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12. 끝과 시작
한창 돌던 최민희 작가의 표절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원작자와 합의를 잘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원작을 사기로 했고 협의하는 과정 중에서 큰돈을 쓰게 되었다.
원작자는 다음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고, 덕분에 한숨 돌리게 되었다. 물론 이건 엘 엔터테인먼트의 입장이었다.
‘내가 속 사정만 잘 알았어도 다르게 처리했을 텐데.’
나이수가 표절 관련 일은 수한에게 전적으로 맡겼기에 남일이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되어도 무엇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이익을 본 것도 아니고, 안 본 것도 아니네.’
원작자의 마음이 견고했던 만큼 비례하여 큰돈을 쓴 데다가 일정 비율을 원작자에게 줘야 하니 드라마가 성공했다고 하여 엘 엔터테인먼트가 크게 이득을 본 게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표절을 하냐는 말들로 마약 사건과 합쳐서 이미지만 안 좋아졌다.
남일은 회장 자리에 취임하기가 무섭게 엘 엔터테인먼트의 재정 상태부터 살폈다. 더불어 회사가 전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을 했다.
‘회사 운영을 왜 이렇게 했지?’
전체적으로 살펴본 결과 나온 생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으로 보이나, 상세히 살피면 구멍가게도 이런 구멍가게가 없었다. 가온보다 못한 시스템에 남일은 깜짝 놀랐다.
‘이걸 어떻게 뜯어고쳐야 하지?’
뜯어고치려면 대대적 공사가 필요한데 남일은 이미 투자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성향을 살폈다. 그들은 나이수와 같이 일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나이수와 같은 경영자와 가장 합이 잘 맞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있는 시스템을 고치지 않으면서 획기적으로 회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사람을 찾았다. 물론 남일은 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겠다며 호언장담을 했지만, 막상 회사 경영 상태를 보니 눈앞이 깜깜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기에 무언가라도 해 보려고 했다.
“그렇게 하면 주주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작은 중소 기획사이면 모를까 엘 엔터테인먼트와 같은 대형 기획사에서는 무리입니다.”
남일은 마치 조선 시대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남일이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안 된다는 이야기만 들려왔다. 엘 엔터테인먼트와는 맞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환장하겠네.’
나이수라면 그런 말들을 물리치고,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다녔겠지만, 남일에게는 그런 자신감과 추진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일이 무언가 크게 능력을 보여 주고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남일이 대주주라고 하여도 투자자들의 지지를 받지 않았다면 경영자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 거다. 가온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도 별말이 나오지 않았기에 남일은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명훈은 가온에서 따라온 몇 안 되는 남일의 사람이었다. 다른 엔터테인먼트 사와 다르게 대형 기획사답게 고학력의 능력자를 고용했기 때문에 명훈은 낙하산으로 들어왔다면서 안쪽에서 욕을 먹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더욱더 남일에게 붙어 성공해야 했다.
“괜찮아.”
말은 괜찮다고 하지만,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은 얼굴이었다. 명훈은 남일이 시키는 대로 수한이 어떻게 가온을 합병했는지에 대해 보고했다.
엘 엔터테인먼트를 버거워하는 남일과 다르게 수한은 효과적으로 분야를 분류하여 가온을 합병했다. 그에 맞춰 인재들도 적절한 자리에 배치했기에 마루의 명성에 가온의 명성을 얹어 시너지가 배가 되었다.
물론 최민희 작가 사태 때문에 수한도 욕을 먹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원작자가 수한 덕분에 마음이 풀렸다고 따로 인터뷰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차기작에 도움을 주겠다는 말까지 하여 기대 중이라고 했다.
수한도 더는 한번 표절한 사람은 더는 믿지 않겠다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다고 말하며 복지 단체에 크게 기부를 해서 그나마 명성이 덜 깎였다.
“배우 차현이 이광무 감독의 영화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수한은 한번 맺은 인연을 특별한 일이 없는 한은 계속해서 유지해 나가는 편이었다. 명훈은 남일이 조사시키기 전까지는 수한의 이런 능력들을 알지 못했기에 매우 놀랐다. 명훈이 놀랐으니 남일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난놈은 난놈이야.”
