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예로 팔려간 곳이 황궁이었다-75화 (75/201)

<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

#075

올해는 유달리 날이 추웠다. 그래서일까. 새해는 예전에 지나고, 눈틈으로는 벌써 새싹이 돋아나고 있는데 여전히 바람이 매섭다.

'폐하가 머물고 있는 산 정상의 성은 더욱 춥겠지.'

얼마 전, 황제를 따라 그곳에 가 있는 시종에게서 폐하의 건강 상태가 단시일 내에 많이 나빠졌다는 서신을 받았다.

너무 추운 곳이라 몸에 무리가 갔을지 모른다. 디코콰리아의 상태가 불안정해서 가장 안전한 장소를 고른 건데, 잘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레이놀드는 바쁘게 궁의 안팎을 돌아다니며 일의 진척을 살폈다.

"그쪽! 색깔이 너무 늙었다. 이 궁의 주인께서 아직 나이가 어리시다는 점을 잊었구나. 조금 더 가벼운 색으로 바꿔라."

레이놀드가 지적하자, 시종이 서둘러 침대 위에 늘어진 천을 다시 거두었다.

두 겹으로 길게 늘어져있던 진한 남색과 밤색의 두꺼운 커튼은 곧바로 치워지고, 침대의 사방 귀퉁이에는 얇은 흰색의 원단만 남았다.

한쪽에서 각종 천 제품의 교환을 지휘하던 시종이 원단 제품 보관소에서 가져올 커튼에 대해 다시 지시를 내린다.

다른 쪽에서는 수십 명의 하인과 하녀가 사다리에 올라가 천장에서 늘어져 내린 샹들리에와 창틀을 닦았다.

수십 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궁을 손질하고 새롭게 치장하느라 벌써 몇 달째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이 궁은 본래 전 황제가 말년에 별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상황제는 당시 황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이곳에서 몇 명의 후궁과 조용히 살다 숨을 거두었다.

그 때문에 이 궁의 실내는 상황제의 나이와 취향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나이 어린 새 후계자 루디가 살게 된다. 치장도, 가구도, 사소한 물건 하나까지 모두 바꿔야 했다.

먼 훗날 장성한 후계자가 별궁으로 사용할 것까지 고려하면 너무 젊고 발랄한 색상도 안 될 것이다.

이 넓은 궁을 청소하는 것만으로도 큰일인데, 거의 모든 실내장식과 천 제품을 어린 후계자와 그 미래에 맞춰 바꾸려다 보니 몇 달이나 되는 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심지어 황후와 측근의 눈을 끌지 않도록 조용히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도 모자랐다.

이래저래 시간도 인력도 아쉬워, 레이놀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처음 이 궁에 발을 디뎠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그때는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그야말로 막막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얼추 되어가는 모습을 보고, 레이놀드는 궁을 나왔다.

야만족의 사신이 리리샤 공주를 보고 싶다고 했던 일은, 백작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흐지부지 흘러갔다.

그 뒤로 몇 달 동안 황후는 조용히 지내고 있다.

레이놀드는 한숨을 쉬고 황후의 처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무 조용하다.

황태자의 불능 소문은 이제 누구나 아는 사실이 되었다. 다과회나 무도회 자리에서 황태자가 조롱거리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를 정도다.

황후가 그걸 모를 리 없는데 아무 움직임도 일으키지 않았다.

오히려 둘째 황자가 난리였다.

벌써 황태자가 물러나고 자신에게 자리가 온 것처럼 뽐내며 여러 귀족과 접촉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야심만만한 하위 백작가의 딸을 후궁으로 받겠다고 약속까지 한 모양이다. 이미 그 딸과 여러 밤을 지냈다고 들었다.

2황자는 머리는 나쁘고 성격도 지랄맞은데 야심만 큰 사람이다. 황제에게도 황후에게도 언제나 골치 덩어리였다.

레이놀드가 황후의 처소에 도착하자, 황후의 사무를 담당하는 수행원 한 명이 그를 맞았다.

이것도 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예전의 황후는 수행원보다는 시녀들을 전면에 세워, 손님의 접대도 그들이 도맡아 했다.

하지만 백작 부인이 죽고 몇 달 사이, 시녀들은 그저 황후의 신변만을 보살피고 조용히 지낸다. 마치 시들을 꽃잎 같았다.

'역시 이상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원.'

황후가 서툰 짓을 벌이면 황제의 마음이 상한다. 할 수만 있다면 막고 싶었다.

레이놀드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오랫동안 나라를 위해 개인을 죽여온 황제다. 남은 생이 얼마 되지 않는 황제의 마음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수행원은 시종장을 안으로 안내한 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마마, 오랜만에 뵈옵니다."

"시종장."

