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75화 (175/201)

#175 상자 속에 들어있는 것

그레데는 전쟁을 치를 수 없다. 이전에 와토린구를 침공할 당시 상당수의 병사가 죽어, 현재는 국경을 수비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했다.

이 상태에서 누군가 쳐들어오면, 그게 제국이 아니라도 져버리고 말 것이다. 아무도 침략하지 않는 건 제국이 그들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매가 노리는 먹이에 손대는 비둘기는 없는 법이다.

그레데 왕은 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사신이 거기에 맞고 쓰러졌다. 하지만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바닥에 엎어진 사신이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다가 왕이 지쳐 손을 멈추자 말을 이었다.

"폐하, 제국은 우리를 그냥 용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그, 책임자를."

"이 몹쓸 놈!"

그레데 왕은 근처에 있는 호위의 검을 빼냈다. 칼집에서 쑥 빠진 검이 빛을 받아 번쩍인다. 호위가 뭔가 말하려는 듯하다 입을 다물었다.

사신은 지난 전쟁의 책임자를 처단하지 않으면 제국에서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제국의 황제가 가장 아끼는 총신이 자신에게 그렇게 귀띔했다는 것이다.

그레데 왕은 칼을 높이 들어 사신에게 내리쳤다.

집무실 안에 피가 튀었다.

와토린구 침략 당시의 책임자는 국왕이다.

대신 책임을 물을 만한 인물은 총대장이었던 왕세자인데, 그는 이미 죽어버렸다. 제국의 황제가 직접 칼을 내렸다고 들었다.

현재 그레데에는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죽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신의 말은 한 마디로 국왕 네가 죽어라, 는 뜻이었다.

"무엄한 놈! 감히 내게 그런 말을."

왕은 이미 숨이 끊어진 사신의 몸을 향해 여러 번 다시 칼을 내리쳤다. 그가 마침내 칼을 멈춘 것은 지쳐서 더 이상 팔을 들어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신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난도질당한 상태였다.

그레데 왕은 숨을 헐떡이면서 검으로 바닥을 짚었다.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해야 제국의 황제를 달랠 수 있나. 그의 분노를 무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반드시 자신에게 죽으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제국의 체면을 세워주면 된다.

국왕은 한참 동안 사신의 시체를 노려보다 중얼거렸다.

'그래, 중요한 것은 제국의 체면이다.'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뿐이다.

그레데 왕은 시종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왕비 소생의 왕자를 모아라. 서둘러라. 시간이 없다."

***

제국군은 마침내 카니아 영토의 끝에 다다랐다. 그레데 왕국과 접해있는 지역이다. 이곳은 여러 해 전에 그레데에서 침략한 곳과는 매우 떨어져 있었다.

그때의 국경은 산맥을 타고 자연스럽게 경계가 갈리는 곳이 많지만, 이곳은 너른 평야와 황무지가 대부분이다. 국경을 가르는 것은 강과 거기에서 흘러나와 흐르는 냇물이었다.

제국군은 강이 없는 지역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레데와의 국경 중에서 가장 큰 관문이 있는 곳이다.

국경을 하루 앞둔 날, 진군중인 제국군에게 다시 그레데의 사신이 찾아왔다.

그레데 사신이 이번에 가져온 것은 왕의 서신과 금으로 세공된 상자 여러 개였다.

레빈이 먼저 사신을 만났는데, 황제를 뵙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찢고 자결해야 한다며 다리에 매달렸다고 한다.

레빈이 한숨을 쉬면서 루디에게 말했다.

"제 직감이 말이죠, 그 상자에는 변변한 게 들어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정말, 모처럼 충고까지 했었는데 헛수고였어요."

"뭐라고 했었는데?"

레빈이 머리를 긁적였다.

"지난번 사신이 물러갈 때, 살짝 말했거든요. 전쟁의 책임자 목을 베는 정도가 아니면 사과는 되지 않는다구요."

"...."

루디는 눈을 감았다.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사신 맞이의 천막을 쳐라. 이번에는 공식적으로 사신을 맞이하는 형태로 하겠다."

"알겠습니다."

레빈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레빈의 말이 타박타박 말발굽 소리를 내며 멀어진 뒤, 루디는 한동안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레데 왕국의 사절단은 책임자 한 명과 열 명의 사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은 천막이 서자, 사신들은 그 안으로 금세공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루디는 천막 안 의자에 앉아서 그들을 맞았다.

그레데 사절단의 책임자가 공손한 태도로 절을 하고 서신을 레빈에게 건넸다. 레빈이 다시 루디에게 준다.

루디는 편지를 펼쳐 조용히 눈으로 훑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죄송하다는 내용을 여러 가지의 말로 바꿔 늘어놓은 것이다.

루디가 편지를 다 읽자, 사절단 책임자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그레데의 왕은 제국의 황제께 진심으로 사죄를 드리옵니다. 이것이 그 증거입니다."

