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77화 (177/201)

#177 생쥐와 까마귀는 사이가 나쁘다

어느새 제국의 땅이다. 공기도, 흙도, 그레데와 다를 것 없을 텐데, 왠지 푸근하고 달게 느껴졌다.

그레데 왕국에 있을 때는 심장 위에 맷돌을 얹어놓은 듯 답답하기만 하더니, 새싹 돋는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수많은 참상을 뒷머리에 붙이고도 마음이 넘실넘실 춤을 추었다.

루디는 쓴웃음을 지으며 서서히 말을 몰았다.

병사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내와 아이가 있는 병사는 가족 만날 생각에, 아직 어린 병사는 나무패를 돈으로 바꿔 놀 생각에 즐겁다. 노예병은 큰 전쟁 뒤에 받는 약간의 휴가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전쟁터에서의 용맹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모두의 얼굴이 햇살 받은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피었다.

하지만 모두가 기쁜 가운데, 단 한 명 만은 점점 마음이 서늘한 호수에 가라앉듯 슬퍼져갔다.

***

까마귀는 항상 그녀의 곁에 있지만 동시에 여러 곳에 가 있다.

시조가 남긴 까마귀 한 마리가 다른 새 모두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 있는 까마귀의 정보도 순간순간 들어왔다.

제국군 말미에 있는 말단 병사가 기쁜 듯이 말한다.

[우리 황후 마마가 기뻐하시겠지. 그분이 폐하께 달려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웃음이 난단 말이야.]

제국군 선두에서 앞서가던 늙은 병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폐하께서도 후계자님을 얻으시는 건가. 폐하께서 계속 말씀하셨던 황후마마의 열여덟 살이 이제 지나가버렸으니 말이야.]

항상 황제의 곁을 지키는 보좌관들이 웃으며 말을 나눈다.

[황궁에서 연락이 왔소. 두 분의 첫날밤을 위한 준비는 완벽하다고 하더군. 마음을 들뜨게 하는 향도, 구하기 어려워 애를 태우던 최상급 향유도....]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까마귀가 그들의 소리를 듣고 느끼는 감정이 그대로 전해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손에 잡힐 듯이 알 수 있었다.

이전에는 까마귀들에게 이토록 강렬한 전파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인인 황제가 가까이 있으면서 점점 힘이 강해져, 지금은 넘쳐흐르고 있다. 그 때문에 들릴 리 없는 소리가 까마귀의 감각 전체를 통해 곧바로 서쪽마녀에게 전해졌다.

차라리 듣지 못한다면 나을 것이다. 아무 소리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제국에 돌아가면 좋을 텐데, 황제의 지나친 힘이 그걸 용납해 주지 않았다.

서쪽마녀는 마차 벽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때문에 몸이 튄다. 그때마다 머리도 함께 흔들려 벽에 부딪쳤다.

까마귀가 걱정스러운 듯 동그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룩덜룩 현실과 닮지 않은 배경 속에서 까마귀의 까만 눈동자가 빛난다.

서쪽마녀는 애써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괜찮아. 조금 피곤해서 그래.'

"...."

까마귀가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 따위, 아마 모두 까마귀에게 누설되어 있을 테니 속일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서쪽마녀는 속이는 것처럼 작게 미소를 띠었다.

다른 마녀들과 달리 서쪽마녀는 자신이 직접 동물을 사역하지 않는다.

까마귀를 모으고, 끈질기게 그들의 몸속에 마력 통로를 만드는 등의 일은 모두 시조가 남긴 까마귀가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쪽마녀는 다른 마녀들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많이 까마귀를 사역할 수 있는 것이다.

서쪽마녀가 하는 일이라고 해야 고작 자신의 마력을 시조의 까마귀와 그가 길들인 새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뿐이었다.

그런 만큼, 아주 작은 수고라도 더 이상 그들에게 끼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슬프고 괴로운 것 따위의 일을 그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그러면 까마귀도 슬퍼한다.

시조가 남긴 말은 구속력이 강해서, 까마귀는 서쪽마녀의 마음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서쪽마녀는 까마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나의 모든 것은 그분이 베푼 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지만 정작 그 사람은 자신을 소유해 주지 않는다.

아주 조금 가까워졌던 거리가, 제국의 황궁에 다가갈수록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다. 황제가 보여주었던 작은 온기가 모두 황후에게로 돌아가 버린다. 차곡차곡 가슴속에 슬픔이 쌓였다.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까마귀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지금만 잠시 울게 해 줘. 내일은 반드시 웃을 수 있을 테니.

***

"맙소사, 마마. 눈이 빨갛잖아요."

타이라가 두 손으로 자신의 볼을 감싸며 작게 비명을 질렀다.

다른 시녀들도 얼굴색이 파랗다.

