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96화 (196/227)

< 상어는, 결국 바다에서 죽는다 (3) >

노래가 끝난 무대에는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그 다음 순간, 박 상무는 눈을 번쩍 떴다.

‘!’

사방이 들끓는다.

휘파람, 환호, 박수가 관객석에서 솟구쳤다. 마치 천둥 같다. 관객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었고, 멋진 연기를 보여준 사자와 동료들을 위해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저렇게 완벽할 수가 있지? 저거 진짜 요정 아니야?”

바보 콤비는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넋 나가 있던 감독이 팔뚝을 덮은 닭살을 연신 문지른다.

“소름 돋네··· 저런 목소리라니.”

박 상무 역시 이도 저도 못하고 무대만 바라볼 뿐이었다.

쉴 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아이들 손을 맞잡은 이시현이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환히 웃는 게 보인다. 그 맑은 미소를 보고 있으니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무대였지만 그 위에서 이시현이 보여준 혼신의 연기, 사람들의 반응.

모든 게 혼란스럽다. 적응이 안 된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숱하게 겪은 혼잡함에 왜 이렇게 가슴이 뭉클한 걸까.

“나 요정 손 잡을래!”

“나도!”

“내가 잡을 거야. 사랑해, 요정!”

얼마나 봤다고 저렇게 달라붙을까 싶지만, 이시현은 다리에 달라붙은 아이들을 한 명 한 명 껴안아 줬다. 까르르 웃음, 환한 얼굴들 앞에서 이시현은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모들과 선생님들이 그 모습을 바라본다.

신뢰 가득한 시선으로.

「서울」

커피잔이 접시 위에서 달그락거렸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한 팀장은 잔에서 손을 떼는 차 대표를 눈에 담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시나.’

요 며칠 차 대표는 볼 때마다 찌푸린 얼굴이었다. 명치에 뭐라도 얹힌 마냥 불편하고 언짢아 보였다. 하긴, 요즘 분위기가 좀 그렇지만.

차 대표가 눈을 찌푸리며 속삭였다.

“상황이 심상치가 않아.”

“근데 검찰 쪽은 크게 움직일 생각은 없는 것 같고, 그냥 적당히 여론 분위기를 보다가 넘어갈 것 같은데요?”

최근 연예계 PR비 관련해서 언론이며 시민단체며 꽥꽥대고 있었다. 수고했다고 향응 좀 베푼 게 뭐 그리 큰 문제라고.

“상황은 그런데, 사람 일 모르는 거지. ATTM이야 한 팀장이 잘하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해.”

차 대표가 라이터를 손에 쥐고 쓴웃음을 지었다.

“문제는 이시현인데,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걱정할 필요 있나요. 곧 올 텐데.”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지나, 한 팀장은 벽에 걸린 달력을 보며 날짜를 헤아리고 말했다.

“아시아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통할 리가 없잖습니까.”

“그래, 아무리 연기력이 뒷받쳐줘도 가능한 게 있고 불가능한 게 있는 거지. 하지만 말이야··· 그거라면 달라.”

담배 연기 사이로 비친 차 대표 눈빛이 매섭다.

“그거요? 그게 뭔가요?”

“목소리.”

“시현이가, 음악으로는 미국에서 통할 것 같다 이 말씀입니까?”

한 팀장은 웃음소리를 간신히 삼켰다. 그러자 재떨이에 담배를 짓이긴 차 대표가 구겨진 이마를 들고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한 팀장··· 정말 모르겠어?”

**

“시현 오빠!”

“이시현!”

뒤섞인 인파 속에서 애타게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린다.

박 상무가 차 키를 꽂다 말고 나직이 속삭였다.

“교민들인가 보네.”

무대에서는 관객석이 한눈에 보인다. 나를 위해서 열정적으로 환호하고 응원해준 팬들을 기억하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안전띠를 풀었다.

“야 시현아!”

“팬들이 왔으면 당연히 얼굴을 보여줘야죠.”

박 상무의 만류에도 얼른 차에서 내렸다.

“오빠오빠!”

“시현 오빠!”

차에서 내리자 팬들이 방방 뛰며 다가왔다. 많진 않지만, 오히려 적은 인원이어서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배우 이시현입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큰 목소리로 팬들에게 인사했다.

“오빠, 미국에 언제 오셨어요?”

“우리 라스베거스 거리공연도 봤어요!”

“연극 정말 재밌었어요, 오빠 연기 짱이예요!”

“목소리는 완전 국보급!”

아이고 숨넘어가겠네.

“저 어디 안 가니까, 천천히 얘기하세요.”

박 상무한테는 미안한데, 일부러 사인도 천천히 했다.

팬들과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북적거림은 끊이질 않았다. 잠시나마 여기가 한국이라고 착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지금도 회사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팬들을 생각하니 괜히 미안해진다.

