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74화 (174/201)

#174 악어의 눈물

며칠 전 새해가 되었다.

리리샤에게서 온 새해 선물은 안쪽에 자수가 놓인 망토였다.

리리샤가 직접 자수를 한 모양인데, 옆에서 그걸 본 레빈과 보좌관들이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뭐, 황후가 손수 놓은 자수를 보고 큰 소리로 웃을 수는 없었겠지.

리리샤가 수놓은 동물은, 분명히 봉황의 모습일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닭처럼 보였다. 자세히 보면 핏자국도 군데군데 있었다.

다른 것들은 성인이 되면서 능숙해졌지만, 끝끝내 자수만은 안 되는 모양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형편없다.

"너무 웃지 마라. 이것도 아마 몇 년에 걸쳐서 완성했을 테니."

루디의 말에 레빈이 웃음 때문에 숨 막히는 듯 약간 꺽꺽거리면서 말했다.

"타이라한테 들었습니다만, 15살이 되던 해부터 놓은 거랍니다. 폐하께 황후 마마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한 건지 꼭 좀 말씀드려달라는 부탁을 들었어요. 그야말로 잠도 안 자고 열심히 노력해서 완성했답니다."

"...."

새해가 되면서 리리샤는 19살이 되었다. 설마 15살부터 지금까지 자수 솜씨는 하나도 늘지 않은 건가. 그 잠만보 리리샤가 잠도 안 자면서 노력했는데?

루디는 망토의 자수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리리샤도 알고 있는 거야. 자신의 수놓는 솜씨가 형편없다는 거. 입고 움직일 때 절대로 보이지 않는 곳에 자수가 있잖아."

"폐하의 이해심이 그야말로 바다처럼 넓습니다."

레빈이 그렇게 말하더니 끝내 배를 잡고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선물은 정성이다. 그런 말도 모르나."

너무 웃는 것 같아 한 마디 하자, 다른 보좌관들이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도 결국엔 웃는 거냐.

루디가 리리샤에게 보낸 올해 선물은 사랑한다는 말이 담긴 편지였다.

루디 본인이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리리샤가 그 말을 콕 집어 원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 말을 원한다고 간절하게 부탁하는 리리샤의 편지를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원래 선물이란 상대방이 원하는 걸 주는 게 베스트다.

편지에는 머리장식을 네 개 동봉했다.

두 개는 색상만 다른 것으로 리리샤에게, 다른 두 개는 나디아그라 비와 마리의 몫이었다.

한 나라의 황후에게 줄 만큼 비싼 것은 아니다. 카니아의 가게에서 발견한 것으로, 평민이 손에 넣기에는 너무 비싸지만 부유한 상인이라면 구입할 만한 정도의 물건이었다.

다만, 나디아그라 비의 출신 나라에서 생산된 장식품이었다. 리리샤의 손으로 비마마에게 그걸 건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타이라에게도 한 개 주고 싶었지만, 일개 시녀에게 황제가 선물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다. 괜한 의혹을 사면 곤란하다.

대신 레빈이 재빨리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한 개 구입한 것 같다.

새해를 낯선 나라에서 보내는 병사들에게는 모처럼 괜찮은 음식이 며칠 동안 지급되었다.

이제 카니아 왕국의 영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해에는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병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종종 루디의 귀에 들렸다. 너무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었다. 너도 나도, 모두가 이제는 돌아가고 싶다.

새해를 맞아 며칠간 한 도시에 머무는 동안,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일이 되어가는 형편을 지켜보던 다른 나라의 사신들이다.

특히 카니아 주변의 작은 나라에서 보낸 사절이 많았다. 이쪽은 주로 카니아 침략 와중에 자신들의 나라도 같이 당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서신과 함께 뇌물성격의 물건을 들고 오는 경우가 많다.

"폐하, 이번에는 카니아 북쪽에 있는 나라예요. 좀 드무네요. 이 나라는 생선을 가지고 왔습니다."

생선이라니, 정말 드물다.

레빈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역시, 폐하는 생선을 좋아하시는군요. 다른 물건이 왔을 때와 눈빛이 틀리십니다."

"좋잖아. 맛있고."

"그렇습니까?"

레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레빈은 고기파다. 생선의 삼삼함을, 아니, 이 세계에서는 꼭 생선이 삼삼하다고 말할 수는 없구나. 제국의 요리법은 굽기보다는 찌거나 삶는 쪽이라서 지구와는 미묘하게 다르다. 굽더라도 대부분 소스가 끼얹어 나왔다. 그래도 좋아. 생선은 좋은 것이다.

"생선 외에 뭔가 기묘한 것도 함께 왔어요. 딱딱하고 뭐랄까, 나무껍질 같은 느낌인데 잘 모르겠습니다. 사신은 먹는 거라고 하지만 보기에는 먹고 죽을 것 같은 느낌이에요."

