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97화 (197/227)

< 상어는, 결국 바다에서 죽는다 (4) >

TO 시현 오빠.

안녕하세요, 시현 오빠! 저는 인천에 사는 유미라고 해요.

오빠한테 꼭 드릴 얘기가 있어서 이렇게 편지를 써요.

저 사실 항상 외톨이였거든요. 근데 어느 날 우연히 오빠를 알게 됐고, 그때부터 ‘시현 수포’가 됐어요.

얼마 전에 오빠 기사 스크랩한 공책을 학교 책상에 올려놓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세상에!!

지나가던 친구들이 너도 시현이 오빠 팬이냐고, 이런 건 처음 본다면서 관심을 가지더라고요. 그리고 점심때는 3학년 언니들이 시현 오빠 팬이면 우리 동생이라면서 저를 찾아와서 말도 걸어주고··· 그 이후로 저는 친구들과 언니들과 함께 늘 오빠 얘기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끝낸답니다.

고마워요 오빠. 오빠 때문에 저는 외톨이가 아니게 됐어요.

“오빠 사랑해요······.”

마지막 문장을 속삭이며 나는 또 다른 팬레터를 펼쳤다.

시현 오빠에게.

오빠. 사랑하는 우리 오빠.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오빠를 지켜봐 왔어요. 어디서 지켜봤는지는 비밀입니다.

근데, 그때 얘기는 속상해서 하고 싶지가 않아요.

오빠 얼굴이 늘 슬퍼 보였거든요. 그래서 저도 무척 속상했고요.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하루하루가 너무 즐겁답니다!!

행복한 미소가 새겨진 오빠 얼굴을 볼 때마다 저는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쓰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은데, 눈물이 떨어져 더 못쓰겠어요.

오빠. 앞으로도 저는 늘 오빠가 행복하길 바라며 응원할게요.

늘 꽃길만 걸으세요.

“오빠의 영원한 팬이······.”

나로 인해 팬들의 일상이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또 팬레터 보고 있냐?”

손때 묻은 종이를 조심히 봉투에 집어넣다가 고개를 들었다. 박 상무가 해를 등지고 서서 나를 내려다본다. 그 무심한 얼굴을 향해 나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쓴 팬들의 마음을 읽을 때면 마음이 한없이 차분해지니까요. 특히 오늘처럼 구름이 좋은 날에는 더없이 행복하고.”

“한국 가면 할 일이 많다. 앨범 녹음 바로 들어가야 하고, CF 연장 계약도 준비해야 하고.”

끙 소리를 내며 옆에 앉은 그를 잠시 보다가, 나는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랬더니 저 하늘처럼 맑은 눈, 구름처럼 말랑말랑하던 그 아이의 미소가 떠오른다.

“상무님.”

“왜?”

“덴버에서 본 팬 있잖아요. 저 보고 울던 아이.”

“그 아이? 그 아이가 왜?”

“해외 팬들과는 여태 만나는 자리가 없었잖아요.”

박 상무는 팔짱을 켠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래서 회사에서는 내년쯤 상황 봐서 준비할 생각인데, 우선 아시아 쪽부터 차례로.”

“그래서 말인데······.”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본 뒤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저, 열심히 했죠?”

미국에 와서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밤잠 설쳐가며 대본을 외웠던 시간들. 매 순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날들이 눈앞에 스쳐 간다.

박 상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너 진짜 멋있게 달려왔다.”

그 한마디가 마치 면죄부 같다. 최선을 다했으니 헛걸음이 아니었다고, 내 도전은 그래도 의미가 있었다고 말이다.

“그죠?”

나는 피식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정을 내릴 때다.

“오디션은 그만볼게요. 뉴욕 촬영 끝나면 팬들 만날까 해요.”

박 상무가 이마를 꿈틀거린다.

“팬들? 팬미팅 말하는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아 팬미팅을 하려면 말이야, 준비할 게 한둘이 아니다. 일단 스탭진도 꾸려야 하고, 장소 선정도 그렇고, 구성도 그렇고··· 당장 이것저것 준비하려면 비용도 한두 푼이 아니야. 더구나 여기는 해외고. 아무리 빨라도 최소한 서너 달은······.”

“장소는 지역 한인회에 협조 구하면 크게 문제없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들어가는 비용은 제가 다 낼게요.”

그래 어려운 거 아는데,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세상일은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고 쉽게 생각하면 쉬운 법이니까.

“임마, 얼마가 들지 알고 그런 소리를 해? 너 여태 번 거 다 쏟아부을 일 있어?”

“다 쏟아부어도 상관없어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괜찮아요.”

눈만 깜빡이는 박 상무를 보며 나는 미소 띤 얼굴을 천천히 숙였다. 고생한 그에게 말했다.

“상무님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

「서울, 지에스 엔터테인먼트 청담동 건물」

“하나··· 둘··· 셋, 큐!”

사인이 떨어졌다. 성지훈이 다소곳이 모은 손을 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눈은 섹션텔레비 카메라를 향하고, 카메라는 지난날을 회상하는 그를 담는다.

“힘들던 시기였어요.”

