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판다 얼굴 리리샤
"축하 행사가 끝나면 이틀 후에는 폐하와 마마의 황도 퍼레이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날은 정오 무렵부터 출발하니...마마, 듣고 계십니까?"
남작 부인의 말이 한 귀로 들어갔다가 다른 귀로 빠져나갔다.
"마마, 이 퍼레이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마가 처음으로 백성들 앞에 나서는 행사예요. 알고 계십니까?"
남작 부인의 목소리는 분명히 들린다. 가까이에 있으니까.
하지만 머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소리는 들리는데 의미를 모르겠다. 리리샤의 모든 생각은 한 가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돌아온다.
루가 돌아온다.
드디어 이곳에 온다.
만날 수 있는 거야.
리리샤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루가 돌아와!"
시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마, 폐하께서 돌아오는 건 벌써 며칠 전부터 알고 있는 일이잖아요."
물론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막연하게 며칠 뒤에 오는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오늘 오는 거야. 만날 수 있어."
리리샤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남작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오늘 오시지요. 그래서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마마의 치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리리샤의 머리는 잔뜩 부풀어 얼굴보다 더 크게 자라 있었다.
시녀가 들고 있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자, 부스스한 것이 꼭 자다 일어난 마녀 할멈 같았다.
머리카락을 반대 방향으로 빗으며 한껏 부풀리던 시녀가 킥킥 웃었다.
"그렇게 기쁘세요?"
대답할 수 없을 만큼 기쁘다. 몸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만있을 수가 없다.
리리샤는 벌떡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르다, 타이라의 손을 잡고 춤추기 시작했다.
방 중앙으로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나간다. 빙글빙글 찻잔이 도는 것처럼 방 전체를 돌았다.
"타이라! 루가 돌아와. 오늘 오는 거야."
타이라가 함께 춤을 추면서 웃는다.
"마마. 어제까지는 계속 멍한 상태여서 조금 걱정했어요. 굉장히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이상했거든요. 하지만 그저 실감이 나지 않았던 거군요. 오늘은 평소와 똑같아서 정말 마음이 놓여요."
"후후후후후, 루가 돌아와."
빙글빙글 둘이 춤추는데, 남작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폐하가 오시는 시간에 못 맞추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폐하의 얼굴을 뵙는 시간이 그만큼 늦어지는 거예요. 알고 계신가요?"
어머, 그러면 안 되지.
리리샤는 타이라의 손을 놓고 빙글빙글 혼자 춤추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머리를 빗어주던 시녀와도 손을 잡고 한 바퀴 빙글 돈다. 빗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리리샤도 시녀도 신경 쓰지 않았다. 둘이 마주 보고 밝게 웃었다.
퐁, 퐁, 방안에 빛이 터졌다. 마생물도 하나 둘 나와 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기쁘다. 너무 기쁘다.
"마마!"
남작 부인의 매서운 시선을 받고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몸이 들썩거렸다.
시녀들이 키득거리며 계속해서 웃었다.
리리샤도 웃는다.
이렇게 기쁘다니, 평생의 행복을 모두 한꺼번에 써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남작부인이 손뼉을 쳐서 시녀들의 주의를 끌었다.
"자, 계속해요. 폐하가 오실 때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폐하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마마를 보는 날입니다. 마마를 어린아이 보듯 하는 폐하를 깜짝 놀라게 할 수 있는 건 내일이나 모레가 아니라 바로 오늘이에요. 중요한 날입니다."
시녀들이 자세를 바로했다.
남작 부인이 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최대한 아름답게 마마를 꾸미세요. 여러분이 그동안 배우고 닦은 모든 실력을 쏟아 붓도록 하세요."
그 뒤에는 계속해서 닦고 바르고 올리고 씌우는 일의 연속이었다.
잔뜩 부풀린 머리는 예쁘게 다듬어서, 보석이 알알이 달린 망사 천으로 잘 덮는다. 군데군데 머리장식을 찔러 고정시켰다.
고래뼈로 만든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고, 가슴과 겨드랑이 사이에는 천으로 만든 패드를 넣었다.
가슴을 더욱 볼륨 있게 보이기 위해서는 패드가 필수다. 현재 귀족 부인들 사이에서 대유행이었다. 다들 가슴골에 목숨을 걸었다.
더 깊숙한 골짜기를 얻기 위해서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겠다는 여자가 수두룩했다.
질 수는 없다. 당연히 리리샤도 성인의 매력을 풍기기 위해 모든 종류의 패드를 모았다. 시녀들의 협력이 매우 적극적이었다.
리리샤는 수집한 패드 중에서 잘 맞는 것은 자신이 쓰고, 나머지는 시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덕분에 황후궁에 있는 시녀들의 가슴은 황궁 최고라는 평판이다.