다섯 개의 상자가 조용히 열렸다.

소금을 가득 채운 상자 안에는 다섯 개의 머리가 들어있었다. 이전에 보았던 왕세자 나이 만큼 되어 보이는 성인부터, 이제 열몇 살 정도로 추정되는 소년까지 다양하다.

사절단 책임자가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데 왕국의 정통한 피를 이은 왕자들이옵니다. 이들 외에, 국왕과 왕비의 피를 잇고 있는 왕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희 국왕의 진심을 알아주십시오."

"....'

루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힐끔 레빈을 보았다. 레빈이 알아차리고 조용히 검을 건넸다. 루디는 검을 들고 사절단 책임자 앞으로 다가갔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자 역시 알고 있겠지.'

책임자의 몸이 덜덜 떨렸다.

"이것이 내가 보내는 답변이다. 너희들의 왕에게 그대로 전하라."

검이 허공을 가르고, 사절단 책임자의 머리가 떨어졌다. 겁을 먹은 열 명의 사신이 몸을 납작하게 엎드렸다.

루디는 그들을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대로 천막을 나온 루디가 보좌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영주들을 모아라."

떨어져 진군하고 있는 영주군들에게 전령이 달려갔다.

말을 달리는 전령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한쪽에서는 급히 작전회의를 위한 천막이 설치되었다.

시종 보좌관들이 책상을 천막 안에 놓고, 그레데 왕국의 지도와 각 영주군을 상징하는 작은 조각들을 책상 한쪽에 두었다.

보좌관 한 명은 회의 결과를 기록할 종이를 준비했다.

영주들이 모두 모이자, 루디는 천막 안을 휘둘러보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은 그대들의 충성에 내리는 보상이다. 왕도를 제외한 나머지 도시는 그대들에게 먼저 입성할 권리를 주지. 각자의 전공에 따라 지역을 정할 테니 우선 자신이 원하는 곳을 정해라."

영주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카니아 전쟁에서도 약탈은 허용되었지만, 한도가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며칠의 말미를 준 뒤 점령한 뒤에는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점령 뒤에 다스리는 관리도 영주 측은 아니었다.

그런 만큼 영주들도, 그들이 데리고 있는 병사들의 욕망도 억눌러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제한이 없다. 마음껏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는 허락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중에 그대들이 다스릴 땅이다. 통치가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는 하지 마라."

루디는 영주들의 얼굴에 반색이 떠오른 것을 보고 황제의 미소를 띠었다.

만들어낸 가면의 웃음이지만 시종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런 얼굴이 자연스럽게 나올 만큼의 시간 동안, 루디는 죄를 쌓아올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의 군주는 모두 죄를 짓고 산다. 한 명도 빠짐없이 죄인이다. 그것이 죄라는 사실을 아는 만큼,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게 가장 클 것이다.

"성 공략은 걱정하지 마라. 모두에게 마도병을 딸려줄 테니."

그 말이 떨어지자 영주들의 토론이 활발하게 시작되었다.

성 공격의 부담에서 벗어나면 굳이 공략하기 어려운 지역을 피할 필요가 없다. 조건만 가지고 선택할 수 있다.

영주들은 각자 자신의 전공이 더 뛰어나다며 더 좋은 도시를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모습을 보면서, 루디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최대한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잔인한 길이라 해도 그 나라 백성이 현재의 왕 밑에 오래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영주들이 각자 원하는 지역이 대강 정해지자, 보좌관이 조용히 루디의 귓가에 이 영주의 전공이 더 크다든가, 저 영주는 지난번에 무슨 명령을 위반한 일이 있다고 알렸다.

병사 수가 적은 영주군의 경우에는 보좌관이 과거와 현재의 관계를 살펴 잘 맞는 영주끼리 짝을 지워 놓은 쪽지를 보였다.

루디는 그 쪽지를 참고하여 영주끼리 연합하게 하거나 이웃한 도시를 공격하게끔 했다. 과욕을 부리다 이쪽이 전멸하면, 그것처럼 바보 같은 일도 없다.

이런저런 조정이 끝난 뒤, 기록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보좌관이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각 영주가 들어가기로 한 도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루디가 거기에 사인을 하자, 보좌관이 각 영주들에게 다시 서명을 받았다.

그날 밤은 모두가 바빴다.

영주군은 서둘러 각자가 맡은 지역을 향해 떠날 준비를 했다.

제국의 본대도 마찬가지다.

보좌관을 통해 각 부대의 대장들에게 황제가 전쟁을 빨리 끝내기를 원한다는 말이 내려가고, 그 말은 다시 병사들에게 전해졌다.

다음 날 동이 트기도 전에, 병사들은 다른 때보다 이른 시간부터 떠날 준비를 마쳤다. 출발도 평상시보다 일렀다. 진군할 때마다 부르는 병사들의 노랫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말은 주변의 기미에 민감하다.