“그럼 나중에 또 봐요.”

다시 인사를 하고 차에 오르려는데, 멀리서 금발의 여자가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 손을 잡고 뛰어오는 게 보였다.

“시현아 늦었다니까.”

하지만 한 사람만 더.

“3분만요.”

내게는 평소와 같이 흘러갈 그 3분이 누군가에는 잊을 수 없는 시간이 된다. 그리고 소중한 추억이 되겠지. 그걸 잘 알기에 기다림은 당연했다.

여름 바람을 등에 업은 덕인지 두 사람이 한달음에 내 앞에 도착했다.

“하··· 하······.”

금발의 여자는 숨이 차서 허리를 펴지 못했지만, 아이는 작은 턱을 들고 나를 올려다봤다. 이런. 이마에 땀이 가득하다. 젖은 이마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붙었다.

“안녕.”

나는 손을 뻗어 아이의 이마를 정리해주고 미소 지었다.

“정말··· 정말··· 시현 오빠 맞아요?”

“그러는 너는, 정말 내 팬 맞아?”

웃으며 농담을 건넸더니 아이가 숨죽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꾹 다문 아이 입술에 눈물방울이 스며들어서, 나는 손을 뻗었다. 아이의 볼을 닦아주었다.

“왜 울어? 바보같이.”

“너무 기뻐서······.”

얼마나 좋길래 눈물이 날 정도일까.

그게 궁금해서, 고맙고, 또 미안해서.

그래서 나는 한참을 아이의 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 소중한 팬.

**

“세상에 난 그런 거 처음 봤다니까! 여자애가 시현을 보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거야. 너도 봤지 로돌포?”

“응. 애니메이션 한 장면 같았어.”

“애니메이션은 무슨! 마치 영화 같았다니까? 청춘 로맨스 영화 말이야!”

신나고 들뜬 목소리들이 정신없이 맴돌았다. 바보 콤비는 이시현 얘기에 열을 올리느라 공연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공원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저 상태를 유지 중이다.

“아니 공연이 그렇게 대단했단 말이야?”

매니저가 고개를 갸웃한다. 의자에 쫙 뻗은 다리를 올린 채로 홀짝이던 맥주를 내려놓더니, 박 상무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턱짓했다.

“미스터 박, 시현이 한국에서 노래도 했다는 거, 그거 진짜였어?”

“속고만 살았나.”

박 상무는 대충 대답하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연기에 노래에, 한국에서는 그런 일이 흔한가 봐?”

흔할 리가 있나.

“혹시 시디 가진 거 있어? 한번 들어볼 수 있을까?”

“시디가 뭔 필요야. 시현한테 직접 들으면 되지.”

클린턴이 반색하며 끼어들었다.

입에서 맥주병을 뗀 박 상무가 미간을 찌푸린다.

“공연 준비 안 해?”

“오늘 공연은 펑크. 내일 아침 바로 아이오와로 출발할 거야. 준비해둬.”

매니저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듣자니까, 시현이 LA에서 오디션을 계속 봤었다며?”

“그랬었지.”

하지만 페이 프로덕션이 이런 식으로 방해할지 알았다면 처음부터 미국은 오지 않았을 거다.

“뮤직비디오 촬영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갈 거지?”

“그래야지. 할 일이 많으니까.”

몬스터와의 합작프로젝트뿐만 아니라, CF 연장 계약, 예능 출연, 팬 미팅까지. 한국은 이시현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럼, 기사 같은 것도 나는 거야? 미국에서 뭘 했는지. 오디션을 봤다거나, 뮤직비디오 촬영을 했다거나.”

“글쎄. 그건 상황을 봐야 하지 않을까?”

소득 없는 오디션, 무명의 밴드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사실이 이시현에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럼 만약에 말이야, 우리 뮤직비디오 출연 소식이 기사로 나가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매니저의 진지한 질문에 박 상무는 입맛을 다셨다.

갑자기 비즈니스적인 얘기가 나오니 대충 대답할 수가 없었다. 창가에 앉아, 맥주병을 흔들며 속삭였다.

“모두가 궁금해하겠지. 대체 어느 밴드인지 말이야. 그리고 찾아보겠지.”

“모두? 모두가 몇 명이나 되는데?”

그 질문에 박 상무는 클린턴을 돌아봤다.

“클린턴. 오늘 공연장에 사람이 몇이나 있었던 것 같아?”

“글쎄. 한 6, 7천 명은 되지 않았을까?”

박 상무는 피식 웃고 다시 물었다.

“한국에서 시현이가 팬미팅 콘서트를 열었을 때 몇 명이 왔는지 알아?”

다들 눈을 기울이고 쳐다본다.

“5만 명.”

넋 나간 사람들은 내버려 두고, 그는 혼자 방을 나왔다.

하지만 이시현에게 가지는 않았다.

