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텅 빈 도시
아직 사방에 눈이 남아있는데, 공기에서는 어느새 봄의 기운이 풍겨왔다.
단단하게 눈이 굳어 있던 땅도 질척질척해졌다. 눈이 녹아 흙과 섞이면서 거의 진흙탕처럼 변해 있었다.
미끄러운 눈도 어렵지만, 진흙탕 길도 쉬운 것은 아니다.
신발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진흙이 안 그래도 힘든 병사들의 걸음을 더 방해했다.
오랫동안 걸어야 하는 군인에게 그것보다 어려운 일도 없는 법이다.
병사들의 입에서 불평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병사들의 표정은 대부분 밝았다. 누구도 진심으로 불평하는 사람은 없다.
보좌관이 옆으로 다가왔다.
"이제 조금 있으면 휴식시간을 갖습니다."
"그래, 병사들 중에 배탈이 난 사람은 없는가?"
보좌관이 히죽 웃었다.
"폐하는 정말 병사들의 상태를 잘 아시는군요. 몇 명 정도 탈이 난 자가 있습니다."
"역시."
루디가 웃자, 보좌관이 어깨를 으쓱했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가 되면 항상 그런 놈들이 몇 명 나오지요. 폐하도 경험이 있습니까?"
"그래. 와토린구에서 훈련받을 때 그런 적이 있어. 그때는 정말 괴로웠다. 하루 종일 바지 올릴 틈이 없었으니까."
"몸이 아직 전장에 익숙지 않아서 그럽니다. 기온이 급격히 바뀌면 적응하지 못한 몸이 비명을 지르는 거지요. 몇 년 전장에서 구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없어져요."
보좌관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매일 루디를 보는 사람이니 배탈이 나지 않은 건 알고 있을 거다. 그런데도 묻는 건 왜인지 몰라.
"괜찮아."
잠시 진군하자 휴식에 적당한 장소가 나왔다.
병사들이 걸음을 멈추고 대장들이 뭔가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서 나무통을 꺼내 물 마도구의 물을 받는다.
병사들이 허리춤에 묶여 있던 가죽 수통에 물을 보충하고, 몇 명은 근처 외진 곳으로 달려가 쪼그리고 앉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에서 진군 중에 불가능했던 배설을 처리하는 병사들이 늘어났다.
추위가 누그러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살을 에는 바람이 분다.
모두들 옷을 겹겹이 껴입어서 벗는 데만도 한세월이었다.
루디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지만, 뭐, 남의 말 할 처지가 아니다.
잠시 뒤에는 루디 역시 껴입은 옷을 하나씩 해체하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루디를 위해 천막이 세워졌다.
이것은 진을 칠 때 사용하는 커다란 것과는 다르다. 식사를 위해 잠시 휴식하는 동안 사용하는 작은 천막이었다.
"식사 준비가 될 때까지 잠시 눈을 붙이시는 게 좋겠습니다."
보좌관이 말을 했을 때였다.
쾅, 소리와 함께 땅이 약간 흔들렸다.
"또인가."
루디가 한숨을 쉬자, 보좌관이 웃는다.
"병사들에게는 인기입니다."
점보는 진군하는 병사들을 쫓아다니며 하늘에서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그러다 기분이 좋아지면 아무도 없는 바닥을 찾아 수직으로 낙하한다.
그때마다 바닥이 흔들리며 엄청난 소리가 났다.
지금도 분명 그것이다. 요란한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루디는 점보가 땅에 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 두근거리지만, 왜인지 병사들에게는 엄청난 인기였다.
점보도 그게 즐거운지 유난히 병사들이 쉬는 시간만 되면 땅에 몸을 박았다.
이래저래 쿵짝이 잘 맞는다.
잠시 쉬고 다시 출발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천막을 치고 하룻밤을 지낸다. 계속 이런 식이다. 걷고 자는 걸 되풀이하는 행군을 벌써 몇 달째 하고 있었다.
*
다음 도시에 도착한 것은 이틀이 지난 후였다.