한 명씩 돌아가며 리리샤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절망적인 목소리로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이 일을 어째. 폐하가 조금 뒤에 도착하시는데 토끼 눈이 됐어요."

"어째서 하필이면 지금."

"마마의 눈동자 색에 맞춘 머리 장식의 보석을 바꿔야 할까요?"

시녀들이 허둥지둥하는 소리를 듣고 리리샤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미안해, 모두들. 정말 미안해.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몇 년 만에 루디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눈이 말똥말똥 해졌다. 자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눈이 또렷해지는 거야.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남작부인이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마마는 잠시 눈을 감고 있어주세요. 절대로 눈을 떠서는 안 됩니다. 타이라, 그대는 의국으로 가서 파블로를 찾아요. 마마의 눈이 빨갛다고 설명하면 알아서 필요한 걸 줄 거예요."

타이라가 서둘러 방을 나가고, 다른 시녀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리리샤의 눈 위에는 물을 적셔 차갑게 식힌 물수건이 얹어졌다.

"미안."

리리샤가 눈을 감은 채 풀 죽은 얼굴로 말하자, 남작 부인이 약간 웃는 듯했다.

"괜찮습니다, 마마. 이런 일을 위해서 제가 있는 거니까요."

눈을 감자 머릿속에서 그동안 배웠던 성교육 그림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젯밤에도 질리게 보았던 건데 지치지도 않고 또 떠오른다. 이제 그만 보고 싶어. 어깨가 땅으로 축 처졌다.

뭐든지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징그럽기만 하던 성교육 그림도 일 년, 이 년이 지나자 그렇게 낯설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는 시녀들과 몰래 모여서 그림을 놓고 시시덕거릴 정도로 익숙해졌다.

남작 부인 몰래 그림을 보면서 우리들은 타락한 여자라고 장난 어린 한탄을 하고, 그림 속의 남녀를 손가락으로 콕 찌르며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어디를 찔렀다고는 말 않는 게 좋겠지.

하지만 그림은 그저 그림일 뿐이었다. 거기에 진짜 살아있는 사람을 대입하지는 않았다.

한데 막상 루디가 오는 날이 되자 그 그림이 진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게다가 성교육 선생님은 기초적인 것은 가르쳤지만, 남작 부인이 뭔가 말했는지 진짜 중요한 건 알려주지 않았다.

남자를 유혹하고 몸으로 농락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은 거야!

그저 매우 기본적인, 남녀가 어떻게 몸으로 화합하는지 까지만 배울 수 있었다.

남작 부인에게 조금 애원해봤지만, 나머지는 남편에게 배우는 거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어쩌면 노는 기분이었는지도 몰라. 실감 없이, 그저 먼 훗날 생길 일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멍하니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시녀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깜짝 놀라 눈을 뜨려고 하자, 남작 부인이 리리샤에게 말했다.

"마마께서는 그대로 눈을 감고 계시기 바랍니다. 별일 아니에요. 창 밖에 까마귀가 죽어있었을 뿐입니다."

시녀들이 소란스럽게 파닥거리며 곁으로 와서 속닥거렸다.

"하지만 마마, 저건 정말."

"까마귀 수백 마리가 창밖에 죽어있어요."

"서쪽마녀는 이곳에 없는데 멀리에서도 까마귀를 부릴 수 있나 봐요."

"마녀라는 건 정말 무서워요. 그렇지 않나요?"

"대체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괴롭힘일지도 몰라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마마. 벌레 죽은 걸 선물한다든가 하는 거."

시녀들의 말에, 남작 부인이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들 말아요. 마마는 제국의 황후이고, 서쪽마마는 일개 마녀입니다. 누가 누구를 괴롭힌다는 겁니까."

남작 부인의 말에 시녀들이 조용해졌다. 남작 부인은 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마께 이상한 마음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서쪽마녀는 공식적으로 제국의 녹을 받는 사람이에요. 폐하의 신하입니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마마와 폐하의 신하 사이에 틈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남작 부인이 가장 먼저 서쪽마녀의 주변을 탐구했다. 시종들에게 그녀가 황제를 유혹하는지 물어보았던 사실을 타이라에게 들었던 것이다.

문득 제리가 어젯밤 바쁘게 사방을 돌아다녔던 일이 생각났다. 어쩌면 제리가 한 짓일까. 하지만 왜? 까마귀는 어디에서 모아온 거야?

리리샤는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당장 몇 시간 뒤면 루디가 온다.

시녀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는 점차 사그라들고, 황후궁은 다시 황제를 맞이하는 준비로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이제 황도를 얼마 안 남겼을 무렵의 일이다.

갑자기 멀리에서 빛나는 뭔가가 빠른 속도로 제국군에 가까워졌다. 굉장히 빠르다. 마치 번개가 바닥을 타고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엇!"

