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어는, 결국 바다에서 죽는다 (2) >
“리나, 저 사람이 이시현이니?”
가쁘게 숨을 내쉬는 조카의 모습은 낯섦을 넘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좋은가.’
도대체 이시현이 누구길래. 어떻게 리처드의 눈에 들었고, 왜 페이 프로덕션에 찍혔다는 걸까. 조카의 이런 반응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리나, 그만 좀 앉아······.”
서 있는 조카에게 손을 뻗었지만, 에이미는 팔을 끝까지 펴지 못하고 내민 손끝을 움찔했다.
“저 사람 이시현 아니야?”
“맞는 것 같아. 맞아 맞아! 맞네!”
“라스베거스에 있다더니 언제 여기 온 거야?”
웅성거림, 들뜬 목소리들이 앞자리에서 장작 불씨마냥 피어오르고 있었다. 언뜻 보니 조카와 같은 한인들이었다.
“진짜 미국에 있었네.”
“설마, 오늘 공연 때문에 온 건가?”
“이럴 게 아니라 집에 전화해야겠어! 우리 할머니 이시현 드라마 보고 많이 우셨거든, 고향 생각나셔서.”
미국에 이시현이 있다. 그리고 눈앞에 있다.
그 사실이 이들을 굉장히 들뜨게 하는 모양이었다.
“고모··· 이제 볼 수 있을 거예요.”
“어?”
“왜 이시현인지··· 왜 이시현이어야만 하는지.”
조카는 그 말을 끝으로 입술을 꽉 다물었다.
‘볼 수 있다고? 뭘?’
무슨 소린지는 알 수 없지만, 에이미는 일단 손에 쥔 카탈로그를 펼쳤다.
해마다 가족의 화합이라는 주제로 주지사가 주체하는 연극은 콜로라도주 전역에 방송될 만큼 오랜 명목을 잇는 이벤트다.
물론 대본에서부터 준비까지 모두 아이들과 선생님들로만 이뤄지다 보니 퀄리티를 따지는 연극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단순한 연극이 아닌 모양이다.
‘특이하네.’
뭘 알고 쓴 걸까.
“그래 한번 보자. 저 남자가 어떤 배우인지.’
결국 지금 이 궁금증을 풀어줄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그래서 잠시 모든 걸 뒤로하고 집중해서 보기로 했다.
채널 H 총괄 프로듀서 ‘에이미 스콧’의 눈으로.
**
“쯧쯧.”
카메라에서 눈을 뗀 감독이 혀를 찼다.
“니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혹시, 그래서 여기 오자고 한 거냐?”
표정을 보니 진짜 그런 모양이다. 클린턴 녀석은 능글능글 웃고 있고, 로돌포는 코를 후비고 있다. 도대체 이 멍청이들 머리에는 뭐가 든 걸까.
“이건 기회야. 우리의 원대한 계획 중 일부라고··· 마빈? 듣고 있는 거야?”
감독은 늘 그렇듯 둘을 무시하고 뷰파인더를 다시 들여다봤다.
‘그나저나··· 확실히 저 동양인은 카메라를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니까.’
상황이 어찌 됐든 무대에 오른 이시현을 이렇게 보니 색다른 재미다. 분명 카메라도 기뻐서 비명을 지르고 있을 거다. 저렇게 좋은 피사체가 앞에 있으니까.
“근데 뮤지컬은 노래가 돼야 하는 거 아니야?”
웬만한 가수들도 꺼리는 장르가 뮤지컬이다.
노래, 춤, 연기실력을 두루 갖춰야 함은 물론,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무대에서는 컷이 없다. 실력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글쎄 어느 정도 하지 않을까? 배우면 일단 발성은 갖췄을 테니까.”
감독이 눈살을 찌푸리자, 클린턴이 다시 말했다.
“애들 무대잖아. 그냥 무대에 올라가서 TV에 나오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렇게 되면 우리 공연에 아시아 요정들이 많이 찾아오겠지? 그러면 으하하······.”
“너 바보냐? 저 촬영한 게 당장 내일 송출될지 누가 알아? 어쩌면 니들 공연 끝날 때까지 테입 그대로 있을걸?”
클린턴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야 로돌포, 그런 말은 안 했잖아?”
“괜찮아.”
“뭐가 괜찮아, 이 날다람쥐야!”
클린턴이 멱살을 쥐고 흔들어도 로돌프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확신에 차서 눈을 빛냈다.
