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부터 나는... >
#074
저 아래, 지상은 아직 눈이 내릴 시기가 아니다.
하지만 산 정상인 이곳은 체감상 이미 겨울이었다. 성 밖 여기저기에 눈이 조금씩 쌓여있다.
루디는 어깨에 걸친 망토의 앞섶을 여미며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이곳은 산 정상에 지은 성이라 푸테그린 제국의 황궁보다 훨씬 춥다. 두꺼운 모피 외투를 입어도 목으로 바람이 숭숭 들어갔다.
분명히 두꺼운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어째서 복도에 바람이 불고 있는지 모르겠다.
외부의 눈이 없다는 걸 핑계로, 성 내부는 촛불보다 저렴한 횃불이 군데군데 밝혀져 있었다.
횃불이 바람에 따라 흔들흔들 움직여 벽에 큰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음산하다.
루디가 어두운 공간에 하얀 숨을 내뿜으면서 걷는데, 마도병 한 명이 맞은편 긴 복도 끝에서 어수선한 모습으로 걸어왔다.
제국의 황궁에서와 달리, 이 성에서는 신분에 따른 출입 제한이 거의 없다.
황제가 머무는 방 만이 예외일 뿐, 성에는 일반 병사부터 시종, 황제의 보좌관과 소수의 관리들이 수시로 돌아다녔다.
마도병은 루디를 보고 약간 멈칫하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횃불에 비친 얼굴이 약간 불그스레하다. 늦게까지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너무 늦게까지 놀고 있으면 내일 힘들 거야."
"예, 이제 그만 자려고요."
루디의 말에 마도병이 히죽 웃으며 머리를 긁는다. 앞을 여미지 않은 외투 사이로 셔츠가 바지를 삐죽 빠져나와 있는 게 보였다.
'아...!'
성의 별관에는 여자들이 여러 명 살고 있다. 근처 농가에서 데려온 여자가 대부분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세탁과 청소를 위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병사들 상대가 그들의 진짜 일이다.
대신 여자들에게는 평범한 하녀에 비해 몇 배의 임금이 지급되었다.
황제와 시종 몇 명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루디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완전히 아이 취급이다.
'뭐, 이미 다 알고 있지만.'
루디는 쓴웃음을 짓고 마도병의 곁을 지나쳤다. 아직 어린 모습이 남아있는 마도병은 허둥지둥 바지를 추켜올리며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정신연령으로 보면 여자들에게 마음이 끌려도 이상하지 않지만, 몸이 아직 어려서인지 여자와 접하고 싶다는 욕망은 아직 거의 없다.
자신이 생각할 때는 변한 게 거의 없는 것 같은데, 역시 이 몸으로 들어오면서 뭔가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았다.
어느새 황제의 방 앞이다.
육중한 방문 앞에 시종이 한 명 서 있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이 공손히 절을 하며 문을 열었다.
방 안도 복도만큼이나 어둡다. 다른 조명은 모두 꺼지고, 낮은 테이블 위에만 삼지창처럼 생긴 촛대가 놓여 있었다.
황제는 그 앞, 짐승 털을 씌운 의자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 있었다.
촛불이 어른거리며 황제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를 만든다. 움푹 꺼진 볼과 광대뼈가 음산해 보였다.
"이리로!"
황제가 작게 손을 흔들어 루디를 불렀다.
테이블에는 황제가 평소 마시는 와인과 루디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음료수가 놓여 있었다.
"벌써 삼 년째인데도 매년 춥구나. 나도 많이 늙었어."
황제가 히죽 웃으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너도 마셔라. 시종장이 너를 위해 일부러 보낸 것이다. 작년에 만들어 두었다더구나."
음료수는 이국의 과일을 설탕과 꿀에 재어 보관했던 것을 곱게 갈아 물과 섞은 것이다.
과일 주스라고 말해버리면 쉽지만, 이 과일은 구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지구의 귤이다.
약간 맹맹한 주스를 홀짝홀짝 몇 모금 마셨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국에는 공작가가 몇 곳 있지. 하지만 그 공작가 말고도 몇몇 공작 작위가 있는 것을 아느냐?"
"아니요. 보리스님에게 배운 것은 현재 제국에 존재하는 가문뿐이었습니다."
