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142화 (142/201)

#142 루, 보고 싶어

그 남자를 처음 봤을때는 난민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염탐꾼으로 일하는 자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루디는 호위병이 내민 염탐꾼의 봉투를 보았다.

특색없는 민무늬 밀랍이 굳어진 봉투의 뒷면에 "늙은이의 속임수와 북소리"라고 적혀 있었다.

와토린구에서의 마지막 훈련 때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 늙은 병사들이 어린 마도병과 루디를 속임수로 속이고 신나게 승리의 북을 울렸었다.

"와토린구 상황은 어때?"

루디가 묻자, 염탐꾼이 마른 탓에 퀭해진 눈을 껌벅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피해 입은 마을은 없는 걸로 보입니다. 비축도 충분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루디는 서신의 내용을 살핀 뒤 염탐꾼을 보았다.

"굉장히 말랐는데, 원래 그런 건 아니지?"

염탐꾼이 히죽 웃는다.

"예, 폐하. 소신은 본래 통통한 편이었습죠. 염탐꾼은 주변 사람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지금의 모습은 그래서 만들어진 거예요."

"고생이구나."

루디는 뼈가 그대로 드러나는 염탐꾼의 몸을 잠시 본 뒤 시선을 돌렸다.

보고 있기가 괴로울 정도로 말랐다.

"괜찮습니다. 일인 걸요."

염탐꾼이 히죽히죽 웃는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곳은 정말 세계가 통째로 블랙기업이다.

"이야기는 천막으로 가서 듣지."

루디가 걸음을 옮기자, 약간 떨어진 곳에서 흔들흔들 춤추던 점보가 달려왔다.

[주인님! 같이 가요.]

가까이 다가온 점보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염탐꾼 몸에 코를 가져다 댔다.

[이건 누구야? 친구? 함께 노는 거야? 점보랑 놀아줘?]

염탐꾼이 기절할 것처럼 점보를 보았다.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한다. 저러다 정말 기절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점보, 저쪽에 작은 산이 보이지?"

루디가 멀리에 있는 숲을 가리키자, 점보가 엉덩이를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꼬리가 세차게 이리저리 흔들렸다.

"지금부터 숨바꼭질이야. 저기에 가서 열을 열 번 세고, 다시 열 번 세. 그리고 다시 열 번 그리고...."

점보는 숫자를 셀 수 있지만 열까지 밖에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반복해서 여러 번 세게 해야 했다.

상당히 많은 숫자를 세라고 말한 뒤 루디는 빙그레 웃으며 점보와 눈을 맞췄다.

"그렇게 센 뒤에 숨바꼭질을 시작할 거야. 며칠 전에도 해봤으니까 알지?"

[응! 점보 너무 재미있다. 새 숨바꼭질은 금방 주인님이 찾으니까 너무 좋아!]

조금 미안해졌다. 즐거워해서 다행이긴 하지만 사실은 귀찮아서 너를 치워버리는 거야.

루디는 살짝 점보의 엉덩이를 쳤다.

"자, 시작이야. 산에 가서 숨을 곳을 찾아. 그리고 술래가 오는 걸 기다려. 할 수 있지?"

[응! 주인님, 너무 빨리 찾으면 안 돼요. 점보가 숨을 때까지 기다려야 해. 숫자 다 세고 와. 알았지?]

"그래, 천천히 갈게."

루디와 점보의 교환을 가만히 바라보던 염탐꾼이 많이 놀란 듯 더듬더듬 말했다.

"폐, 폐하는 저 긴 코 마생물과 말이 통하시는군요."

"긴 코 마생물은 또 뭐야."

루디가 웃자, 근처에 있던 제국 병사들이 큰 소리로 따라 웃었다.

점보는 엉덩이를 흔들며 펄럭펄럭 산을 향해 날아갔다. 기쁜 건지, 꼬리가 헬리콥터 날개처럼 붕붕 돌아가고 있었다.

*

천막 안으로 들어간 루디는 염탐꾼에게서 그레데 왕국군에 마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전생의 부인이 기를 쓰고 자신을 죽이려는 적이다.

기분이 묘해졌다.