“라스베거스에서 봤잖아. 거리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 연극이 끝나면 우린 다시 볼 수 있을 거야. 그날의 놀라움을.”
이제, 공연이 시작된다.
**
“후······.”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무대 옆 좁은 대기 공간에서 아이들과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도대체 얼마 만일까.
오랜만의 연극 무대를 앞두고 흥분으로 심장이 제멋대로다.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던 그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허름한 무대, 어두컴컴함, 텅 빈 관객석을 바라보며 꿈과 작별을 고했던 그 날.
“아저씨 떨려요?”
새 분장을 한 아이가 고개를 들고 내게 물었다. 그래서 미소를 끄덕였더니, 아이는 개구쟁이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고 내 손을 잡아줬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우릴 스쳐 간다.
가득 찬 관객, 무대를 잡는 카메라, 스태프, 야외무대 스크린, 음향···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흐르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나는 이런 무대가 있을 걸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내 앞에 무대가 있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배우 이시현이니까.
“어흥!”
큐사인에 맞춰 사자분장을 한 아이가 무대로 나갔다.
깜찍한 포효, 뒤뚱거리는 사자의 모습에 관객석에서 웃음소리가 퍼진다.
“숲아, 바람아, 구름아, 태양아!”
사자는 두 발로 딛고 하늘을 향해 외쳤다.
“나는 외톨이 사자란다. 아무도 나랑 놀아주지 않아. 나는 그저 친구들과 눈을 마주하고 싶고 얘기를 하고 싶어. 아니면 그냥 듣기만 해도 좋아. 그런데, 그런데······.”
독백에 이어 무대에 잔잔한 배경음악이 이어졌다. 이때, 인기척이 느껴져서 사자는 커다란 바위 뒤로 숨었다.
“사자와는 절대 친해지면 안 돼.”
“맞아. 아주 흉폭한 녀석이야.”
동물들이 모여서 사자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듣자니까, 고기를 엄청 좋아한대.”
“세상에. 그게 사실이었어?”
“어머, 무서워!”
기린은 오돌오돌 떨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난 한 번도 사자가 고기를 먹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사나운 모습도 본 적이 없어. 너는 봤어?”
그러자 얼룩말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 아니. 하지만 흉폭할 게 틀림없어. 고기 먹는 것도 분명해. 입술이 빨갛잖아?”
“그렇지! 그 얼굴을 봐. 그 갈기를 봐. 그 발톱을 봐. 언제 우리에게 상처를 줄지 몰라!”
바위 뒤에 숨은 사자는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동물들이 떠나고서야 무대로 나왔다.
또다시 배경음악이 흐르자, 상처받은 사자가 고개를 숙이고 제 발끝을 바라봤다. 조명이 발밑에 모인다. 사자는 아픈 마음을 달래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아 나 사실 착한 사자인 걸 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어 채식주의자란 말이야 입술은 그냥 빨개”
웃는 사자의 얼굴이 슬퍼 보인다.
“어떻게 할까 갈기를 자를까 발톱을 자를까 더 힘껏 웃어볼까”
사자는 제 입꼬리를 억지로 늘려봤다.
“나는 너희들을 상처 주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는 걸 그러니 한 번이라도 다가와 주면 안 될까”
간절한 바람에도 사자는 여전히 외톨이다. 그래서 결심했다.
“좋아. 여행을 떠나는 거야. 어딘가에는 내 동료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사자의 여행이 시작됐다.
사막을 지나고, 산을 지나고, 들판도 지났다. 때로는 비바람이 길을 막았지만 사자는 갈기를 휘날리며 나아갔다. 앞으로, 앞으로, 또 앞으로.
“아, 찾았다.”
여행을 시작하고 처음 만난 해바라기 앞에서, 사자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 물었다.
“Do you want to be my colleague?”
생각보다 쉽게, 해바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자야, 내가 너의 동료가 돼줄게. 그런데 부탁이 있어.”
“무슨 부탁인데?”
“자꾸만 새들이 나를 쪼아 먹는단다. 네가, 새들을 설득해줄 수 있겠니?”
“그래. 내가 도와줄게. 그럼 내가 새들을 만나고 올 테니까, 너는 그동안 나를 기다려주겠니?”
“응. 언제까지고 기다릴게.”
사자와 해바라기는 동료가 됐다. 사자는 외로움을 덜었고, 기쁜 마음으로 여행을 계속했다. 허수아비를 만났을 때는 망설임 없이 물었다.
계속되는 여행, 이제 스태프의 큐사인이 나를 향했다.
자, 내 차례다.