황후의 얼굴은 의외로 평온했다. 한동안 바깥출입은 물론 면회조차 잘 받지 않고 있어서 초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과 달라 조금 당황했다.

의례적인 인사말을 몇 마디 나누며, 은근히 황후의 마음을 탐색해본다. 특히 나디아 비에 대해 뭔가 할 생각은 아닌지 걱정이었다.

사교에 능한 황후다 보니 레이놀드가 하고 싶은 말을 금방 눈치챘다.

황후가 차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내가 그녀에게 해코지 할까 걱정입니까. 아니, 시종장은 나디아그라가 아니라 폐하가 걱정인 거겠지요. 그녀야말로 폐하의 마음에 들어있는 사랑이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황후 마마. 그녀는 수많은 후궁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심지어 지금은 정신도 온전치 못한 이, 마마가 마음에 담을 필요도 없는 존재입니다."

황후의 입술 끝이 올라가며 작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시종장까지 나를 바보 취급 하는 건가요. 그런 사람은 폐하 한 명으로 족합니다."

"...."

"그녀, 코레아의 공주와 많이 닮았지요. 처음 본 순간 알았습니다."

"!"

설마, 황후가 알고 있었나.

레이놀드는 당황했다.

그가 아는 한 황후가 코레아의 공주, 와토린구 공작부인과 만난 적이 없다. 설혹 황제의 마음에 대해 눈치챘더라도 나디아그라가 그녀를 닮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대체 어디에서 코레아의 공주를 보았단 말인가.

레이놀드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황후가 히스테릭한 미소를 띠었다.

"폐하께서 가지고 있는 초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항상 지니고 있는 그 작은 장식품."

레이놀드는 작게 혀를 찼다.

황후가 말하는 것은 작은 펜던트 목걸이다. 뚜껑이 있어서 안에 초상화나 그림을 넣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황제가 코레아 공주에게 청혼하러 다니던 무렵에 만든 것인데, 설마 그 안을 보았을 줄이야.

"마마, 와토린구 공작 부인은 그저 후궁의 후보 중 한 명이었을 뿐입니다."

레이놀드가 말하자, 황후가 손을 들어 멈췄다.

"우리, 서로 뻔히 아는 거짓말은 하지 맙시다. 그대도 알고 나도 알고 있어요. 황제에게 그녀가 유일한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폐하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는 내게조차 마음을 완전히 허물지 않는 분입니다. 그런 폐하가, 아무리 저쪽에서 조건을 걸었다 해도 국정을 내버린 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다니던 여성입니다."

황후는 고개를 약간 떨구고, 그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뭐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디아 비에게 그토록 구애되어 있었구나.'

여자의 직감은 정말 무섭다. 때로 그것은 논리보다 강하게 진실을 꿰뚫는다.

"오늘은 피곤하군요. 모처럼 면회지만 이만 물러가세요."

황후가 고개를 외면한 채 조용히 말했다.

레이놀드는 공손히 절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본래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은근슬쩍 황태자와 후계에 대해 언급해보려고 했다.

황후는 총명한 사람이다.

자신이 어떤 처지에 빠졌는지 냉정하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가장 상처가 적은 길로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토록 오래전부터 마음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니 뭔가 권유할 생각이 사라졌다.

상처가 너무 오래되면 없앨 수 없다. 흔적이 남는다. 황후는 아마 나디아그라를 끝까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돌아가는 길에 측근인 시종 부라도프를 만났다.

"황후의 감시를 강화하게."

소리를 죽여 귓가에 말하자, 부라도프가 고개를 숙였다.

"이미 측근의 주변을 감시하고 있습니다만, 한두 명 더 넣어 두겠습니다."

"그래. 리리샤 공주는 어떤가?"

"드디어 음식 준비가 끝난 모양입니다. 며칠 전부터 보따리에 싸고 있어요."

"쯧쯧, 아직도 포기를 하지 않았나."

레이놀드가 말하자, 부라도프가 작게 웃었다.

"공주님의 원대한 꿈이니까요. 가끔 담 너머로 공주님의 소리가 들립니다. 반드시 루를 찾아내 데리고 온다고 결의가 대단해요."

"하아, 어째서 그렇게 자란 걸까. 황후 때문에 눈을 꺼리기는 했어도 좋은 선생을 넣었는데."

리리샤 공주의 공부를 맡고 있는 것은 나이가 많은 남작 부인이지만, 본래는 공작가의 따님이었다. 신분을 낮춰 혼인했기 때문에 사교계에서는 멸시받고 있다. 허나 교양이 풍부하고 행실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이었다.

부라도프가 어깨를 움츠리며 쿡쿡 웃었다.

"남작 부인도 꽤나 골치를 앓고 있는 모양입니다. 공부할 시간만 되면 어디론가 도망간다더군요."