'대체 나는 전생에 그 여자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이런 원망을 받는 거지?'

그것도 일부러 소환해서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바람을 피웠다는 정도는 아닐 것이다.

과거의 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하지만 그렇게까지 사람을 원망할 만한 일이 뭐가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정말 알 수 없구나.'

총각이었던 자신이 갑자기 과거에는 유부남이었다는 것도 솔직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 아닌가. 이미 리리샤랑 결혼했구나.'

어라, 그러고보니 코레아 왕조의 시조는 자신이다. 그러면 자식도 있었다는 말이 되는 건데. 우와, 정말 이상하다.

염탐꾼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마녀가 뭔가 말하자, 검은 까마귀가 저희들끼리 몸을 겹쳐서 기다란 길을 만들었습니다. 그 까마귀들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아까 그 긴 코 마생물과 비슷한 빛인 것 같아요."

"그건 좀 이상하구나."

까마귀는 실체를 가지고 있으니 마생물은 아닐 것이다.

과거에 자신이 얼마나 많은 걸 했는지는 몰라도 드래곤이 실체를 가지지 않은 걸 보면 마생물을 실물처럼 만들어내는 재주는 없었다.

한데 짐승이 마생물의 빛을, 마력을 가지고 있다고?

어쨌든 마녀를 만나야겠다. 그러지 않고는 뭔가 매듭이 지어지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전 부인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위가 따끔따끔 아픈 느낌이 들었다.

염탐꾼은 몇 가지 상황에 대해 더 이야기한 뒤 다시 와토린구로 돌아갔다.

그는 며칠 쉬라는 것도, 음식을 좀 가져가라는 것도 거절했다.

루디는 그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구부정하게 휘청휘청 걷는 모습은 영락없는 보통의 난민이었다.

'염탐꾼은 주변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한다라.'

그가 남겼던 말이 계속해서 가슴에 남는다.

염탐꾼이 마르지 않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

계절은 여전히 겨울이지만, 추위는 이미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봄은 이제 금방이다.

리리샤는 등을 곧게 펴고 긴 복도를 걸었다.

겉으로 볼 때는 우아하게 그저 걷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채를 쥔 손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공단과 레이스로 장식된 부채를 아플 만큼 꽉 움켜쥐고 있다.

그녀의 뒤를 쫓아오는 시녀들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리리샤는 매주 열리는 상황후의 다과회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오늘은 후궁에 대한 화제가 나왔다.

지금까지는 돌려서 넌지시 말하던 상황후가 이번에는 직설적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후궁은 황후의 관할, 이제 그대가 황제에게 직접 후궁을 선정하여 권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니겠느냐고. 황실에 아이는 아무리 많아도 적은 것이라고.

거기에 어떻게 대답했는지,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잘 모르겠다.

황후궁에 가까이 가면서, 어느새 주위에는 사람이 없어졌다.

황궁의 여주인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상황후가 귀족 부인들의 파벌을 관리하고 있는 지금 리리샤의 궁에는 손님이 많지 않다.

조금 썰렁할 정도로 황후궁은 인적이 드물었다.

그게 별로 괴롭거나 슬프지는 않다.

다만 너는 아직 황제의 진짜 부인이 아니라고 건물 전체가 말하는 것 같아 가끔 슬퍼졌다.

루디는 여전히 자신을 애지중지해주지만, 남자의 마음은 쉽게 변한다.

모두 그렇게 말했다.

정말 좋아하는 여자가 나타나면 지금까지 사이좋았던 부인을 등한시하고 그 여자 엉덩이만 쫓아다닌다고 했다.

상황후조차 나디아그라에게는 당해내지 못했다고, 모두 그렇게 말했다.

리리샤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오늘은 후궁에 갈 거야."

타이라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무릎을 살짝 굽혔다.

"예, 마마. 사무관에게 알려두겠습니다. 내일 오전 일정까지는 비울 수 있을 거예요."

새해가 되면서, 남작 부인은 자신의 일을 조금씩 타이라에게 넘겨주고 있다.

미래에는 타이라가 필두 시녀가 된다 생각하고 교육을 시키는 것 같다.

리리샤는 방으로 돌아가, 침대 옆에 두었던 작은 상자를 열었다.