남작 부인이 너무 지나친 노출은 금지하고 있지만 다들 비치는 천을 달아 규제를 피했다.
시녀 중 몇 명은 귀공자의 열렬한 구애를 받는 중이라고 들었다. 남자의 집안 쪽에서 혼인에 대한 타진이 들어간 시녀도 있다. 가슴 만세!
"좋아요,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시녀들이 이쪽저쪽에서 살펴본 뒤 패드를 고정시켰다.
한 시녀가 코르셋 끈을 잡으며 말했다.
"자, 마마, 이제 숨을 들이마시세요. 한껏 들이마셔야 합니다."
"흐읍!"
리리샤가 숨을 마시는 틈을 놓치지 않고, 시녀들이 코르셋의 끈을 더욱 조였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허리를 꼭꼭 조인 다음, 그 위에 화려한 드레스를 올린다.
치마와 상의가 따로따로 올라간 뒤에는 몸통과 소매를 끈으로 연결했다.
매듭이 보이지 않도록 장식천이 여러 개 올라가고 다시 보석으로 여기저기 장식을 달아 고정하면 겨우 끝이 보였다.
"마마, 이제 눈을 감아주세요."
화장을 하던 시녀가 말한다.
리리샤가 눈을 감자, 보송보송 가벼운 가루가 눈꺼풀을 덮었다. 볼은 살짝 붉게 만들었다.
시녀가 거울을 들어 얼굴을 비췄다.
"마마, 다 되었습니다. 어떠세요?"
낯선 여자가 거울 속에서 리리샤를 보고 있다. 조금 어른이 된 것처럼 보였다.
"입술을 조금 붉게 해줘. 그거 있잖아. 유혹의 색."
시녀가 곤란한 듯, 약간 떨어져 있는 남작 부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작은 소리로 시녀가 속삭였다.
"그건 남작 부인이 금지했어요."
리리샤의 목소리도 덩달아 작아졌다.
"어째서?"
"마마의 얼굴에는 너무 나이 들어 보인대요."
"그걸 원하는 거잖아."
"그게...."
시녀가 머뭇거리자, 치마 밑단을 손질하던 시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재수가 없다고 하더라구요, 그 색이. 얼마 전에 그 색을 바른 귀족 부인 몇 명이 첩 때문에 낭패를 당한 일이 있대요. 은밀하게 소문이 났어요."
"...."
타이라가 새침한 표정으로 속삭였다.
"그래서 남작 부인이 몽땅 버렸어요. 굉장히 비싼 거였는데."
어깨가 약간 처졌다.
그건 정말 예쁜 색이었다. 평범한 얼굴도 그 색의 연지를 바르면 화사하게 피어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남작 부인이 약간 원망스러워졌다.
"그걸 바르면 루도 날 다시 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확 덮치고 싶어지는 거야. 불끈불끈 해지는 거지."
리리샤가 시녀들과 속삭이는데, 남작 부인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놀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폐하가 황궁에 도착하실 시간이에요. 마무리합시다."
그때부터는 순식간이었다. 마법가루를 든 요정처럼 시녀들이 우아하고 빠른 솜씨로 사사삭 준비를 끝마쳤다.
마지막으로 루디에게 선물 받은 목걸이와 귀걸이를 걸치고, 리리샤는 황후궁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본궁 앞에는 이미 귀족과 관리들이 나와 있었다.
궁 앞에서 멀리까지 붉은 융단이 길게 깔려 있다. 융단 주변에는 어제까지 없었던 꽃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약간 기다리자, 멀리에서 말을 탄 루디의 모습이 보였다. 병사들이 그 뒤를 따르고, 후미에는 마차가 한 대 있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루디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먼지를 뒤집어쓴 옷에 약간 피곤한 표정을 하고 있다.
'루.'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다. 미리 그렇게 듣고는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볼 때까지는 불안했다. 다행이다.
타박타박, 거대한 흑마가 융단을 밟으며 가까이 다가오고, 루디가 훌쩍 말에서 내렸다.
만나면 너무 기뻐서 당장에 달려갈 줄 알았다.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조차 꼼짝하지 않았다.
루디가 가까이 다가오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황후가 절을 하고 황제를 맞이할 시간이다. 하지만 안 돼.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루."
한 마디 그렇게 중얼거리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환상이 아니야. 진짜 루가 그녀 앞에 있다.
***
낯선 여자가 있다.
분명히 리리샤 같은데 화장 때문인지 인상이 달라져 보였다. 어제까지 CCTV에서 확인했던 모습과 달라 약간 낯설다.
말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가는데도 리리샤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아한 미소를 띤 채 가만히 서서 그를 쳐다보았다. 정말 다른 여자 같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던 리리샤의 눈에 물이 차오른 것은 순식간이었다. 갑자기 눈이 물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봇물 터진 것처럼 눈물이 쏟아진다.