남일은 그 말을 하면서도 씁쓸해했다. 원래라면 엘 엔터테인먼트를 삼키자마자 수한을 견제해야 했는데 도리어 엘 엔터테인먼트 투자자들에게 끌려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나이수 회장의 행방을 찾아봤는데 묘연하다고 합니다.”
사실 남일의 불안감을 가장 크게 키우는 게 나이수였다. 나이수를 칠 때만 해도 욕심에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막상 나이수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니 눈이 번쩍 뜨였다.
장준환만큼은 아니어도 나이수의 인맥은 장난이 아니었다. 솔직히 마약 사건은 장준환만 아니었어도 나이수의 선에서 마무리될 사건이었다.
‘그래도 설마 증거 같은 건 없겠지.’
일단 장준환이 믿어 준다고 했으니 장준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가온 엔터테인먼트를 넘긴 만큼 보호를 해 줄 거라 믿었다. 그 증거로 2차로 터진 마약 사건이 잘 무마되었다. 그러므로 남일은 장준환을 믿고 잠시 숨을 돌렸다.
“이제 가 봐도 될까요?”
“그래. 지시할 게 있으면 다시 부르지.”
명훈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회장실에서 나왔다. 명훈은 엘리베이터 앞에 앉아있는 비서진을 향해서도 고개를 숙였으나, 그들은 보는 척 마는 척하며 명훈을 무시했다.
‘그놈의 학력이 뭐라고.’
대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고 무시하는 행태에 명훈은 화가 났지만, 언젠가 보복할 날이 올 거라 믿으며 조용히 이를 갈았다.
명훈은 자리로 가 앉다가 유난히 풀이 죽은 사람들을 발견했다. 명훈과 함께 온 가온의 사람들이었다. 처음 남일을 따라올 때만 해도 월급의 앞자리가 달라졌다면서 크게 들떴던 사람들인데 오자마자 기존에 있던 사람들에게 쭉 무시를 당하면서 자존감이 무너졌다.
그건 명훈도 마찬가지라서 힘없이 자리에 앉아 눈치를 보았다. 두고 보자고 이를 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일 같이 그러고 있으니 있던 자존감도 떨어졌다.
구멍가게식으로 운영되는 것과 별개로 엘 엔터테인먼트 직원은 한 명, 한 명이 다 능력자였다. 함께 대화하게 되어도 서로 가진 지식의 차이가 크니 가면 갈수록 소외당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가온에 남아 있다가 합병당하는 게 나을 뻔했다. 물론 명훈은 자신은 그 명단에서 제외될 거라 생각하지만 말이다.
‘김수한.’
대학로에 있을 때만 해도 얼굴 빼고는 별 볼 일 없는 녀석이었는데 이쪽 일이 천직이긴 한가 보다. 명훈은 수한이 잘 되어 가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좋다가도 한편으로는 질투가 났다.
명훈은 남일이 준 일 아니면 할 일이 없기에 멍하게 있다가 동현에게서 온 전화를 보고는 비상계단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명훈아. 그쪽 일은 할 만해?]
동현이 마루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재원을 통해 듣게 되었다. 덕분에 용기 내서 연락하게 되었고, 서로 마음을 풀었다. 회사가 더 잘 되었으면 하는 욕심에서 독단적으로 행동한 것을 동현이 이해해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이죠. 형. 형은 어때요?”
[여긴 늘 시끄러워. 지금도 시끄러운 거 들리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즐거워하는 게 느껴졌다. 처음 동현과 기획사를 차렸을 때가 생각나서 명훈은 울컥했다. 잘못된 길로 온 건 명훈만인 것 같았다.
“그래도 역시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게 편하죠? 형?”
[그렇긴 한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안 울려고 했는데 역시 서글펐다. 명훈이 끅끅 소리를 내며 울자 핸드폰 너머로 당황한 동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훈은 속상해서 그동안 이 안에서 겪었던 일에 관해 말했다.