거기에는 짤막한 말이 담겨있는 편지가 몇 통 있었다.

루디의 편지였다.

황궁과 디코콰리아에 간 제국군 사이에는 정기적으로 소식이 오간다.

전쟁 상황, 물자의 보충을 요청하는 서류, 부상하거나 사망한 병사의 이름과 상황 등을 비롯해 리리샤가 잘 모르는 여러 가지 서류가 오고 갔다.

루디는 그런 소식이 황궁으로 올 때마다 꼬박꼬박 편지를 보냈다.

대부분 한 장짜리로 간단하다.

오늘은 눈 덮인 산으로 진군했다거나, 스튜에 쥐가 빠져 있어서 깜짝 놀랐다거나, 눈이 내리는 걸 보니 리리샤가 뒹굴뒹굴 눈밭을 구르던 일이 생각났다거나, 그런 자잘한 일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는 보통 잘 지내고 있느냐, 이불은 차지 마라,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등의 말이 쓰여 있다.

언제까지고 루디는 자신이 어린아이인 줄 안다. 이제 완전히 성인 여성인데.

루디의 편지에 리리샤도 매번 답장을 보냈다.

루디의 한 장 짜리에 비해 그녀의 것은 열 장, 스무 장도 된다. 한 번 쓰고 나면 봉투가 두툼해졌다.

그래도 모자라다.

그녀의 사랑과 그리움을 모두 보여주기에는 종이가 너무 작아.

리리샤는 편지를 가슴에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이 온화하게 그냥 단둘이 삶을 보내면 안 되는 걸까. 꼭 후궁이 필요해? 루디 자신도 필요 없다고 말하는데, 다른 여자가 두 사람 사이에 꼭 끼어들어야 할까.

루디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봐주지도, 놔두지도 않을 것 같다.

"보고 싶어."

전쟁에서 고생하는 루디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다.

한껏 힘내서 매일 재미있게 잘 지내고 있다고 답장을 쓰지만, 외롭다.

리리샤는 잠시 편지를 끌어안은 채 잉크 냄새를 맡고 있다가 눈을 떴다.

펜을 들고, 절대로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쓴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루디, 정말 보고 싶어요. 사랑해. 보고 싶어.

한 글자 한 글자 적다 보면 눈물이 똑똑 흘러내려 글자가 번졌다.

그래도 여전히 적는다. 한 글자 적을 때마다 조금씩 더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만 둘 수 없다. 보고 싶다는 글귀 한 마디에 루디의 얼굴이 그만큼 선명해지니까.

단순한 문장 하나에 보고 싶은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 떠오른다.

그래서 그만 둘 수 없어.

수십 장 그렇게 쓴 모양이다.

타이라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가만히 손을 잡았다.

"마마, 이렇게 쓰다 또 손이 아프세요. 지난번에도 손가락이 며칠 동안이나 아프셨잖아요."

'타이라 미안. 하지만 가장 친한 타이라가 있어도 그리움이 멈추지를 않아. 루디가 없으면 타이라도 소용없어. 그러니까 계속 쓸 수밖에 없는 거야.'

리리샤는 마음속으로 사과의 말을 하며 해쭉 웃었다.

"울면서 웃지 마세요, 마마. 그러면 보는 사람 마음이 더 아파요."

타이라가 리리샤를 꽉 끌어안았다.

"울고 싶으면 그냥 울어요! 그렇게 웃는 척하지 말고."

"미안. 타이라도 보고 싶을 텐데."

"...."

타이라가 가만있다가 중얼거렸다.

"물론 시녀로서 폐하가 걱정되지요. 당연하잖아요."

거짓말인 걸 안다.

쌍둥이처럼 몇 년을 함께 붙어 있었다고 생각해?

타이라도 루디를 사랑한다. 어릴 때부터, 아마 계속.

그래도 타이라는 리리샤를 위해 자신의 사랑을 숨기고 있는 거다.

리리샤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타이라의 등에 손을 돌렸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랑은 참 어려워."

"...."

타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리리샤의 등을 토닥거렸다.

두 사람은 서로 껴안은 채 가만히 서로의 등을 쓸었다.