이번 도시는 위치가 좋아 사람이 많이 몰리는 도시였다. 지금까지 거친 곳 중에서는 가장 번화한 곳이다.
항상 그렇듯이 도시 안으로 항복을 권하는 사자를 보내려 했지만 성문이 열리지 않았다. 지키는 병사도 없다.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뭔가 이상하다.
루디는 생쥐들을 불러냈다.
반짝 빛나는 마생물 백여 마리가 긴 꼬리를 흔들며 루디의 앞에 모였다.
쥐의 특성 때문에, 차분히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작은 빛의 생쥐들이 올망졸망한 눈으로 사방을 보며 한데 모여 움직이는 모습은 꽤 귀엽다.
주변의 병사들이 웃으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숫자는 이 정도면 될까.'
루디는 이 아이들을 도시 안으로 들여보내 상황을 살필 생각이었다.
본래 루디는 그런 일을 잘 하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아 제대로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는 것 외에도 이유가 있었다.
마생물은 인간과 사고방식이 다르다.
인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그들이 생각하는 바는 완전히 틀려서, 종종 서로 간의 인식이 매우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의 인식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때로 상황을 잘못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교묘하게 잘 가늠할 수 있으면 괜찮겠지만, 인간이란 귀 얇은 동물이다. 뭔가 정보를 얻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의존하게 된다.
마생물처럼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존재라고 하면 그러한 점은 더욱 커져서, 역시 판단을 그르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다.
루디는 자신을 바라보는 생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저 안으로 들어."
하지만 그가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도시 쪽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커다란 성문이 아주 조금 열리고 세 명의 남자가 주저주저하며 밖으로 나와 섰다.
그들과의 거리는 매우 멀다.
대략의 모습은 살필 수 있지만, 얼굴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는 거리였다.
제국군 병사들이 대번 무기를 꾸미며 경계에 나섰다.
도시에서 나온 세 명의 남자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표시로 두 손을 번쩍 들고 몸을 천천히 돌려 보였다.
병사나 귀족은 아니다. 옷차림도 그렇지만, 동작이 어색하고 조잡해 보였다.
병사 몇 명이 창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몇 마디 나눈 뒤, 병사들만 진지로 돌아온다.
남자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병사가 상위자에게 말을 전하고, 곧이어 루디에게 보고가 올라왔다.
"도시 안에 카니아 군이 없다고 합니다. 병사들이 모두 도망갔다고 하는 군요."
루디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지금까지 여러 도시를 함락해왔다.
그중에는 제국군이 도착해 성을 부수는 순간 우르르 도망치기 시작한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제국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망친 경우는 없었다.
솔직히 믿어지지 않는다.
"함정일 가능성은 없을까?"
루디의 질문에 보고를 하러 온 대장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생쥐들을 보내 그 사실을 확인해볼 수는 없었다.
만일 병사들이 창칼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마생물은 그들을 병사라고 판단하지 않고 평민이라고 볼 것이다.
"선발대를 보내 확인하겠습니다."
대장은 그렇게 말하고 오십 명 정도의 병사를 도시 안으로 들여보냈다.
선발대가 들어가 있는 동안, 세 명의 남자는 제국군의 진지로 데려왔다.
진지에서 약간 떨어진 공간에서 남자들의 몸수색이 시작되었다.
병사들은 세 명의 남자를 거의 벗겨놓다시피 하여 세심하게 살폈다.
입을 벌리게 하고 몸을 구부려 엉덩이를 본다. 그런 곳에 있을 리 없는데 콧구멍까지 확인했다.
기막혀 하는 루디를 보고, 보좌관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간혹 독을 그런 곳에 숨겨 접근하는 이가 있다고 한다.
독을 쓴다 해도 해독 주문을 걸고 있는 루디의 몸에는 아무 영향도 줄 수 없지만.
병사들이 샅샅이 검사해, 입속은 물론 신발과 몸 어디에도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확인이 끝난 뒤에야 남자들은 루디의 앞으로 오게 되었다.