레빈이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말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다.

"바다에서 나오는 풀이라고 합니다. 물에 넣고 끓이는 거라고 하더군요."

어라, 그거 미역이나 다시마 같은 거 아니냐.

루디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거 잘 받아 놔. 아니, 내가 직접 가서 보자."

"폐하는 역시 이상한 거에 관심을 두시는군요."

뭔가 감탄하는 듯한 표정으로 레빈이 말했다.

"오늘 저녁 만찬을 준비해두었습니다. 지금까지 온 사신들을 모두 모았어요."

"그래, 너무 불안해하지 않도록 미리 잘 설명해 둬."

"물론입니다. 다들 제국이 자신들 나라를 집어삼킬까 싶어 걱정이 태산인 것 같아요."

레빈의 말에 루디가 쓰게 웃었다.

이렇게 각 나라에서 보내오는 물건을 돌려보내지 않고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안심을 주려는 것이다. 너희들의 나라를 침략하려는 게 아니니 걱정 말라는 표시였다.

지난번 그레데 왕국의 사신을 눈길 속에 그대로 쫓아버리고 점점 그 나라로 진군하는 모습에, 카니아 주변 국가들은 모두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뭐, 카니아도 나라가 소란한 틈을 타 슬그머니 집어삼킨 형태다. 주변 소국이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제국에서 온 보급 부대 대장의 보고를 듣고 있는데, 보좌관 한 명이 루디를 찾아왔다.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영주관의 집무실은 황궁에 비해 작다. 복작복작한 사람들을 헤치고 보좌관이 안쪽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폐하, 그레데 왕국에서 사자가 왔습니다."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번에는 좀 괜찮은 결과물을 가져왔던가?"

"폐하의 뜻에 맞는 결과는 아닐 것 같습니다만, 이번에는 직접 보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보좌관의 이마에 약하게 주름이 서 있다. 루디는 조용히 일어났다.

"사신은 어디에 있느냐."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자."

보좌관의 뒤를 따라 영주관 건물을 빠져나가자, 정문 앞에 마차가 몇 대 서 있었다.

루디는 멈칫하며 눈을 약간 크게 떴다.

마차 앞에는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 외투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저녁 연회에나 입을 법한 옷만 덜렁 입고 있었다. 어깨와 팔을 드러내는 차림이다.

아이 왼쪽에는 사신으로 보이는 남자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으로 떨고 서 있었다.

"이건 무엇이냐."

루디가 물었지만 목소리가 너무 차가웠던 모양이다. 그레데의 사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허리를 숙였다.

여자아이가 부들부들 떨면서 절을 했다.

"저,저,저,는,그레,데,왕,국의,열여덟 번째, 공주."

몸 전체가 부들부들 떨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런 엄동설한에 미친놈들 아닌가. 아이한테 무슨 짓을 시키고 있는 거야. 루디의 눈썹이 점점 치켜올라갔다.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레빈이 아동용으로 보이는 외투를 그레데 공주의 어깨에 걸쳤다. 아마 사신의 방문을 알린 보좌관이 미리 아이용 외투를 찾으라고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려놓았던 모양이다.

보좌관이 사시나무처럼 떨고만 있는 사신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그레데의 국왕이 열여덟 번째 공주를 인질로 보내겠다고 합니다. 특별히 황금색의 머리와 청록 눈동자의 공주를 고른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확실히 공주는 비슷한 용모다. 아마도 리리샤와.

루디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되었다.

루디가 황제가 된 것은 리리샤가 9살 무렵이다. 아마 그레데 국왕은 그 이야기를 알고 비슷한 나이, 비슷한 용모라고 추정되는 공주를 인질로 보낸 것 같다.

어린 공주는 애처로울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아이를 안으로 데려가라는 말이 나올 것 같아, 루디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에서 어린 공주를 받으면 그레데를 용서한다는 뜻이 되어버린다.

루디는 아이에게서 눈을 돌리고 사신을 노려보았다.

"당장 내쫓아라. 저놈을 내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버려."

몸을 돌리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 힐끗 어린 공주를 보았다. 공주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큰 벌을 받게 되는 걸까.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더한 일을 하게 된다.'

그레데 왕국에 자비는 없다. 왕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인다. 저렇게 어린 여자아이도 예외는 없었다. 한 살 어린아이도 모두 죽이게 될 것이다.

그린 일을 방지할 수 있을까 싶어 지난번 사자를 눈 속에 내쫓은 것인데, 그레데 왕국에서는 누구 하나 눈치 채주지 않는 모양이다.

바닥에 엎드려 우는 소리를 하는 그레데 사신을 병사들이 질질 끌고 나간다. 어린 공주가 소리 죽여 우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항상 루디의 곁에 있는 레빈이 슬그머니 자리를 비웠다.