*

그날 저녁, 리리샤는 나디아그라 비의 처소로 향했다.

원칙대로라면 황후가 이렇게 마음대로 후궁에서 밤을 지내서는 안 된다.

비록 황후가 후궁의 주인이라고는 해도, 황실의 법도라는 게 있었다.

공식석상에서 황제 앞에서 황후는 몇 걸음 떨어지고, 어느 방향에서 어떤 자세로 있어야 하는지, 몇 걸음 걷고 멈춰야 하는지조차도 모두 세세히 문서로 기록된 규칙이 있었다.

후궁을 다스리는 일도, 황제와 밤의 생활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모두 규범이 되는 것들이 정해져 있다.

거기에는 황후가 공식적인 행사나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해진 곳 외에서 잠을 자서는 안 된다는 규범도 있었다.

여러 권으로 이루어진, 두꺼운 황실 예법의 책 가운데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황실 예법에 관한 규범은 너무 많아서 전문적으로 그것만 관리하고 공부하는 관리도 있다고 들었다.

지금은 그런 관리들이 따로 만들어 발간한, 간소화된 책자만 공부하면 된다. 한데 그것조차도 두 손으로 들어야 할 만큼 두꺼운 책이 여러 권이었다.

리리샤가 배웠던 것들은 모두 간소화된 규범이다.

그렇게 빡빡하게 정해진 규칙 속에서, 리리샤가 자유롭게 잠자리를 바꿀 수 있는 건 모두 루디 덕분이었다.

황실의 어떤 규범도, 어떤 규칙도, 황제의 뜻에 반하지 않으니까.

황제가 원하는 한, 리리샤는 후궁에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다.

그 말은 루디의 관심이 리리샤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완전히 처지가 바뀐다는 말이다.

순식간에 그녀는 루디에게서 멀어져 버리고 만다.

후원이 없는 리리샤에게는 루디의 관심을 강제로 자신에게 돌릴 만한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

부드럽게 흙길을 밟으며 달리던 마차가 멈췄다.

리리샤는 세월이 멈춘 것처럼 예전과 똑같은 모습의 저택을 보았다.

약간 부서진 담장은 새로 보수가 되어 있지만, 새롭지 않다. 이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도록 교묘히 고쳐져 있었다.

모두 루디의 지시다.

나디아그라 마마의 신경을 자극하지 않도록, 이곳은 계속 옛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양 한 마리가 메에, 메에, 울면서 밖으로 나왔다.

"어디로 가는 거야!"

목소리가 먼저 들리고, 마리가 양을 쫓아서 뛰어나왔다.

"어머!"

리리샤를 발견한 마리가 환하게 웃었다.

"마마, 어서 오세요."

황후가 된 지금은 일정 없이 움직이는 경우가 드물다. 언제나 일정에 따라 미리 상대에게 알리고 방문했다.

하지만 이곳은 불쑥 찾아와도 괜찮다. 언제 와도 항상 마리가 웃으며 반겼다.

마차에서 내리자, 시녀와 시종들은 모두 조용히 물러갔다.

"마리."

리리샤가 다가가서 허리를 끌어안자, 마리가 후후 웃으며 한 번 꽉 안았다 놓았다.

"잠깐 기다려요, 마마. 양부터 잡읍시다."

"후후."

리리샤는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그래, 언제나와 똑같다. 황후라고 자신을 우선시하지 않는다.

마리에게는 정원의 잡풀을 뽑고, 씨를 뿌리고, 양을 잡는 일이 황후보다 우선이었다.

[먹는 게 가장 중요한 거니까요.]

마리는 항상 그렇게 말했지.

리리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양을 잡는다면 리리샤지."

"말로만 잡지 말고 행동하세요, 마마. 거기! 막아요! 도망가겠어요."

마리가 치마를 두 손으로 잡고 뛴다.

리리샤도 함께 뛰기 시작했다. 치마가 거추장스럽다. 밑단이 발에 살짝 밟힌 것 같다.

양이 앞으로 오자, 리리샤는 두 손을 내밀고 덥석 양을 잡았다.

"아앗!"

양이 깜짝 놀라 몸부림치면서 손을 빠져나갔다.