성지훈의 전 소속사 VVW는 작년 여름 최고의 트러블메이크였다.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오소리 사건의 원흉으로 대중의 비난을 받았고, 그 때문에 회사는 한동안 마비 상태였다.

“그런데 밖에 나오니까 더 힘들더라고요.”

그때를 생각하며 성지훈은 쓴웃음을 천천히 흔들었다.

번개콘서트에서 3W와 이시현에게 완전히 발렸던, 그때의 기억이 잠시 스친다. 회사와 계약해지, 매니저와 단둘이 나와 홀로서기를 시도했던 시간들도 스친다.

팬들도 떠나고 이도 저도 되지 않아 피 말리던 그때.

설상가상 매니저는 황달이 와서 입원한 상황이었다. 정말 최악이었지.

“그때, 최 팀장님이··· 그러니까 시현 씨 매니저가 저한테 전화를 주셨어요.”

“뭐라고요?”

리포터가 넌지시 묻고 빙긋 웃었다.

“이렇게 말하셨죠. 지훈 씨, 우리 회사 어떻게 생각합니까?”

“와 멋있다.”

성지훈은 찔끔 흘린 눈물을 닦고 미소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였으니까, 제2의 인생이 시작된 전환점이.

지에스와 계약, 4집 타이틀곡 ‘그리워서’ 활동과 예능 출연, 이시현 팬 콘서트 게스트 출연, 그리고 현재 시청률 고공 행진 중인 드라마 ‘스텝’ 출연까지···

시간이 정말 눈부시게 흘러왔다.

마치 햇살 좋은 날 힘찬 강물을 바라보는 기분이랄까.

“하.”

감격에 겨워 깊은 숨을 토하고, 성지훈은 휴대폰을 들었다.

오늘 촬영은 단순 근황 인터뷰가 아니다. 그립던 이와의 깜짝 재회하는 코너가 있었다.

성지훈이 섹션 팀에게 직전 제안한 코너, 바로 전 매니저와의 해후다.

“지훈 씨, 그럼 얼마만의 전화인가요?”

“작년 겨울 마지막으로 봤으니까, 한 반년? 형이 퇴원하기 전에는 가끔 찾아갔었는데, 이후에는 저도 정신없고, 형도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아서였는지 연락이 없었어요. 제 탓이죠.”

“그럼, 이제 연락해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리포터가 짓궂은 얼굴로 묻자, 성지훈은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하는 일 그만두게 해야죠. 어쩔 수 없어요 그 형은.”

카메라를 향해 검지를 내밀고.

“형, 형은 말이야, 영원히 내 매니저야. 오케이?”

리포터가 큐카드 쥔 손으로 손뼉을 쳤다.

“지훈씨, 그럼 지에스 엔터테이먼트에 영입하는 건가요? 그 매니저님 말이에요.”

“예. 대표님에게 허락받았습니다. 근데 형, 긴장해라. 월급은 내가 준다!”

큰 웃음 뒤에 성지훈은 휴대폰 번호를 꾹꾹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가 가는 동안 코를 꾹 누르고 기다린다.

-여보세요?

“아, 오성식 씨 휴대폰이죠?”

코맹맹이 소리.

-예, 누구세요?

“아, 저는 세러데이 서울의 이지훈 기자라고 합니다.”

-기자요? 기자가 왜요?

“요즘 성지훈 씨가 드라마 ‘스텝’에서 열연을 펼치고 계시잖아요?”

성지훈은 웃음을 꾹 참고 코맹맹이 소리로 상황극을 이어갔다.

“그런데 오성식 씨가 성지훈 씨 전 매니저라고 해서 그거 때문에······.”

-그놈의 자식 말도 말아요!

“예?”

-그 썩을 자식! 병원 딱 세 번 찾아오고 연락도 없고, 전화번호도 바뀌고! 퇴직금 한 푼 안 준 놈이에요!

“아, 오성식 씨? 아마 오해가 있으신 게 아닐까······.”

-오해? 오해는 개뿔!

헐!

‘이 인간 대체 왜 이래?’

매니저의 거친 반응에 당황한 성지훈은 리포터와 카메라 눈치를 보며 간신히 입꼬리를 붙잡았다.

“하하. 제가 듣기로는 성지훈 씨가 악의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하던데.”

-맞아요, 맞아! 걔가 악의는 없지.

“그렇죠?”

-그냥 멍청해서 그래요.

“예?”

-멍청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퇴직금이 뭔지도 모를걸요? 혼자서는 밖에도 못 나가는 놈이에요. 그놈은요, 쉬는 날엔 집에서 빈둥빈둥 놀면서 야동이나 보는 게···

툭.

“아, 하하! 이 형이 말이 참 걸걸해요. 농담도 잘하고.”

성지훈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열기를 식히며 물 한 모금 마시는 동안, 리포터가 뜸 들이며 진행을 이어갔다.

“매니저님이 많이 서운하셨나 보다.”

“아휴, 그러게요. 제가 반성합니다.”

“그럼, 이제 진짜 정체를 밝혀볼까요?”

이제는 제 목소리로 전화할 차례였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이 성지훈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여보세요?”

