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집으로 돌아가자
제국군이 그레데의 왕도에 도착했을 때,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열린 성문 앞에는 그레데 왕국의 병사들이 천명 가까이 서 있었다. 병사들은 제국군의 모습이 보이자 모두 무릎을 꿇었다. 무기를 든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병사들 제일 앞에는 옷차림이 훌륭한 기사 차림의 남자들이 수십 명 있었는데, 전투를 벌인 뒤였는지 상처를 입은 사람도 끼어 있다.
제국군에서 한 부대가 나와 성문 쪽으로 달려갔다.
약간의 대화가 오가는 것이 보였다.
제국군 대장이 그레데 쪽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를 루디 앞으로 데려왔다.
적군의 대장 뒤에 두 명의 남자가 따라왔는데,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한 개 들고 있었다.
상자라고 하면 이전부터 좋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루디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말을 탄 채 다가오는 남자들을 보았다.
루디 앞까지 오자, 적의 대장이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레데 왕국의 근위 대장입니다. 우리 그레데 왕국은 제국의 황제 폐하 발 앞에 엎드려 항복합니다."
뒤따라온 적의 근위병이 들고 있던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늙은 남자의 머리가 들어있었다.
"그게 국왕인가?"
루디가 묻자, 그레데의 근위 대장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근위 대장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늙고 주름진 국왕의 얼굴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머리도 깔끔하게 뒤로 손질해서 넘겼다. 비록 왕의 머리를 자르기는 했지만 사후에는 정중하게 취급한 것 같다.
"그대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것이냐?"
루디가 묻자, 근위 대장은 조용히 머리를 바닥에 붙였다.
"저와 근위대원의 목숨은 어찌 되어도 좋습니다. 주군의 믿음을 배신한 사람입니다. 죽어 마땅할 것입니다. 다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공주님들의 목숨에 온정을 내려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왕자와는 달리, 공주는 시집 여하에 따라 제국의 품 안에 안길 것입니다. 이렇게 애원합니다. 부디 온정을."
근위 대장도 왕족의 남아는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 모양이다. 다만, 제국의 황제가 아이에게 동정적이라는 소문을 믿고 공주들의 목숨이나마 구하려는 것인 듯했다.
'간신히 어린 공주들의 목숨은 구하는가.'
눈물이 날 것 같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가 감정에 움직이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글쎄, 그건 훗날 결정될 것이다. 그대들은 처분을 기다려라."
루디는 감정을 누르고 조용히 말했다.
바로 곁에 있는 레빈과 보좌관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고삐를 당겼다. 흑마는 근위 대장을 지나 유유히 앞으로 걸어갔다.
레빈이 병사 여러 명을 데리고 왕도 안으로 달려갔다. 그에게 맡겨두면 괜찮다. 레빈이라면 말로 하지 않아도 루디의 마음을 잘 살펴줄 것이다. 혹시라도 어린 공주들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지켜준다.
그로부터 일주일 가량, 후궁의 여자를 파악하고 제국군이 가지고 있는 그레데 왕족의 명부를 확인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몇 명 정도 왕자가 없어져 있었다. 왕이 죽은 뒤, 후궁에 있는 첩이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도망간 모양이었다. 세 살, 다섯 살, 그런 정도의 아이들이었다.
그레데의 근위 대장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을 것이다. 그렇게 어린 왕자라면 혹시 놓아주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다. 그런 식으로 제국이 물렁하다는 인식을 주어서는 안 된다. 광범위한 수색이 시작되었다.
루디의 마생물은 수색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서는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 그래서 마생물에게는 명령할 수 없었다.
루디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속으로 간절히 애원했다.
'제발, 잡히지 말고 도망쳐다오.'
수색이 진행되는 동안 전후 처리가 하나씩 이루어졌다.
후궁에 있는 첩은 제국군 고위 간부에게 주어지고, 왕자들의 처형 날짜가 정해졌다.
왕도에 남아있던 고위 귀족과 근위대 중에서 일부는 사형이 결정되었다.
그레데 왕은 빌어먹을 작자였던 것 같다. 여기저기에 씨를 뿌리고 다녀서, 근위대 중에 왕족의 피가 섞인 사람이 있었다.
혼외 자식의 경우에는 자식으로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레데에서는 사생아도 왕이 인지만 하면 왕족으로 인정된다. 왕위 계승권이 없다면 모를까, 멀기는 하지만 계승 자격이 있다면 살려줄 수 없었다.
그런 일이 마무리될 무렵 왕자를 데리고 도망쳤던 후궁을 모두 찾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도망...치지 못했나.'
루디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시종들이다. 그들이 슬그머니 놓아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았던 걸까.
아니, 그래, 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도망친 후궁을 찾지 못한다면 제국의 위엄에 관계된다. 훈련된 병사도 아닌, 여자와 아이를 찾아내지 못하는 무능한 제국군이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충분히 그건 알고 있지만.
'시종들이라면 내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여겼는데.'
