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의 마도병 >
#073 황제의 마도병 ()
가끔 보리스의 성격은 정말로 나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잡으려면 처음부터 때려잡는 게 낫다.
괜한 희망을 갖고 바보처럼 걷고 또 걷고, 발이 부르트도록 미련하게 걸었는데, 동이 트기 직전에 밀어닥치는 것은 대체 무슨 심보인지.
루디와 병사들은 동트기 전의 캄캄함 속에서 요란한 함성을 들었다.
보리스 팀이다.
루디는 그제야 보리스가 자신들을 사냥감처럼 차근차근 몰아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정말 성격 나쁜 사람이야.'
루디는 입술을 꾹 다물고 무디게 처리된 창을 들었다.
레빈이 루디 바로 앞에 버티고 섰다.
병사 한 명은 루디 바로 뒤에 등을 대고 선다.
나머지 병사들이 도주로를 만들기 위해 막 뛰쳐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뭔가 이상하다.
왜 그들은 덤벼오지 않지?
피곤에 절었다고 봐줄 인간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때가 기회다 싶어 몽둥이로 두들겨 팰 사람들이었다.
한데 왜 덤비지 않아?
"기다려!"
루디는 막 뛰쳐나가는 병사들을 불러 세웠다.
앞으로 몸을 내밀던 병사 한 명이 급히 멈추면서 바닥에 고꾸라졌다.
"함정이다. 우리가 피곤해서 생각하지 못할 때를 기다린 거야."
루디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레빈이 몸을 돌렸다.
가려던 반대 방향을 향해 벼락같이 땅을 박차고 몸을 솟구친다.
레빈은 창 두 개를 번갈아가며 휘둘러 나뭇가지를 치고 순식간에 저만치 나아갔다.
"됐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레빈의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루디와 병사들이 그쪽으로 달렸다.
함성이 오던 방향에서 이번에는 무수히 많은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화살촉은 없지만 맞으면 아프다. 눈이라도 잘못 맞으면 실명하게 되고 만다. 꼭 눈이 아니어도 머리 뒤통수 역시 잘못 맞으면 죽을 것이다.
역시 저 노인네들, 그냥 모의전을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분명히 뭔가 억하심정이 있는 거야.
화살로 되지 않으니, 이번에는 창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얕은 숲속인지라, 나뭇가지 때문에 시야가 확 트이지 않은 게 다행이다.
정신없이 도망쳤지만, 이번에는 몇 명이 옆에서 덤벼들었다.
적과 엉겨 붙는 동안 어느새 해가 떠버렸다.
어스름히 떠오르는 해를 맞아 사람들의 모습이 슬슬 눈에 들어온다.
루디 팀의 어린 청년들은 싸움을 포기하고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루디도 힘이 다해 주저앉았다.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내려와 코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이번에는 완패했다.
루디 팀은 적이 항복을 하지 않는 이상, 동이 트는 순간 함께 있으면 패배로 간주된다.
"빌어먹을!"
누군가가 분한 듯 중얼거리면서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보리스 팀이 약을 올리듯 둥둥 둥둥, 작은북을 치기 시작했다. 나무를 사이에 두고 사방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아아, 정말 저 사람들은 성격이 안 좋다.
다음번에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고 속으로 맹세했다.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터덜터덜 돌아가는 길에, 오늘 모의전을 끝으로 더 이상의 훈련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
'어쩐지...'
다른 때와 달리 이번에는 이상할 만큼 속임수를 많이 쓴다는 생각은 했다. 마지막이라 다음에 들킬 염려 없다 싶어서 원 없이 속아 넘긴 모양이다.
보리스와 늙은이들이 함께 나란히 걸으면서 하하 웃고 있었다.
***
지난 3년 동안, 황제와 루디는 와토린구 공작령의 본성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머물렀다.
본성은 루디가 탈출할 때 폭발해 흉물스러운 잔재만 남았기 때문이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그 잔해는 여전히 똑같은 형태로 남아있었다. 디코콰리아에는 그걸 치울 사람도, 여력도 없었다.
루디가 이 나라에 들어온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지도 아래, 루디는 와토린구 공작령 전역을 돌아다니며 영민을 만나고 영지 경영에 참여했다.
상당한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가난 구제는 나라님도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고작 몇 년 애썼다고 공작령이 갑자기 부유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굶어 죽어가던 사람이 약간 줄어들고, 농작물 수확이 조금씩 궤도에 올라간 정도다.
거기에 더해 공작령 각지에서 영민의 피를 빨아먹던 인간들을 축출하고 도적을 사냥했던 것이 다였다.
황제와 보리스는 그 정도를 가지고 엄청난 거라며 극찬을 했다. 더 이상은 가르칠 게 없을 정도라던가.
그러나 루디는 실제의 아이가 아니다. 심지어 지구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바란 것은 더 컸다.
한참을 걷던 루디는 문득 가을의 싸늘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매 한 마리가 높은 하늘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루디의 병사 한 명이 곁으로 오더니 하늘을 손가락질했다.