***

침몰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레데 왕국은 처음 서쪽마녀를 고용해서 제국을 침략할 때부터 뭔가 조짐이 있었다.

레빈은 루디의 눈동자가 분노와 죄책감에 물드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보좌관에게 눈짓했다.

보좌관이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허락이 떨어졌다.

레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번 전쟁에서 루디의 곁에 있는 시종 보좌관들은 모두 레빈의 스승이면서 상관이다.

제국 내부의 일이라면 레빈에게도 어느 정도 자율권이 있지만, 타국 공주의 일이라면 그들의 허락과 지원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금 당장은 레빈 혼자서 일을 처리하더라도 후속 조치는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자신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역시나라고 할까, 이심전심이라고 할까, 황제가 분노하는 모습을 본 시종들의 마음은 레빈과 같았던 모양이다. 담백하게 동의를 얻었다.

공주를 태운 마차가 영주관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레빈은 병사 중에 섞여 있는 첩자들을 몇 명 불러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일반 병사들 속에도 첩자가 섞여 있다. 그들의 임무는 전쟁 중 황제의 근처에 적이 접근하기 전 제거하거나 지금처럼 은밀히 할 일이 생길 때 시종을 돕는 것이다. 뭐, 웬만해서는 그들이 뭔가 할 필요는 없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바로 지금처럼.

레빈과 첩자들은 그레데 왕국의 사절단을 몰래 쫓았다. 사절단이 어느 정도 외진 곳으로 가자,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옷을 갈아입고 검은 복면을 뒤집어썼다.

***

가끔 거미줄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마치 공간 자체가 미세한 거미줄로 짜여져 있는 것 같다. 조금만 어긋나도 심하게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가만있을 수 없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말로는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 그저 고통스럽다고 밖에는.

루디는 그런 마음을 숨기면서 밀려있는 일을 처리하고 지시를 내렸다.

보좌관들이 신경을 써주었지만 이 답답한 기분만은 자신 스스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 점점 숨을 쉴 수 없다. 심장이 조금씩 오그라들어 작아지는 것 같았다.

레빈이 돌아온 것은 사신들과의 만찬이 시작되기 한두 시간쯤 전이었다.

다른 보좌관이 준비해놓은 옷을 레빈이 재빠르게 입혔다. 머리에 약간의 향유를 발라 윤기있게 만든 뒤 빗으로 빗는다.

방 안은 조용했다. 항상 몇 명은 바로 근처에 머무는데 왜인지 아무도 없었다.

등뒤에서 머리를 한데 모아 묶던 레빈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들어온 보고인데, 그레데 왕국의 사절단이 정체모를 괴한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얼굴에 복면을 뒤집어쓴 사람들이었다더군요. 사절단이 가지고 있던 보석과 물건들을 모두 강탈 당했답니다. 사신과 몇명의 병사만 겨우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

"게다가 이상한 일이지만 공주도 데려갔다고 하더군요. 어딘가에 팔아넘길 작정이었을까요?"

레빈이 빗을 든 채 루디의 앞으로 와 모습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한 거긴 하지만, 정말 훌륭합니다. 아주 멋지세요. 머리 한 올 한 올이 모두 살아움직이는 예술작품처럼 되었습니다."

제가 한 거긴 하지만...살아....

루디가 레빈을 보자, 싱긋 웃는다. 레빈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어린 공주님은 어딘가 먼 땅에서 잘 살게 되면 좋겠어요. 신분 따위 없어도 소박하게 살면 그게 행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루디는 눈을 감았다.

그 어린 여자아이는 살아있구나. 앞으로도 분명히 살아나가겠구나.

그대로 본국으로 돌아갔다면 결국엔 죽었을 것이다. 루디 자신이 그렇게 만들게 된다. 리리샤를 닮은 어린아이를 자신의 손으로 찌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라를 벗어나 신분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달아났다면, 그 아이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는 어른이 된다.

"...."

자기만족일 뿐이다. 이런 게 바로 악어의 눈물이라는 것이리라. 그 여자아이가 살았다 해도 왕족의 다른 아이들은 모두 죽는다.

하지만 레빈의 말에 겨우 조금 숨을 쉴 수 있었다. 리리샤를 닮은 눈동자가 죽음의 순간 루디를 볼 일은 없다.

'아...!'

루디는 자신이 왜 그렇게 끔찍해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그레데 국왕의 판단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 아이를 죽이게 되었다면, 아마 반드시 그 순간 리리샤가 떠오른다. 그렇게 되면 루디는 평생 그 아이의 눈동자를 잊지 못했을 것이다.

레빈이 루디의 옷을 마저 입히고 한발 물러섰다.

루디는 황제의 얼굴을 쓰고 허리를 곧게 폈다.

방을 나가기 직전, 지나가는 것처럼 조용히 말했다.

"고맙다, 레빈."

"...."

레빈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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