루디의 흑마는 주변 사람들의 흥분을 감지했는지 종종 푸드득거리며 발로 땅을 긁었다.

***

왕자들의 머리를 들려 보낸 사절단이 도착하기도 전에, 그레데 왕국의 모든 사람이 제국의 답변을 알았다.

바닷물이 밀려오는 것처럼 차근차근 진군해오는 제국군의 모습을 보면 메시지는 명확했다.

멸망 외에는 길이 없다.

그레데 왕은 시종장을 불러 피난을 위한 준비를 하게 했다.

왕궁 전체가 소란스러워졌다.

동원할 수 있는 만큼의 마차를 모두 끌어모으고 왕궁 보고에 있는 물건 중에서 옮길 수 없는 것은 지하 깊숙한 곳의 감옥으로 옮겼다.

시간이 없어서 모두 옮길 수는 없다. 가능한 것만큼만 옮긴 뒤, 왕은 제국군이 발견하지 못하도록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에 돌과 모래를 붓게 했다.

왕은 쉴 새 없이 지시를 내렸다.

중요한 물건과 보물들을 모두 싸라, 보석과, 그래, 모피도 잊지 마, 그건 몇 대를 거쳐 내려오는 귀한 물건이다.

그렇게 지시를 내리는 가운데, 시종장이 주저하며 왕에게 물었다.

"폐하, 왕비 마마는 어찌하시렵니까."

바보 같은 질문이다.

왕비는 후궁 한곳에 가둔 상태였다. 왕자들을 모두 죽인 날부터 미쳐버렸다.

"그대로 두어라. 장미궁에 있는 비만 데리고 간다."

"...."

시종장이 조용히 허리를 굽혔다.

장미궁에 있는 비는 올해 스물한 살이 되었다. 국내 고위 귀족의 딸로 매우 사랑스러운 여성이었다.

왕비만큼은 아니지만, 그녀의 혈통도 괜찮다. 그녀라면 아직 젊고 아름다우니 충분히 많은 왕자를 낳아줄 것이다.

정통이니 아니니,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왕비는 미쳐버렸으니 폐위하고 그녀를 다음 왕비로 삼으면 된다.

'잠시 피난을 가서 힘을 모으면 돼."

황제가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물지는 않는다. 결국에는 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를 노리면 충분히 나라를 되찾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 피난에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옥새를 모두 관리하는 옥새상서는 물론, 측근 관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모두 함께 하기로 되어 있었다. 정부 자체가 이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있고 주요 관리들이 모두 함께 하는 거야. 괜찮아. 다시 왕국을 탈환할 수 있다.'

며칠에 걸쳐서, 급하게 꾸린 짐이 마차에 가득 올라갔다. 이제 거의 다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제국의 황제는 성큼성큼 왕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둘러야 한다.

초조한 가운데 시종장이 들어와 허리를 굽혔다.

"폐하, 오늘은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시간 정도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래, 알았으니 서둘러라."

그레데 왕은 크게 숨을 쉬었다. 이제야 겨우 마음이 놓였다. 앞으로 며칠만 있으면 제국의 황제가 도착할 것이다.

'늦지 않아 다행이군.'

안심하니 몸에서 힘이 빠졌다.

방 밖이 소란스럽다. 막바지 준비 때문인 모양이다.

의자에 몸을 늘어뜨리고 앉아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장인가 싶었다.

왕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시종장, 무슨 일, 응? 근위 대장 아닌가."

방으로 들어온 것은 근위 대장이었다. 한데 표정이 이상하다. 침중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검에 피가 묻어 있다.

근위 대장 뒤로 항상 왕의 곁을 지키는 근위병 몇 명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피 묻은 칼을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왕은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답을 듣기 전에 몸을 돌린다.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용서하십시오, 폐하.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이 나라에 미래는 없습니다. 지금도 이미 늦었지만, 최소한 어린 공주님의 목숨이라도 살리기 위해서는."

근위 대장의 말과 동시에 등의 한가운데가 화끈해졌다.

"커헉!'

왕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상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코로 공기를 흡입은 하는데 제대로 들어가 담기지 않는 느낌이다. 마치 구멍 난 통에 공기를 넣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반역...자...."

왕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다시 검이 몸을 찔렀다.

"진즉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근위 대장의 목소리가 멀리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신발이 대리석을 밟는 소리, 융단 위에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까지 들린다.

사람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는데 그보다 작은 소리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우리를 원망하는 걸까요? 눈을 뜨고 죽었네요."

"...."

"대장, 왕의 목을 자를까요?"

"그래. 소금 상자는 가져왔는가?"

"예."

근위병들의 대화가 흔들리는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들렸다. 그가 죽은 줄 아는 모양이다.

이놈들, 나는 아직 살아있다. 이 무엄한 놈들, 반역자 놈들!

왕은 그렇게 소리치려고 했지만 눈도, 입도,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제국의 황제가 왕도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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