[네가 괜찮다고 하면 대표님한테 말해 볼까? 지금이면 대표님도 너와 있던 일을 잊었을 거야.]
명훈은 하지 말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하게 되었다. 혹시 또 모를 일이 아닌가? 동현의 말대로 시간이 지나 명훈의 마음이 풀린 것처럼 수한의 마음 또한 풀렸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럼 부탁할게요. 형.”
[그래. 힘들어도 조금만 참고. 알았지?]
다정한 목소리에 명훈은 눈물을 닦아 내며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했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 남일을 따라왔지만, 이곳은 명훈과 맞지 않는 곳이었다. 명훈은 제 그릇을 결국 인정하기로 했다. 자신의 그릇은 여기까지였다.
***
수한은 처음 동현에게 명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연히 안 된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이 바뀌었다.
‘최명훈도 그쪽에서 꽤 고생하는 것 같던데.’
엘 엔터테인먼트 출신이 많아서 그런지 엘 엔터테인먼트 사정에 대해 들어오는 정보가 많았다. 수한은 학력을 가지고 차별을 한다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수한도 굳이 따지자면 좋은 학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직원들이 수한을 따르는 이유는 하나였다. 수한의 능력. 수한이 보여 주는 능력 자체가 수한의 배경을 뛰어넘기에 믿고 따를 수 있었다. 실제로도 믿음을 준 것보다 더 큰 능력을 보여 주고 있으니 믿음의 대가는 좋게 치러지는 중이었다.
“그럼 공정하게 실력으로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예전과 다르게 수한의 편이 많아서 수한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더불어 강직한 성품의 사람들이 많으니 명훈의 간사한 세 치 혀에 넘어갈 사람이 없을 거라는 것도 알았다.
수한은 이번에 새로 낸 주혁의 신곡이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고 콘서트 준비를 하게 했다. 가온과 합쳐지니 기존에 있던 곡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수한은 기존 곡들을 따로 편곡하여 대중성을 확 올려서 ‘더 블랙’이 음악 예능에 나가 그 노래들을 부르게 했다. 덕분에 원곡이 역주행하는 일도 일어나 마루 엔터테인먼트 내에서 작은 파티도 했다. 그래서인지 주혁이 편곡한 곡에 욕심을 부리는 걸 수한도 본 적이 있다.
“그 노래들도 그러면 콘서트 때 넣기로 하죠.”
“네! 대표님!”
수한은 틈틈이 일하면서 피곤함을 달래 주기 위해 홍삼을 마셨다. 이 홍삼은 요즘 너무 피곤해 보인다면서 예진이 보내 준 홍삼이었다. 그전에 느꼈던 쓴맛을 다시 느끼게 될 줄 몰랐기에 수한은 먹으면서도 소름이 돋았다. 물론 쓴맛과 비례하여 체력이 좋아지기는 해서 군말 없이 먹었다.
“대표님!”
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에 수한이 고개를 돌리니 성민이 놀라서 달려온 게 보였다. 수한이 무슨 일이냐고 보자 성민이 기사를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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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그룹 강우형 전 이사의 죽음,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강우형 살인 사건 용의자 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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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사고사가 아니라는 게 밝혀진 모양이야. 용의자가 직접 자수했다는데 아는 사람 말로는 나이수 회장인 것 같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가져왔어.”
자수할 거라고 하더니 그동안 조용히 있던 나이수가 드디어 움직였다. 나이수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나오지 않았지만, 수한은 얼마 안 가서 남일이 소환될 거라 확신했다. 나이수는 함께 죽으면 죽었지, 혼자 죽을 사람은 아니었다.
“우리 회사에는 영향 가지 않겠지?”
말은 그리하면서 성민이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수한에게도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남일이 이 일과 연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수한에게 물어본 건 그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수한은 성민이 듣고 싶은 말이 무슨 말인지 알면서도 냉정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에 관해서 말한 적이 있으니 말이다.
“연관되어 죄진 게 있다면 처벌을 받아야겠죠. 그게 누구라 할지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