"도시 안에 병사가 없다는 말은 들었다. 너희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언제 도망갔느냐?"
"제국군이 디코콰리아에 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 무렵부터 조금씩 병사가 줄어들었습니다."
남자들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이 시대는 정보의 전파가 늦다.
하루 이틀이면 온 세상에 다 퍼지는 지구와는 달리 정보는 특정 계급의 특권에 속했다. 그나마도 매우 느리지만.
성주를 비롯한 카니아 병사들은 제국군이 적으로 돌았다는 사실을 도시 주민에게는 한계가 올 때까지 숨기고 있었던 것 같다.
남자들의 말에 따르면 병사들의 수가 조금씩 줄어들더니 열흘쯤 전부터는 눈에 띄게 쑥쑥 없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틀 전쯤에는 병사를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부유한 사람들은 상당수 병사들에게 약탈당하거나 죽임을 당한 모양이다.
도시 안은 현재 아수라장이라고 했다.
루디는 남자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물었다.
"너희들은 무얼 하는 자들이냐? 누구를 대표하여 이 자리에 온 거지?"
남자들이 넙죽 바닥에 엎드렸다.
"저는 한때 이 도시에서 가장 큰 원단 가게를 가지고 있었던 상인입니다. 제 옆에 있는 사람은 공방을 가지고 있고, 그 옆 사람은 이발사입니다. 도시에서는 제법 명망이 있어 도시에 사는 자들의 대표로 오게 되었습니다."
상인이라는 남자는 고개를 땅에 대고 비통하게 말했다.
"이렇게 애원합니다. 저희 도시에 있는 식량은 고작해야 한두 달 넘기기도 어려운 양밖에 남아있지 않고, 남자도 상당수 죽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이 죽거나 빼앗기면 당장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현명하옵신 폐하, 부디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발사라는 남자가 그 뒤를 이었다.
"물론 아무것도 내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도시에는 아직 여자가 많습니다. 술도 많지는 않지만 아직 성 지하에 다소 남아있습니다. 병사님들이 드시기에는 다소 부족할지 모르지만 상당히 좋은 술입니다. 게다가 저는 한때 외과 기술자 일도 많이 했으니 분명 병사님들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외과 기술자는 지구에서 말하는 외과의다.
이 세계에서 의사라고 말하면 내과 의사를 뜻한다. 상처를 꿰매고 고름을 짜고 자르는 일은 외과 기술자나 이발사가 담당했다.
지금과 같은 전시에는 의사보다는 외과 기술자가 더 필요하다.
루디는 보좌관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사람의 일은 기억해두게."
"알겠습니다."
남자들은 거듭 자비를 베풀어달라며 우는소리를 했다.
그 사이 도시 안으로 들어갔던 선발대가 돌아왔다. 그들의 보고는 남자들의 말과 일치했다.
다만 달랐던 것은 예상보다 더 비참했다는 점뿐이었다.
겨울이라 덜하긴 하지만, 시체 냄새가 곳곳에서 나고 있다고 했다.
루디는 세 명의 남자의 앞에 섰다.
"너희들은 앞으로 제국의 땅에 사는 사람이다. 우리 제국에 순응하면 나쁘게는 하지 않아. 지금부터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죽은 사람을 도시 밖으로 옮겨라. 그대로 두면 전염병이 돌 거야. 안됐지만 한꺼번에 매장한다."
상인이 쩔쩔매며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폐하의 온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지금은 땅이 얼어 매장할 수 있을 만큼 깊이 파기가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아. 매장할 구멍은 우리가 파놓을 테니."
상인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루디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세 명의 남자가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그렇게 고마워할 것도 없다. 구멍을 파는 것은 병사가 아니라 아기 코끼리니까.
아니나 다를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렸다.
세 명의 남자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잠시 뒤 귀를 펄럭여 루디에게 날아온 점보를 보고, 제국군에 이끌려 도시 안으로 들어가려던 한 명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어지간히 놀랐던 것 같다.