"그래, 거기까지는 아직 배우지 못했을 거다. 일반인은 잘 모르는 거지. 하지만 어느 정도 작위에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게 어떤 건지 아는 작위가 있다."
황제가 히죽 웃었다.
"황태자만이 받는 작위지. 황태자 책봉과는 별도로 후계자가 되면 받을 수 있는 작위가 몇 개 있단다."
"...."
"지금의 황태자에게는 그 작위를 내리지 않았다. 드물게 작위 없이 황위를 계승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다들 조금 이상하다 생각만 하고 넘어갔지."
황제가 지그시 루디를 보았다.
"하지만 그 작위는 오직 후계자만이 받는 것이다. 후계자로 낙점 받지 않는다면 절대로 받을 수 없지. 그걸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고위 귀족의 당주는 모두 알고 있단다."
황제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손을 맞잡아 깍지를 끼웠다. 진지한 얼굴로 루디를 보고 묻는다.
"돌아가면 너에게 그 작위를 내리려고 한다. 받아들이겠느냐?"
드디어 그날이 왔다.
루디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예, 폐하."
"그 작위를 받는 순간, 너는 모든 사람에게 다음 황제라는 사실을 드러내게 된다. 물어뜯으려고 덤비는 자가 한둘이 아닐 거야. 감당할 수 있겠느냐?"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누르겠습니다. 그래도 반발한다면 저는 예외 없이 철저히 배제할 겁니다."
루디는 똑바로 황제의 눈을 보았다.
그의 말에는 황후나 황태자, 혹은 그 뒤에 있는 사람에게도 반발하면 적대하겠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래도 나를 막지 않겠습니까, 나를 허용합니까, 라고 황제에게 묻는 것이다.
황제는 어깨를 움츠리고 후후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의 각오도 없다면 버틸 수 없지. 네 뜻대로 해라. 나는 네가 무슨 결정을 내려도 막지 않을 테니."
와인잔을 들어 천천히 마시는 황제의 손가락이 가느다랗다.
황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무릎에 와인잔을 놓았다.
"내 생명은 길지 않다. 너를 오랫동안 지켜줄 수 없어. 너는 스스로 네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보리스님과 당신께 배운 모든 것이 그걸 위함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어요."
루디의 말에 만족한 것 같다.
황제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너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마. 미리 조작된 엉터리 기회는 주지 않는다. 누구의 눈에도 네가 뛰어난 전사요 우두머리라는 걸 보여. 모든 사람의 주둥이를 납작하게 만들어라."
"기대에 부응해 보이겠습니다."
그 뒤에는 약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이 밝으면 시작될 사냥과 마도병의 이야기, 약간은 나이보다 이른 여자 이야기까지.
황제는 기분이 좋은지 평상시보다 말을 많이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림자처럼 벽에 몸을 붙이고 서 있던 시종이 다가와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폐하, 이제 취침에 들 시간입니다."
"아아, 벌써 그렇게 되었나. 늙은 뒤부터는 밤에 잠이 많아졌다."
황제가 작게 웃자, 시종이 맞장구를 쳤다.
"저도 그렇습니다. 나이가 드니 아무래도 밤에는 눈이 침침해지더군요."
황제의 얼굴에 피로가 쌓여있다.
루디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자 들어갈 때 문밖에 있던 시종이 공손히 절하며 말을 걸었다.
"폐하께서 내리는 의복과 장신구가 있습니다. 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남은 몇 달 동안 몸에 익숙해지도록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살펴보시겠습니까?"
"그럴까요."
"이제 말을 놓아주십시오, 루디님. 이 방에 들어가실 때와는 신분이 달라지셨습니다."
"...그래."
시종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는 젊어서부터 계속 후계자 문제로 마음을 닳아 하셨지요. 루디님을 만난 이후 많이 편안해지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시종은 루디를 황제의 옆방으로 안내했다.
이곳에 온 뒤로 루디는 계속 마도병과 같이 지내왔다. 이 공간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 발 안으로 들어선 루디의 눈이 동그래졌다.
방에는 루디의 키에 맞는 옷과 모자, 신발은 물론이요, 칼과 보석 장식 등 갖가지 물건이 들어서 있었다.