배우는 연기가 끝나면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무대에서 벗어나서 일상으로 돌아올 시간 말이다. 하물며 오늘처럼 오랜만의 무대, 오랜만에 집중한 날은 더욱더.

“하.”

구름 한 점 없는 환한 달빛 아래서 착잡한 한숨을 뱉었다.

LA의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결정을 내려야 할 시기였다. 그런데도 지금 그가 고민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부스럭.

주머니를 뒤적여 꺼낸 것은 명함이었다.

‘채널 H 총괄 프로듀서 에이미 스콧.’

이시현이 차에서 내려 만난 마지막 팬.

그 아이의 고모라는 사람이 준 명함이었다.

“하필 지금에 와서.”

단순히 명함 한 장이라기에는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이것이 과연 이시현에게 기회가 될 수 있을까?

또 다른 실망과 허무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왜 지금에 와서 이런 기회가 온 걸까? 운명의 장난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지만, 무엇보다 망설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가 이시현에게 제안한 것은 오디션도, 캐스팅 제안도 아니었다. 어떤 프로그램의 합류를 제안했다.

‘저는 곧 채널 H를 떠나서 폭스에서 일할 거예요.’

‘폭스?’

‘최고의 프로그램을 론칭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어느 정도 기획은 잡힌 상태고, 내년 여름 편성도 잡혀있어요. 애초에 그것 때문에 폭스로 넘어가는 거니까.’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답은 실망이었다.

‘비밀이지만 알려주죠. 오디션 프로그램이에요. 목표는 최고의 가수.’

가수라니.

할리우드에 도전하기 위해 미국에 온 이시현인데.

그런데 오디션 프로그램이라고? 심지어 론칭을 앞둔 프로그램?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남은 시간도 그렇고 론칭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설사 된다 해도 이슈메이커용으로 전락할 수가 있다.

여기가 어떤 나라인데.

그동안 이시현이 오디션장에서 겪은 인종차별도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이시현은 늘 웃었다. 그 아픈 쓴웃음을 더 지켜보라고?

“안 될 말이지.”

박 상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련 없이 명함을 구겨 바닥에 버렸다. 달을 등지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프로그램 제목이 뭐였더라. 아이돌 어쩌고 했었는데.

“아메리칸··· 아이돌?”

**

-그 동양인이 한국에서 제법 유명하다고?

“그렇다니까, 소름 돋았다니까!”

-알았어. 그럼 자료 좀 찾아보고 계약서 준비할게.

“서둘러. 다른 데서 채가기 전에.”

전화를 끊자마자 차 문을 연 에이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바람에 흩어지는 흙먼지, 휑한 도로, 허름한 모텔 전경이 그녀를 반겼다.

“명함을 줬으면 연락을 줘야지 말이야··· 응?”

차에서 내려 발을 내딛던 그녀가 순간 멈칫했다. 구둣발에 차인 종이뭉치를 주운 그녀의 얼굴이 구겨진다.

“내 명함을··· 버린 거야?”

감히 스콧 에이미의 명함을?

기가 차서 성큼 모텔로 들어간 그녀는 로비에서 마주친 주인의 얘기에 다시 헛바람을 뱉었다. 그들은 이미 덴버를 떠난 뒤였다.

**

「8월 19일 시카고」

“수고했어!”

거리에서 몽타주 촬영이 끝나고 촬영팀은 카메라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는 잠시 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벤치에 기댔다.

미국에 올 때 들고 온 팬레터를 꺼내면서, 문득 레드록스 공원에서 나를 보고 눈물을 글썽이던 팬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말··· 정말··· 시현 오빠 맞아요?’

그 밤 이후 그 아이 눈빛이 계속 아른거린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LA 한인회에서 어떻게 알고 행사 요청을 해온 적이 있다. 물론 정중히 거절했지만.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내가 이기적이었지 않나 싶다.

미국에 있는 팬들도 나를 볼 자격이 있거늘. 아니지, 내가 먼저 찾아갔어야지.

부스럭.

팬레터를 펼치기에 앞서, 나는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만지고 있는 뮤직비디오 감독과 스태프를 바라봤다. 이제 촬영도 막바지. 밴드가 시카고 공연을 마치면 다음은 뉴욕이다. 그곳에서의 촬영을 끝으로 내가 할 일은 더는 없다.

그럼 다시 LA로 돌아갈 테고,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남은 시간은 열흘.

어떻게 할까.

LA로 가서 오디션을 한 번 더 볼까.

에이전트한테 따로 연락이 온 건 없지만 원래 계획은 그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를 향한 팬의 눈빛을 본 이후 계속 고민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할까. 뭘 해야 후회가 남지 않을까.

부스럭.

팬레터를 펼치면서 나는 마음을 굳혔다.

좀 더 행복한 걸 하기로.

< 상어는, 결국 바다에서 죽는다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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