"저것들은!"

병사들의 입에서 놀라움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루디는 말위에서 그것을 보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저건 생쥐 무리다. 당연히 루디가 만든 빛의 생쥐들이었다. 마치 제국군과 싸움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살기가 가득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 생쥐 무리 뒤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서 펭귄들이 바다를 타고 헤엄치는 것처럼 엎드려 미끄러져 온다.

생쥐와 펭귄 사이사이에는 여우와 참새 등 루디가 리리샤에게 붙여 두었던 마생물들이 있었다.

모두 몸을 잔뜩 부풀린 채 화가 나 있었다.

'황궁에 있어야 할 아이들이 왜 이곳에.'

루디가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군대와 함께 이동하던 까마귀들이 까악 까악 소리를 내며 날개를 퍼드득거렸다.

갑자기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까마귀들은 곧바로 마생물들을 향해 날아갔다.

서쪽마녀의 마차에서, 웬만해서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는 까마귀도 나왔다. 대장 까마귀가 큰 소리로 까악 까악 울자, 근처에 있던 까마귀가 모두 날아온다.

수천 마리의 까마귀가 마생물을 뒤엎었다.

하지만 실체가 없는 마생물은 그들끼리 타고 올라 까마귀 몸을 뚫고 올라왔다.

그리고 까마귀 위에 올라타는 것처럼 하여 새 전체를 뒤덮는다. 둘이 합해지자 마치 까마귀가 빛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제국군의 행군이 멈추고, 까마귀와 마생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여기저기서 까악까악, 날카로운 공격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다시 까마귀 비명이 울렸다.

후두둑후두둑, 까마귀가 땅에 떨어졌다. 죽은 건지, 아니면 기절한 건지는 모르겠다. 사방이 검은 새와 밝은 빛으로 난리였다.

서쪽마녀가 당황한 듯 마차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녀도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다. 당황하여 무슨 일이냐고 외치고 있었다.

"...."

잘은 모르지만 이건 리리샤와 서쪽마녀의 싸움이다. 리리샤가 명령했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그녀들은 모르는, 그녀를 편드는 생물들의 전쟁일 것이다.

루디의 눈썹이 잔뜩 치켜 올라갔다.

"너희들."

루디가 막 말을 하려는 순간, 봉황 두 마리가 훌쩍 모습을 나타냈다.

봉황 두 마리가 머리를 기울여 루디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뭔가를 알았다는 것처럼 훌쩍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봉황이 커다란 날개를 천천히 펄럭이며 까마귀와 마생물들 위로 한 바퀴 돈다.

그들의 날개에서 화려한 빛이 떨어져 사방으로 퍼졌다. 그 빛은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까마귀와 마생물에게 달라붙었다.

그리고 갑자기 까마귀, 마생물 할 것 없이 모두가 바닥을 뒹굴었다.

고통스러운지 까마귀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른다.

마생물은 소리를 내지는 못했지만 입을 크게 벌리고 몸에서는 파직 파직 전기를 뿜었다.

"...."

사방이 조용해졌다.

평소에는 아름답고 온화한 분위기였던 봉황의 행동에, 병사들도 약간 놀란 모양이다.

루디는 일제히 바닥을 뒹구는 까마귀와 마생물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이, 좀 심한 거 아니냐.'

봉황 두 마리가 마음속의 말을 들은 것처럼 살짝 고개를 돌려 루디를 보았다. 그 모습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다. 여전히 온화하고 아름답기만 했다.

봉황은 루디가 명령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리를 내는 것처럼 부리를 몇 번 움직였다.

부리에서 푸른빛이 퐁퐁 비눗방울처럼 나와 사방으로 퍼졌다.

그 빛이 닿는 곳마다 고통이 완화하는 모양이다. 까마귀와 생쥐들이 그제야 가쁜 숨을 쉬면서 몸을 축 늘어뜨렸다.

[....]

봉황 두 마리가 탓하는 것처럼 까마귀와 마생물들을 보자 모두 루디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반성하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처량맞은 얼굴들이다.

까마귀도, 마생물도 군데군데 몸이 탄 것처럼 연기가 피어올랐다.

봉항은 엄격하구나.

루디는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너희들,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 각자가 주인을 위하는 건 좋지만 누군가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되는 거야."

이번에는 대장 까마귀가 머리를 푹 숙였다. 원인은 너였냐.

루디는 대장 까마귀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강하게 튕겼다.

"리리샤는 나의 부인이야. 혹시라도 위해를 가하면 까마귀 통구이로 몽땅 구워서 먹어버릴 테다."

[...까악!]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는 대장 까마귀를 보고, 루디는 작게 웃었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는 사이좋게 잘 지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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