제국군은 성문을 활짝 열고 도시 안으로 진군해 들어갔다.
선발대가 말한 대로 도시 안쪽에는 여기저기 시체가 널려 있었다. 곧바로 도시 사람들이 시체를 밖으로 내기 시작했다.
도시는 매우 크고 쾌적했다. 본래는 번성했다더니 건물도 튼튼하고 제법 화려하다.
제국군을 따라다니는 상인들도 이번에는 도시 안에서 장사를 하기로 했다.
창관의 여자들이 영주성의 별관에 자리를 잡고, 술과 음식, 각종 소모품을 파는 상인들은 영주성 일부분을 차지했다.
이번 도시에서는 약탈이 없는 대신 도시의 주민들이 자발적인 접대에 나섰다.
술은 성의 것을 사용하지만, 제국군이 제공한 볼품없는 육포와 야채는 도시에서 가장 솜씨 좋은 사람들이 손에 의해 화려한 맛으로 변했다.
도시에서 가게를 내고 있던 두 명의 이발사가 병사들의 머리와 수염을 다듬었다.
신발 장인은 병사들 신발의 수선을 맡았다.
여자들 중 일부는 병사들의 상대를 했다.
루디는 그런 여성에게는 밀가루를 약간 지급하도록 명령했다.
여자들의 참여가 상당히 늘었다.
*
밤이 되면서 도시는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전쟁 중인데도 마치 축제 같다.
전쟁의 비참함을 느끼고 있는 건 도시의 주민뿐이었다.
루디는 영주성 창문에서 횃불로 화려해진 거리를 내려다보며 음울하게 숨을 쉬었다.
[전쟁 중에는 군기가 엄격해야 합니다. 하지만 가끔씩 풀어줄 필요가 있지요. 그 시기를 놓치면 병사들이 지칩니다. 이기고 있는데도 사기가 떨어지고 나중에 그걸 회복해보려고 풀어주면 기강이 해이해지지요. 결국엔 손도 댈 수 없을 만큼 악화됩니다.]
보리스가 했던 말이다.
경험 많은 보좌관도 권했기 때문에, 며칠간은 이런 분위기로 지내게 된다.
하지만 루디의 마음은 그들처럼 밝아질 수 없었다. 전쟁의 비참함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좀먹는 것 같다.
가만히 거리를 내려다보던 루디는 몸을 돌렸다.
오늘 오전에 제국에서 보낸 보급품이 도착했다. 리리샤의 편지도 함께 왔다. 항상 그렇듯이 상당히 두툼했다.
이 편지를 쓰면서 끙끙거렸을 리리샤를 생각하니 겨우 미소가 떠올랐다.
루디는 봉투의 밀랍 봉인을 깨고 편지를 꺼냈다.
쓰여있는 이야기는 평범했다. 마생물과 놀았던 이야기, 남작 부인에게 혼났던 일과 아직도 받고 있는 수업 이야기 들이다.
항상 재미있다고 쓰여 있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루디는 알고 있었다.
요즘 들어 가끔 황후궁의 모습을 보는데, 볼 때마다 리리샤는 자신의 편지를 끌어안은 채 울고 있었다.
명예를 위해서 말하자면, 밤에는 방의 모습을 보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취침 시간 이전까지만 보고 있다.
편지를 넘기던 루디의 손이 문득 멈췄다.
방금 이상한 글귀를 본 것 같다.
다시 한번 되돌아가 읽은 루디는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요, 루. 이번에 아기는 생기지 않은 것 같아. 다음에는 꼭 낳아줄게요....]
설마 아무도 리리샤에게 그 일의 진실을 말해주지 않은 건가.
물론 황후에게 꼬치꼬치 캐물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대강 짐작은 하고 있을 것이다.
리리샤가 완전히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시종장은 알고 있다.
그렇다면 넌지시 남작 부인에게 말해 사실을 가르쳐줄 법도 한데, 설마 아무도....
'내가 가르칠 수밖에 없는 건가.'
방이 꺼질 것 같은 깊은 한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