언제 이런 물건을 다 준비해둔 걸까. 항상 황제와 붙어있다시피 했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쪽은 사냥이나 전쟁에 나갈 때 입는 옷입니다. 불편하지 않도록 장식은 최소화했지만 권위는 보일 수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시종이 여러 구획으로 나누어져 있는 장소 중 한 곳으로 루디를 데려갔다.
"내일은 어떤 옷으로 할까요?"
"그건 그대가 알아서 선택해 줘."
"알겠습니다. 내일 타실 말과 잘 맞는 색으로 골라 놓겠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레빈 외에도 시종이 한두 명 더 모시게 되었습니다."
"알았다."
루디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시종이 빙그레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루디님은 오늘 부터 이 옆방에서 거하시면 됩니다."
"...."
시종의 안내로, 연결되어 있는 문을 열고 다음 방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침대와 화려한 가구가 놓인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황제의 방보다 화려하다.
"제국에 돌아갔을 때 익숙해지기 위해서 루디 님의 방과 의복은 저쪽에 맞추었습니다. 평상시에 어떤 생활을 하는지는 은연중에 모두 드러나는 법이니까요."
시종이 은근한 미소를 띠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루디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저희의 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말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는 잠시 뒤에 알게 되었다.
옷을 입고 벗는 것은 물론이요, 화장실에 가거나 요강을 사용하고 목욕할 때 피부를 닦는 것까지 모조리 시종이 손을 댔다.
황제의 생활을 옆에서 볼 때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데, 사소한 하나까지 모두 남의 손을 빌려 산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잠이 들 때까지, 단 몇 시간 시중을 받았을 뿐인데 정신적으로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시종은 루디에게 긴 셔츠를 입히고 침대에 눕는 것까지 일일이 도운 뒤 불을 낮추었다.
실내에는 침대에서 먼 곳에 있는 촛불 하나만 남았다.
당연히 나갈 거라고 생각한 시종이 구석으로 가 벽 쪽에 등을 대고 선다.
루디가 바라보자, 시종이 고개를 약간 숙이면서 말했다.
"불편하실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부터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시종이 루디 님의 취침 시에도 곁에 붙어 있을 겁니다."
"...."
그러고 보니 황제가 잘 때는 더 많은 시종이 곁에 있었다. 어쩌면 황제가 되어 정적과 싸우는 것보다 이런 사소한 면이 정신을 더 갉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 루디는 평소처럼 잠에서 깨어나다 깜짝 놀랐다. 바로 눈앞에 시종의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죄송합니다. 놀라셨습니까."
시종이 몸을 약간 뒤로 물리며 말했다.
"일어나실 시간이 되어 알리려고 했습니다만, 루디 님은 그럴 필요가 없으시네요."
시종이 은대야를 가져와 침대 옆 쇠로 된 받침대에 놓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루디를 일으켜 세운다.
세수를 하자 옆에 서 있다 곧바로 부드러운 천을 내밀었다. 닦고 나면 곧바로 머리를 빗기고 옷을 입힌다.
뭔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루디가 움직이는 동선 그대로 시종이 먼저 움직였다.
옷을 다 입자, 시종이 무릎을 굽혀 신발을 신겼다.
조금 늦게, 루디는 아, 이 사람은 어제의 그 시종이 아니었지, 라는 생각을 했다.
얼굴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인식하고 있었는데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깨닫는 것이 늦었다.
시종이야말로 닌자들이 사용했다는 인술을 몸에 익히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루디의 차림새와 시종들의 태도가 변한 것으로, 거의 모든 병사들이 그가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특히 3년간 함께 동고동락한 마도병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덕분에 그날의 사냥은 이곳에 온 이후 최고의 성적을 올렸다.
들뜬 마도병들과 함께 갓 잡은 동물의 피를 빼고 내장을 제거한다.
전쟁에서 혼자 적진에 떨어지더라도 구조팀이 닿을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보리스는 숲에서의 생존 기술도 가르쳤다.
배운 대로 운반하기 좋게 고기를 자르면서, 문득 황궁에 있는 리리샤 공주를 떠올렸다.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할 수 있는 한 행복하게 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면 상처받는 일도 많을 것이다.
언젠가 먼 훗날이 되면, 리리샤 공주는 이런 결정을 내린 자신을 원망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을 붙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어린 그 아이의 얼굴이 왠지 뒤통수에 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 오늘부터 나는... > 끝
(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