예쁘게 화장한 얼굴이 금세 지저분해지기 시작했다. 눈 주위에 색이 번졌다. 붉은색과 검은색이 혼합되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황후, 그렇게 울면 눈이 붓습니다."
사람들 앞이다. 점잖게 말해봤지만, 그 말을 들은 리리샤의 반응은 엉뚱했다.
루, 하고 그를 부르더니 와락 달려와 머리를 박았다.
커다랗게 부풀려 보석을 장식한 머리가 가슴 아래에서 흔들렸다.
"루! 루!"
재치 있는 인사말 한 마디 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이름만 부른다.
아, 정말 리리샤를 만났구나.
이제야 겨우 진짜 리리샤를 만난 느낌이었다.
조금 안심했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서운할 것 같다. 이런 게 아빠 마음이라는 걸까.
루디는 리리샤의 등을 살짝 토닥이고 속삭였다.
"이제 돌아왔어, 리리샤."
턱에 손을 대고 살짝 올리자, 지저분하게 된 리리샤의 얼굴이 따라올라왔다.
눈이 판다 곰이 되어 있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시종장이 예쁘게 접힌 손수건을 내밀었다.
루디가 그걸로 눈 주위를 살짝 누르자, 뒤늦게 자신의 얼굴이 엉망이라는 걸 알아차린 리리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 너머로 웅얼웅얼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 보지 마요, 루. 예쁜 얼굴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망했어. 어쩌면 좋아."
몸을 비틀어 고개를 내리려는 리리샤를 품에 안아 고정하고,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괜찮아, 리리샤. 똥오줌도 갈아준 사이에 얼굴을 흐르는 구정물이 문제일까."
"으아아아아아."
괴상한 신음소리가 황후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황궁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생겨났다. 두 사람을 보고 있는 귀족들에게 시선을 주자, 경악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면에 싱글싱글 웃거나,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대부분 관리들이었다.
리리샤가 숨기고는 있지만 황궁 출입이 잦은 사람들은 이미 그녀의 본성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리리샤는 싫어하겠지만 뭐 당연한 건가.'
처음부터 루디는 리리샤의 성격을 감추려고는 하지 않았다.
사람의 본성이라는 건 사소한 계기로 드러난다. 솔직한 성품의 리리샤가 사람들 앞에 민낯을 내보이는 일은 언젠가 생기게 마련이다.
남작 부인과 시종장에게도 그렇게 말해 두었다. 리리샤는 그대로 자라도 상관없다고. 다만 다른 사람의 가식적인 면을 알아차리고 대처할 수 있는 방법 만은 가르치라고 명령했다.
리리샤는 정말 잘 자랐다. 이 정도면 황궁에 가득한 가면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솔직한 성품을 잃지 않은 것이 아마 리리샤의 대단한 점일 것이다.
남작 부인의 공이 컸다.
루디는 리리샤의 허리를 안아 사람들에게 지저분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사람들 제일 앞에는 전 황태자인 모로즈 공작이 서 있었다.
상황후는 이 자리에 없었다.
황후가 공식적으로 서는 곳에 상황후는 나오지 않는다. 황후가 받을 주목을 다른 여자가 받아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리리샤가 성인이 되었으니, 상황후는 서서히 공석적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고 뒷면에서만 활동하게 된다.
시선이 마주치자, 모로즈 공작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절을 했다.
이 자리에서 모로즈 공작은 황족을 제외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가장 신분이 높다. 그가 절을 하자, 다른 사람도 공경을 보이며 서둘러 몸을 낮추었다.
문득 시종장이 묻는 듯한 시선을 보였다. 마녀는 어떻게 할 건지 묻는 것 같다.
서쪽마녀는 이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마녀였다. 그녀를 제국에 속하게 만든 건 큰 화제거리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도 대부분 그 일이 가장 궁금할 것이다.
그녀를 이 자리에서 선보이면 황제의 위엄을 보이는 데는 가장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리리샤의 빛이 희미해진다. 모든 관심을 마녀가 가져가버리고 말 것이다.
루디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시종장이 알았다는 듯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 타이라와 시녀 한 명이 다가와 루디 품에 안겨 있는 리리샤의 얼굴을 요령껏 닦았다.
여전히 울다 웃다를 번갈아가며 하는 리리샤에게 타이라와 시녀가 작은 소리로 나무라듯 말했다.
"마마! 제발 울지 마세요. 얼굴 전체가 까맣고 빨개요."
"맙소사! 몇 시간 동안 노력한 얼굴이, 어쩌면 좋아요. 지금의 마마는 꼭 화장한 괴물 같아졌어요."
그 말에 리리샤가 또 운다.
흠, 어쩌지. 이 자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