아주 조금 서글퍼졌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어린 왕자들이 도망쳐 줬으면 했다.
'나는 황제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지도 모르겠군.'
그런 마음을 숨기고 다시 붙잡혀온 후궁을 만난 날, 루디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후궁들은 하나같이 자식이 모두 죽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여자들의 얼굴에는 애통함 대신 감사가 스며 있었다.
'놓아줬구나.'
죽은 시체로 위장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른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위장해서 어린 왕자들을 놓아준 게 틀림없다.
하지만 분명히 감시를 붙여, 이후에도 절대 제국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조치했을 것이다. 아아, 정말 자신은 부하를 잘 만났다.
며칠 뒤, 왕자들의 처형이 이루어졌다. 수십 명의 왕족이 처형대 위에서 머리를 떨구었다.
왕족과 귀족의 죽음에 열광하던 카니아 때와는 달리, 왕도는 침묵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카니아에서 제국은 자비의 지배자였지만, 그레데 왕국에서의 제국은 자비를 모르는 정복자, 용서하지 않는 냉혹한 사신이다.
언제 제국의 칼날이 자신들을 향하게 될지 몰라, 왕도의 주민은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다.
전후 처리가 얼추 끝난 뒤, 통치를 위한 군대를 그레데 왕국에 남기고 루디와 제국군 본대는 몇 년 만의 귀향길에 올랐다.
어느새 눈 쌓인 틈으로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이 되어 있었다.
***
제국의 황궁은 온통 난리 법석이었다. 여기도 저기도 모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뿐이다. 오랜만에 돌아오는 황제를 맞이하는 궁 안은 행복한 웃음으로 가득해졌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은 예외다. 리리샤는 웃기는커녕 아무 표정도 지을 수 없었다.
"마마, 너무 긴장하셨어요. 왜 그렇게 굳어 계시나요?"
"...."
타이라가 묻는다. 하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뭔가 말하려고 하면 가슴에 돌덩이 같은 것이 들어차면서 숨이 턱턱 막혔다.
"황제 폐하를 좋아하시는 건 맞지요? 기쁘신 거죠?"
"...."
모르겠다. 좋아하는 건 확실한데 기쁜지를 모르겠어. 만나고 싶기도 하고, 만나기 싫기도 했다.
"마마?"
"...마리, 마리가 필요해."
"...."
기가 막히다는 듯 타이라가 리리샤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좋아요, 마마. 후궁으로 가서 마리님께 기합을 받아 오세요."
곧바로 마차가 준비되었다.
오늘은 댄스 수업도, 귀부인과의 살롱도 모두 취소했다. 내일 황제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오늘 리리샤가 할 일은 내일을 위해 때 빼고 광내는 일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 얼굴에 표정을 되돌리는 일이 중요하다.
리리샤는 초조한 마음이 되어 마차를 타고 후궁으로 향했다.
왜 이렇게 무서운 걸까. 그렇게 좋아하는 루디가 돌아오는데 왜 두려운 거야? 뭐가? 이대로 아무 표정도 짓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루디가 왔는데 무서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게 되면 어떻게 해?
리리샤는 새해에 루디에게 받은 머리장식을 손에 꼭 쥐었다. 울고 싶어졌다. 어쩌면 좋아.
마리는 정원에서 나디아그라 마마와 염소를 붙잡고 있었다.
응? 나디아 마마가 왜 염소를 붙들고 있어?
리리샤는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굳어서 제자리에 멈춰섰다.
마리가 그녀를 보고 외쳤다.
"마마! 도와주세요! 서둘러요. 비마마가 놓칠 것 같아요."
리리샤는 당황해서 서둘러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나디아그라는 염소 목을 잡고 있었는데, 음, 그렇게 잡으면 안 된다. 염소가 머리를 조금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쉽게 놓쳐 버리고 말 거다. 염소라는 건 엄청나게 힘이 좋은 동물이다.
리리샤가 합세하자, 마리는 재빨리 염소의 젖을 짜기 시작했다.
"하아, 정말 이 녀석은 젖 짜는 걸 싫어해요. 사람을 물거나 차는 건 아닌데, 나름대로는 순하고 애교도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애를 먹이는지 몰라."
염소 젖이 필요하면 시종에게 말하면 된다. 그러면 얼마든지 갖다줄 거다.
그게 아니라도 염소 한 마리를 더 내놓으라고 하면 얼마든지 줄 거야. 열 마리도, 백 마리도, 심지어 이 저택 안을 몽땅 염소로 채워달라고 해도 해줄 거다.
말 한 마디만 하면 그렇게 온몸으로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지 않아도 될 텐데.
하지만 그러지 않는 게 마리 답다. 어디까지나 있는 한도에서 최대한 짜내는 거지. 그래야 마리다.
"마리는 여전히 짠내가 나."
리리샤의 말에 마리가 살짝 눈을 흘겼다.
"저도 써야 할 때는 써요. 오늘은 모처럼 황제 폐하가 돌아온다고 닭도 잡았는 걸요."
"...."