레이놀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새해를 지나면서 9살이 된 리리샤 공주는 어머니를 닮아 벌써부터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할 만큼 아름답다.

뭔가 말을 꺼내거나 행동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귀족 부인의 발을 밟겠다고 슬라이딩하며 몸싸움을 벌이는 공주는 난생 처음 보았다.

"그 노예 때문일까."

레이놀드는 중얼거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한 번 그 저택에 있는 노예 마리를 처분하려고 한 적이 있다. 미래를 생각할 때 저급 노예가 가까이 있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디에게 막혔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챈 그 아이는, 레이놀드가 와토린구 공작령에 처음 갔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싱긋 웃으며 말했던 것이다.

[언젠가 그곳에 돌아갔을 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그때 그 아이의 눈동자는 뭐랄까, 약간의 색향을 품고 있는 마녀의 주술 같았다. 따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레이놀드는 황궁의 권모술수에서 닳고 닳은 사람이다.

그런 자신이 움찔할 정도였으니 경험이 적은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대답해버렸을 거다.

'뭐, 잘 자라주었지. 그 정도면 능구렁이가 바글바글한 황궁에서도 누군가에게 밀리지는 않을 게야.'

레이놀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궁의 어린 주인이 돌아오는 날은 머지않았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 후계자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

수십 대의 마차가 바리바리 짐을 싸 지붕에 올리고 좁은 절벽길을 내려간다. 마차 앞과 뒤에는 개미 행렬처럼 수많은 병사가 줄을 지어 걸었다.

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눈이 녹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안 그러면 산을 깎아 만든 절벽길은 너무 위험하다.

올 때는 말을 타고 늠름한 모습으로 성에 들어갔던 황제는 모피를 무릎에 두른 채 마차에 앉아 있었다.

말을 못 타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만 무리하면 열이 나서 앓아눕는다.

설사를 자주 하기 때문에 마차 안에는 요강이 놓여 있었다. 시종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황제를 돌본다.

루디는 황제 대신 사람들을 이끌며 타닥타닥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병사들이 얼음 얼은 곳이 있는지 확인하며 일행의 앞을 가다, 미끄러운 곳이 나오면 모래를 그 위에 뿌렸다.

그렇게 해도 가끔 마차의 바퀴가 헛도는 경우가 있다.

루디는 가볍게 고삐를 흔들어 앞으로 나아갔다.

"짐을 잡으려고 애쓰지 마라. 마차가 미끄러지면 사람은 옆으로 빠져!"

루디가 병사들에게 주의를 촉구하며 지나가자, 씩씩한 대답이 여기저기에서 울렸다.

"알겠습니다!"

"네!"

루디의 흑마가 가벼운 발굽 소리를 내며 병사들 옆을 걷는다.

몇 명의 병사의 신발이 미끄러운 것 같다. 얼음판을 만나면 기우뚱하는 사람이 있었다.

거의 모든 병사에게 신발 바닥에는 짚으로 만든 바닥을 붙이게 했는데, 몇 명에게는 그것이 없는 것 같다.

"신발 바닥에 짚을 붙이지 않았나?"

루디의 질문에 긴장한 병사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옆에 있던 병사가 얼른 변명을 한다.

"죄송합니다. 이 친구 잘못이 아닙니다. 짚이 조금 모자랐어요."

루디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짓을 했다.

"너는 안쪽으로 빠져라. 여기에서 떨어지면 그대로 저승행이야. 전쟁도 아니고 산에서 내려오다 떨어져 죽었다고 하면 평생 웃음거리가 된다."

병사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죽음일 것이다.

중간에 아찔한 장면이 있었지만 모두가 무사히 산에서 내려오고, 행렬은 서서히 제국을 향해 나아갔다.

이동 경로와 숙소를 정하는 등의 모든 일은 실무자들이 맡았지만, 결정은 모두 루디를 통해 이루어졌다.

황제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마차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가끔 미소를 짓거나 고개를 끄덕여 자신이 루디의 결정에 만족해한다는 모습을 보였다.

황제에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일행은 천천히 이동했다.

초록이 상큼하게 나무를 물들이고 길가에 꽃이 만발할 무렵, 루디와 일행은 제국의 변방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전과 달리 국경에 근접한 도시에 들리지 않는다. 곧바로 황궁을 향해 나아갔다.

'이제 금방이구나.'

어제 마도구의 CCTV를 보았을 때, 공주는 커다란 나무 둥지 근처에 큰 보자기를 펼치고 뭔가 하고 있었다.

CCTV가 있는 쪽에서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

'대체 뭘 하는 거지?'

황궁에 도착하면 시종을 대동하고 저택에 방문할 수 있다. 조금 들뜬 마음 속에서, 루디는 공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 > 끝

(75)

작가의 말

오타를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완벽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있었는데....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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