"루디님! 황제 폐하의 매네요. 저희를 알아보았나 봅니다."
뒤에 있던 다른 병사가 걸음을 빨리해서 루디 곁으로 가까이 왔다.
"폐하께서 기다리시나 봐요."
"아, 서두르자."
루디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와 함께 모의전을 하며 동고동락하고 있는 병사들은 전원 마도병 훈련생이다.
일반 병사에서 마도병이 된 경우도 있고, 처음부터 마도병으로 뽑힌 사람도 있었다.
공통점은 모두 황제를 우러러본다는 점이다.
무리도 아니다. 황제는 그들에게 상냥한 모습, 좋은 점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황제는 그들을 통해 루디에게 사람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몸소 보여준다. 그것도 3년이나 가짜 모습을 지속하면서.
'정말 대단하기는 해.'
루디는 쓰게 웃으며, 조금만 몸을 기우뚱해도 떨어져 버릴 것 같은 절벽길을 따라 올라갔다.
여름 별장은 공작 소유의 성 중에서 가장 작은 곳이다. 동시에 가장 험난하고 공격이 어려운 성이기도 했다.
여름 별장은 암벽처럼 깎아지른 듯한 산 위에 지어져 있다.
성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하나밖에 없는 절벽길을 올라가야 한다.
마차가 빠듯하게 두 대 지날 수 있는 길이 가장 큰 도로이고, 밑에서 위로 가까이 갈수록 점점 길이 좁아졌다.
결국 마차 한 대 지나가면 끝인 길이 구불구불 산을 타고 빙글빙글 이어져 꼭대기의 성까지 닿아 있었다.
길이 좁고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대규모의 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일 수 없다. 개미 행렬처럼 줄을 지어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도병은 이 세상에서 그런 적을 먼 거리에서 사살할 수 있는 유일한 군대다.
수십 명에 불과한 마도병이야말로 푸테그린 제국을 아무도 넘보지 못하게 하는 진짜 이유였다.
어떤 왕이나 귀족도 자신이 대장으로 전장에 섰을 때 가장 먼저 죽고 싶지 않으니까.
마도병은 이 세상의 유일한 저격병이었다.
*
루디와 병사들이 성에 도착하자 때를 같이해 매도 높이를 낮추어 아래로 내려왔다.
시종이 가죽 보호구를 한 팔을 뻗자, 매가 그 위에 앉는다. 시종은 매가 올라앉은 팔을 공손히 황제의 앞으로 향했다.
가마에 탄 채 두터운 담요를 무릎에 덮고 있던 황제가 매를 칭찬하며 생고기를 그 입에 내밀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황제가 고개를 돌려 루디와 마도병들을 보았다.
"모두 수고했다. 보리스가 먼저 사람을 보냈지. 흠씬 두들겨 맞았다고?"
3년 사이 훌쩍 꺼진 뺨을 일그러뜨리며 황제가 웃는다.
한때 통나무 같던 황제의 뚱뚱한 몸은 형편없이 살이 빠져 홀쭉해졌다. 움푹 들어간 눈 밑은 그의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눈빛은 맑고 깊다. 점점 눈동자가 투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언젠가 한 번 보리스가 중얼거린 적이 있다.
[사람은 죽기 전에 눈동자가 투명해지지. 내 주인께서 돌아가시기 전 일 년 동안은 마치 전설의 현인이야말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만큼 영롱하셨다.]
그리고 죽기 직전이 되면 그제야 눈동자의 빛이 사라지는 거라고, 보리스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황제 자신도 그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루디를 옆에 끼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르치고 싶어 했다.
루디는 고개를 숙여 절을 하며 빙긋 웃었다.
"마지막에 사정없이 당했습니다."
"하하. 좋아, 좋아. 뼈 부러진 녀석이 없으면 그걸로 훌륭한 거다. 너희들 실력으로 보리스는 아직 무리지. 그한테 딸려 있는 병사들은 모두 역전의 용사라 불리던 자들이야."
황제의 유쾌한 웃음에 마도병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억울한 것 같다.
황제가 빙그레 웃으며 손짓해 마도병을 불렀다.
"날이 추운데 고생했다."
힘줄이 돋아난 손으로 마도병의 손을 잡아 툭툭 쳐주더니 작게 속삭였다.
"내일은 설욕전이다. 마도구를 손에 쥔 너희들은 천하무적이지. 마음껏 뛰어다녀라."
"옙! 폐하!"
마도병이 씩씩하게 대답하자, 황제가 다들 안으로 들어가라고 손짓을 했다.
"뜨거운 스튜와 술이 준비돼 있다. 어서 들어가 먹고 쉬어."
"감사합니다!"
마도병과 늙은 병사들이 모두 들어가고, 황제와 루디, 그리고 보리스와 레빈 등 몇 명만 남았다.
"내일의 사냥은 기대하고 있다."
황제가 조용히 말하며 웃었다.
내일은 마도병 훈련을 겸해 사냥을 나가는 날이다. 보리스 팀과 사냥감 숫자로 겨루게 되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사냥한 동물은 일부를 남기고 대부분 영민에게 하사한다.