"리리샤님은 먹을 복이 있어요. 나디아 마마랑 둘이서 먹을 예정이었는데."
마리가 하하 웃으며 염소젖에서 손을 뗐다. 하얀 우유가 손에 묻어 있다. 그걸 툭툭 양동이에 털어 넣고 마리가 일어서자, 나디아그라 마마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마리, 손이 움직이지 않아."
"마마, 너무 힘을 주셨나 봐요. 내일은 근육통이네요."
두 사람의 교환을 가만히 듣고 있으니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나왔다. 리리샤보다 사이가 좋아진 것 같다.
나의 마리였는데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갑자기 그런 걸까.
나디아그라 마마가 리리샤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황후, 왜 우는 겁니까? 자, 이리 와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나디아 마마가 리리샤를 가만히 안더니 등을 토닥였다.
드디어 비마마가 미쳐버렸나. 아니, 원래 좀 이상했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리리샤는 통나무처럼 굳어진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나디아그라 마마가 곰곰이 리리샤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그래, 내일이 황제가 오는 날이라 그렇군요."
혼자서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나디아 마마가 마리를 보았다.
"마리, 차를 좀 끓여주겠어?"
"예, 마마."
마리가 빙긋 웃었다.
세 명은 나란히 저택으로 들어갔다.
예전에는 마리와 비마마에게 신분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친구 같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면서 저택 뒤에서 재배한 찻잎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디아 마마도 요즘은 함께 밭을 가꾸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비마마의 손이 약간 거칠어진 것 같다.
얼마 전에 머리장식을 전하러 왔을 때 나디아 마마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어쩌면 그때도 둘이 함께 정원에서 일하다 피곤한 탓에 잠이 들었던 걸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마리와 이야기를 나누던 나디아 마마가 생각난 듯이 리리샤를 보았다.
"그렇지, 황후 얘기를 하려고 했지. 황후, 괜찮아요. 무서워할 것 없어."
"비마마는 황후 마마가 왜 무서워한다고 생각하세요?"
마리가 이상하다는 듯이 묻자, 나디아 마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일이 첫날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
"...."
마리와 리리샤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자, 나디아 마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도 이 나라에 처음 왔을 때 정말 두려웠어. 상황제 폐하와 처음 함께 밤을 지내는 날에는 너무 무섭고 긴장해서 살아있는 기분이 아니었지."
나디아 마마가 어깨를 약간 움츠리고 웃었다.
"뭐, 지금은 다 예전 일이지만. 괜찮아요, 황후. 첫날밤이라는 건 모든 여자에게 두렵고 힘든 일이야. 황후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황제께서는 부드러운 편이시니 분명 무섭지 않아요."
그런 걸까?
'나, 그게 무서운 거였나.'
아니, 조금 다른 것 같다. 뭔가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게 뭔지 모르겠어. 리리샤는 조용히 찻잔을 입에 댔다. 머릿속이 엉망이다.
이번에는 마리가 입을 열었다.
"글쎄, 비마마 말씀도 맞지만, 제 생각은 말이죠. 황후 마마가 무서워하고 있는 게 맞다면 아마 이제야 겨우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어머, 그런가?
"응, 응, 그렇죠. 지금까지 리리샤님은 병아리가 어미 닭을 쫓아다니는 것처럼 폐하 뒤를 따라다니셨잖아요. 한데 몇 년 떨어져 있으면서,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내가 정말 그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나, 사랑받는가, 날 미워하면 어쩌지, 오랜만에 만난 내 모습을 보고 폐하가 실망하면 어쩌나, 그런 걱정을 하는 게 아닐까요? 이제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니까 조금 성숙해진 탓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거죠."
"거기에 첫날밤까지 내일이고,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래요. 솔직한 말로 리리샤 님은 여자로서 뭐랄까, 조금 모자라죠. 여자라기보다는 애 같잖아요. 당연히 스스로 사랑받고 있는지 불안해지지 않겠어요?"
"하긴, 황후는 조금, 성적 매력이 없지요."
리리샤를 앞에 두고 두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칭찬 일색인데 두 사람의 평가는 가혹하기 그지없다.
리리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자. 여기에 있으면 자신감이 완전히 떨어져 바닥을 기게 될 것 같다.
고개를 숙이고 터벅터벅 저택을 나서는데, 마리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마, 괜찮아요. 성적 매력 따위 없어도 마마는 충분히 폐하께 사랑받고 있으니까요."
위로가 되지 않는다.
황후궁으로 돌아가자, 타이라가 안심한 듯 숨을 쉬면서 말했다.
"다행이에요. 표정이 돌아왔네요, 마마. 폐하가 돌아오셨는데도 계속 그 얼굴이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어라, 그래? 다시 표정이 생겼어?
그러고 보니 가슴이 답답하던 것이 조금 사라진 것 같다. 그 대신 자신감이 많이 떨어졌지만.
'드디어 내일.'
루디가 돌아온다.
심장이 이제야 실감했는지 뛰쳐나올 듯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