-기자님 전화가 끊어졌네요? 내가 할 얘기 되게 많아요. 성지훈 팬클럽 회장 조별아라고 있거든요? 걔가 글쎄······.

툭.

“하하. 전화 상태가 안 좋네요?”

식은땀을 흘리며 전화를 다시 쥐었다.

‘촬영 전에 문자 한 통 보낼 걸 그랬나?’

살짝 후회하는데, 갑자기 인터뷰룸 문이 벌컥 열렸다.

색션텔레비 작가였다. 화장실 간다고 나가더니만 이제야 왔다.

“피디님, 피디님!”

“웬 소란이야? 지훈 씨 인터뷰 중인데!”

방방 뛰는 작가 때문에 피디가 잠깐 카메라를 멈췄다.

“지금 지에스 난리 난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여기가 지에슨데. 어디서 뭐가 난리가 나?”

“위에 분위기 장난 아니라니까요!”

다들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자, 작가는 한숨을 내리 쉬고 다시 말했다.

“지금 막, 4층에서 들은 얘긴데, 이시현이 미국에서 팬미팅을 한대요 글쎄.”

“뭐?”

피디 눈이 대뜸 커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말해봐!”

“이시현 지금 미국에 있잖아요? 근데 좀 전에 미국에서 전화가 왔나 봐요, 이시현이 귀국 전에 교민들 대상으로 팬미팅을 할거라고! 그것 때문에 지금 기획콘텐츠 개발부 뒤집혔고, 매니저먼트 사업부? 거기는 지금 긴급회의 들어간다고 난리도 아녜요! 못 믿겠으면 올라가 보시라니까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피디가 벌떡 일어났다.

“야, 그럼 지금 이거 우리밖에 모르는 거야?”

작가가 고개를 끄덕인다.

“카메라 챙겨, 당장 위로 올라가자! 그리고 김 작가는 지금 미국에 홍 피디님 있으니까 연락해봐, 지금 어디 계시냐고. 얼른!”

정말 순식간이었다.

성지훈이 눈 몇 번 깜빡인 사이에 리포터와 카메라가 먼지만 일으키고 사라졌다.

“피디님 저는······.”

“아··· 그래, 지훈 씨는 좀 있다 다시 합시다! 지금 상황이 좀 그렇잖아?”

대체 뭐가 그런데.

홀로 남은 인터뷰룸 안에서, 성지훈은 부르르 떨고 있는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긴 한숨과 함께 속삭였다.

“내 매니저는 개뿔.”

**

「미국, 콜로라도주」

“에이미? 채널 H 에이미 스콧?”

“응.”

테이블에 걸터앉은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 여자 이번에 폭스 채널로 옮기는데, 거기서 내년에 론칭할 프로그램에 네가 출연했으면 하더라고.”

“무슨 프로그램인데?”

“오디션 프로그램. 타이틀은 아메리칸 아이돌.”

“아메리칸 아이돌?”

프레디가 미소를 피식거렸다. 그러자 매니저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말했다.

“어떻게 할까? 멤버들 얘기 들어봐야겠지만, 그쪽에서는 너를 원하는 거니까.”

“에이미 스콧의 제안인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

“그래, 잘 생각했어. 아무래도 시즌제로 갈 생각인 것 같아. 잘 되면 넌 계속 고정이고.”

캘리포니아 출신의 혼성 그룹 Alta.

작년에 발표한 1집은 빌보드 차트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그룹의 인기보다는 리더이자 보컬인 프레디의 인기가 독보적이다. 섹시와 야성미를 갖춘 전형적인 백인 남성으로 청소년들의 워너비로 떠올랐다.

“근데 애들은 또 페스티벌 갔어?”

프레디는 창 너머로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며 물었다.

“여름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프레디 넌 계속 방에 있을 거야? 어디 안 나가?”

매니저가 물었지만, 프레디는 대꾸 없이 턱 끝까지 내려온 금발을 흔들며 창가로 갔다.

“그러다 또 카메라에 찍힌다.”

“찍히면 어때. 팬들이 기다리는데.”

그 말대로 호텔 아래에 팬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혹시나 한번 볼 수 있을까, 창가에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래서 프레디는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환호와 비명이 제트기 소음처럼 위로 치솟았다.

잠시 팬들의 사랑을 만끽한 그는 리모컨을 손에 쥐고 소파에 앉았다.

“연극이네?”

매니저가 TV를 힐끗 보고 속삭인다.

아이들 연극이었다.

무대에서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말도 안 돼······.”

입술을 잘근 씹은 프레디가 전화기를 손에 쥐었다.

“누구한테 거는 거야?”

“마이클.”

“잭슨?”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그가 가장 존경하는 우상이자, 살아있는 팝의 전설이 전화를 받았다.

“내가 지금 뭘 봤는지 알아요?”

숨을 가파르게 내쉬고 다시 말했다.

“마이클, 당신 이후로 처음이에요. 내가 사람 목소리에 소름이 돋은 적은.”

여전히 TV에 고정된 프레디의 눈동자는 떨리고 있었다.

대체 저 요정은··· 어디서 온 걸까를 생각하면서.

< 상어는, 결국 바다에서 죽는다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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