공작령에 있는 거의 모든 숲은 평소 일반 평민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숲은 대부분 왕이나 귀족의 것이기 때문이다.
평민은 정해진 날, 허락받은 사람만 숲에 들어가 허용된 만큼의 장작을 주워올 수 있었다. 때로 사냥도 허가되지만 극소수다.
그리고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세금을 내야 했다.
황제는 그런 사정을 감안해서 훈련을 겸한 사냥 뒤에는 상당수의 고기를 영민에 나눠준다.
덕분에 황제와 루디의 인기는 나날이 오르고 있었다.
시종 두 명이 가마를 들어 올려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고, 루디가 그 옆을 따라 걸었다.
"병사들과는 충분히 친해졌느냐?"
"예, 폐하."
"그래, 마도병은 황제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소중히 하라."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 좋은 일이다. 아주 좋아."
황제는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와인을 챙겨 들고 있던 시종이 약간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올려 황제의 앞을 꼭꼭 여몄다.
황제와 루디는 서로 간의 생각을 대강 알고 있다.
처음에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던 황제도 시간이 흐르면서 루디가 모두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고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병사들 앞에서도 완전히 후계자 취급이고, 이 성에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안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 황제와 루디가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뭔가에 입이 막힌 것처럼 그저 조용히 서로의 마음을 탐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구체적으로 황제가 어떻게 할 생각인지, 루디는 아직 모른다.
확실한 것은 단지 자신을 후계로 삼을 예정이라는 것과 필연적으로 황태자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는 사실뿐이었다.
가마가 움직일 때마다 황제의 몸이 약간 흔들렸다.
산 정상이라 바람이 매섭다.
황제가 담요 속으로 몸을 웅크려 넣으며 작게 말했다.
"루디, 오늘 저녁에 내 방으로 오너라."
"...예."
드디어 확실하게 선을 그을 모양이다.
문득 매와 시선이 마주쳤다.
무기질 같은 동그란 눈이 루디를 쏘아보았다.
마치 물러설 생각이라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
한 번 저쪽으로 넘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황후와 황태자, 혹은 그 뒤에 있는 귀족들까지 모조리 적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위험해지는 것은 루디뿐만이 아니다.
나디아그라 비와 리리샤 공주가 더욱 취약한 먹잇감이 될 것이다.
황제의 지금까지 행동으로 보아, 루디의 짝은 황후나 다른 비빈의 공주가 아니라 리리샤 일 테니까.
가장 힘없고 가장 연약한 존재라 그들이 뽑혔다.
황제의 가마는 루디를 남기고 조용히 멀어져 갔다.
루디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병사들이 기다리는 식당으로 가야 한다.
마도병은 황제의 가장 소중한 병력.
현재 루디의 곁에 있는 훈련병은 미래를 위해 황제가 붙여준 보석이다. 누구의 눈에도 루디가 강한 군주로 보이도록 해주는 커다란 금빛 갑옷이었다.
그들과의 연결이 강하면 강할수록 루디에게 힘이 실릴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눈에 잘 띄는 게 필요해.'
루디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문득 어깨가 따뜻해졌다.
보이지는 않지만 불새가 내려앉은 모양이다.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 와토린구 공작령의 경비대장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녀의 약은 문장과 검은 머리를 감추어 주니, 당분간은 신분을 숨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마력이 오르면 효과가 사라집니다. 마녀의 말에 의하면 보통 20세 전후가 될 것 같지만, 더 이를 수도, 늦을 수도 있습니다.]
몸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마력의 힘이 가끔 손끝으로 튀어 나간다. 어떤 때는 새치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한 가닥 나올 때도 있었다.
경비대장은 20세 전후라고 했지만, 머지않았다.
루디는 히죽 웃었다.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이 불새가 보이지 않는 부리를 뺨에 대고 콕콕 쪼았다.
< 황제의 마도병 > 끝
(73)
작가의 말
죄송합니다. 이제 저녁 11시라는 연재시간은 없는 것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분간 쓰면 올리는 자유연재로 하고 조금 안정되면 다시 밤 11시로 돌아가요. 죄송합니다.
***
지금 확인했습니다.
제가 스크리브너라는 프로그램에서 vs code라는 프로그램으로 갈아탄 뒤, 맞춤법 확장 프로그램을 깔고 마지막으로 체크했습니다.
한데 몇 번 해봐도 맞춤법이 안되는 것 같았습니다만.....이게 자기 마음대로 색깔변형이나 고칠 단어 보여주는 것 없이 모두 바꿔버린 모양입니다.
저는 맞춤법 체크 할때 일일이 수동으로 고칩니다만, 이게 자동으로 모두 바꿔버렸어요. 안된 건줄 알고 하던대로 인터넷으로 맞춤법을 틀린것만 확인하고 올렸는데, 올리고 읽어보다 보니 뭔가 이상해서.....나중에야 원인을 알았습니다.
지금 다시 한 번 읽으며 확인하고 있는 중입니다.
죄송합니다.
***
11/17 오타를 수정하였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