‘후.’
나는 느리지만 정확하게 무대 중앙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간 나를 사자가 올려다본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망울이라니. 이런 사자에게라면 몇 번을 물려도 안 아플 것 같은데.
“Do you want to be my colleague?”
사자가 물었다.
카메라의 시선이, 관객들의 기대가, 바람이 느껴진다.
나는 무릎을 굽혀 사자와 눈높이를 맞췄다.
“너는 사자구나?”
사자는 떨고 있었다. 미움받을까 봐, 외톨이가 될까 봐. 여기까지 달려오면서 아프고 힘들었어도 그것이 가장 무섭다.
“응 맞아··· 너도, 내가 무섭니?”
“아니. 무섭지 않아.”
요정은 알고 있다. 사자가 새들을 설득하기 위해 높이 있는 둥지를 찾아가느라 발톱이 부러졌음을. 허수아비의 부족한 지푸라기를 채워주려 자신의 갈기를 뽑아주는 바람에 추위에 떨고 있음을.
“진짜? 진짜 안 무서워?”
“그래 사자야. 나는 너의 동료가 될 수 있단다.”
“정말이니?”
나는 사자의 눈을 바라봤다.
“물론이지. 약속의 증표로, 노래를 불러줄게.”
사자의 마음을 치유해줄 노래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
준비된 가사와 MR은 있지만 연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 생각을 깊이 했었다.
나는 그냥 노래가 아닌, 요정의 노래를 불러야 하니까.
천천히 일어났다.
두 팔을 펼친 나를 하늘에 띄울 것처럼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왠지 눈물이 핑 고이고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다.
아. 나는 정말 무대가 그리웠구나.
“사자야 너는 이제 외톨이가 아니란다”
때로는 누구나 외톨이가 된다.
자의든 타의든. 소문이거나 음해거나. 오해 또는 사실.
나 역시도 한때는 외톨이였다.
겉은 크고 화려했지만 발톱 빠지고 이빨 빠진 사자였다.
나는 간절했다. 타인의 사랑 한 줌이 너무 간절했다.
어쩌면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래 숲에 불어온 바람은 너의 용기였구나”
그래서 먼저 여행 중인 선배로서 노래를 부른다.
“언덕에서 유난히 펄럭이던 것은 너의 갈기였구나”
내 목소리가 사자를 위로해줄 수 있기를 바라며, 노래가 바람을 타고 숲에 사는 모두가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웅덩이를 만들어 꽃에 물을 준 것은 너의 발톱이었구나”
그러니 사자야. 너는 너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렴.
**
-오케이, 1번 카메라 속도 늦추고, 요정 클로즈업.
중요한 행사인 만큼 방송국은 숙련된 스태프들을 현장에 투입했다.
어제오늘 리허설에서 카메라 구도와 동선을 맞췄지만, 아이들 연극이기에 돌발변수가 발생할 수 있어 다들 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리허설 때와 달리 카메라 동선이 계속 바뀌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저 요정이다.
관객들은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한 사람, 박 상무만은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야외무대 스크린에 이시현의 모습이 반복해서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즈업샷, 풀샷, 오버숄더샷, 바스트샷, 다양한 구도로 카메라에 잡히고 있다.
“최재환이 이걸 봤다면 기절하겠구만.”
혼잣말을 속삭이면서, 박 상무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서운 사자의 발톱은커녕, 작은 손의 앙증맞은 사자 모습에 웃음만 나온다. 관객들도 웃으며 사자를 응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관객석에 바람 소리만 들린다.
모두가 침묵 속에서 집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시현의 목을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
녀석은 지금 성인 연극에 못지않은 집중력을 보이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연극을 해본 적이 없을 텐데.
아닌가. 연습생 커리큘럼에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무대 때문일까? 오랜만에 마주한 관객들이 녀석을 들뜨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연극은 이제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사자는 마을로 돌아왔고, 마을은 나쁜 동물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서웠고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하지만 사자에게는 함께 온 동료가 있었다.
해바라기, 허수아비, 새들, 꽃, 요정이, 많은 동료가 사자를 도와 나쁜 동물들을 물리쳤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다.
모두의 화합을 이루는 노래가 시작됐다.
박 상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순간 이시현의 목소리가 그를 덮친다.
그건 마치 너무도 따뜻하고, 너무도 포근한 바람 같았다.
눈물이 흐를 정도로··· 벅찬··· 이 바람.
‘그래. 이게 바로 이시현이지.’
< 상어는, 결국 바다에서 죽는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