었던 남일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는 모습을 보니 혈압이 올라갔다.
“앞으로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말은 나이수를 향해 말했지만, 남일의 시선은 주주들을 향했다. 나이수는 뒤에서 크게 웃고 있을 장준환을 떠올리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지금 네놈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명목은 강우형에 대한 복수겠지만, 나이수가 볼 때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강우형의 일에는 남일도 얽혀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마지막 다리를 남일이 건너갔으니 나이수에게 더는 희망이 없었다.
나이수가 터덜터덜하게 회사 밖으로 나가자 지나가던 직원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회장님이 지신 거야?”
“맙소사.”
이런 소식은 참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나이수는 입안이 쓰다 못해 허탈감이 밀려왔다. 그의 인생을 전부 엘 엔터테인먼트에 바쳤건만 그 결과가 이러하니 서글픔이 밀려왔다.
‘차라리 자수해서 서남일과 함께 터져 버릴까.’
최후의 보루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분노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강우형의 때처럼 직접 해를 끼치는 방법도 있겠지만, 자신이 남일이어도 제 몸을 필사적으로 보호할 것 같았다. 아까만 해도 옆에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남일을 지키고 있었다.
‘망할 놈.’
결국, 답은 자수였다. 남일도 더러운 일에 손을 많이 담그긴 했지만, 나이수처럼 인맥이 넓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이수와 다르게 자수를 해도 뒤에서 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강우형의 일에 남일이 엮였으니 장준환이 도와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만족 못 하지.’
그 순간, 떠오른 게 수한이었다.
‘김수한이라고?’
나이수에게 있어 강우형 같은 사람이 남일에게는 수한이었다. 나이수는 수한의 능력을 인정하기에 수한이 아래로 들어온다고 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남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제 손으로 수한을 쫓아내지 않았던가?
‘김수한을 이용해서 서남일의 뒤통수를 친다?’
나이수는 대기하고 있던 차에 타기가 무섭게 수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엘 엔터테인먼트의 수장이 바뀌었으니 수한이 애써서 표절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었다. 우선은 그 이야기부터 한 뒤 수한과 사이를 계속해서 유지하기로 했다.
여기서 수한이 나이수의 손을 끊어 버린다면 더는 희망이 없지만 말이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평소대로라면 제 소개를 했을 수한인데 벌써 소식이 거기까지 갔는지 수한의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이수는 겨우 참았던 눈물이 나왔지만, 우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그럼요.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젊은 사람에게 넘겨주는 게 맞죠.”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으나, 역시 서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 회사를 지키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했는데 말이다.
[회장님. 끝까지 희망을 버리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수한의 따뜻한 위로에 나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내었다. 남일에 대한 수한의 감정도 좋지 않기에 나이수는 수한의 위로가 담긴 말을 듣다가 눈을 번뜩였다.
[서 대표님의 뒤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은데 차라리 그 뒤에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눠 보는 게 어떻습니까?]
인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 싶겠지만, 마지막 끈이기는 했다. 나이수는 수한의 말대로 장준환에게 우선 연락을 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