리리샤는 코르셋 때문에 균형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기우뚱 앞으로 넘어졌다.

잔뜩 부풀린 치마가 종처럼 옆으로 넘어졌다.

그 사이, 마리는 양을 잡아 저택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뒤뚱뒤뚱하며 일어서는데, 마리가 가까이 와서 손을 내밀었다.

"세상에! 코르셋이 망가진 것 같아요. 아까워라. 집에 들어가면 수선을 해줄게요."

무릎과 손바닥이 약간 까졌다. 시녀들이 봤다면 난리가 났을 거다.

하지만 마리는 어머, 어머,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예전에는 정말 날쌔게 잘 뛰셨는데, 그새 거북이가 다 됐네요."

"마리."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일어나면서 그대로 마리의 허리를 끌어안고 펑펑 운다.

"여전히 우는 건 호탕하네요, 마마는. 그렇게 목놓아 울다 루디님이 오면 뚝 그치는 게 정말 신기했는데."

다시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다. 마리한테는 무슨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리!

"루디 님이 보고 싶어서 그러세요?"

"응."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또 무슨 괴로운 일이 있으셨나요?"

"응."

"괜찮아요. 자, 이리 오세요."

마리가 그녀를 끌어안고 어느새 안쪽에서 염소가 나왔다.

예전에 리리샤를 우습게 여기던 염소다.

녀석이 리리샤의 드레스를 질겅질겅 씹으며 가끔 머리를 밀었다.

리리샤는 한참 동안 마리의 허리에 매달려 울다 간신히 말을 꺼냈다.

"나도 언젠가, 루디가 다른 후궁을 들이면 상황후 마마처럼 될까? 나도 질투에 미쳐서 다른 여자를 죽이려 하게 될까?"

"...그럴 것 같으세요?"

마리의 질문에 잠시 대답할 수 없었다. 한참 뒤에야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정말, 너무 미울 것 같아. 하지만 더 끔찍한 건 그런 내가 두려운 게 아니야. 난 그렇게 됐을 때 루디가 날 미워하게 될까 봐, 그게 무서워. 마리, 나는 변했어? 예전과 달라? 끔찍한 여자가 된 것 같아?"

울면서 그렇게 묻자, 마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하긴 하네요. 남자 때문에 다른 여자를 죽이고 싶어 하게 될지도 모른다니."

"...."

"하지만 괜찮아요. 그렇게 되기 전에 루디님이 말릴 테니까요."

마리가 빙그레 웃었다.

"혼내겠지요. 그건 나쁜 일이라고, 아마 화를 내실 거예요."

"...."

마리는 흘러내린 리리샤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후후, 웃었다.

"리리샤님도 많이 컸어요. 예전에는 절대로 크지 않을 것 같아 보였는데."

이마를 붙이고, 마리가 말했다.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루디님을 믿고 그냥 어른이 되면 돼요."

"하지만 정말 후궁이 들어와서 내가 미워하게 되면 어쩌지?"

마리가 고개를 갸우뚱하고 말했다.

"그러면 그렇다고 루디님에게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그게 리리샤님다워요. 속으로 끙끙거리지 말고, 루디님에게는 항상 솔직하면 돼요."

마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두 사람은 다른 부부와는 다르니까요. 두 분은 어릴 때부터 함께 지내온 남매 같은 사이죠. 남녀의 애정이 다소 흔들린다 해도, 남매의 정은 여전히 남아요. 게다가 두 개를 분리할 수도 없죠. 안 돼요. 계속 보아온 나는알 수 있어요. 그러니 남매처럼 부부처럼, 계속 살아가세요, 마마.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마리가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마침 오셨으니 양 젖 짜는 것 좀 도와주세요. 새로 온 녀석이라 자꾸만 도망가네요."

그날 저녁, 두 사람은 저택의 뒤쪽에 있는 헛간에서 양젖을 짰다.

나디아마마는 여전했다.

여전히 루디를 아들로, 리리샤를 며느리로 알고 있었다.

정말, 이곳은 변하지 않는다. 마음이 놓였다.

어느새 가슴속을 차지하고 있던 괴로움이 조금 사라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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