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92화 (192/227)

< 너, 내 동료가 돼라 (1) >

“고마워요.”

테이크아웃 햄버거와 콜라를 손에 쥔 리처드 감독은 길 건너 식당을 무심히 바라봤다.

“바글바글하네.”

파워런치라 불리는 LA의 점심시간은 할리우드의 수많은 인맥이 탄생하는 만남의 장이다. 스태프들은 영화 얘기를 하고, 에이전트와 배우들은 자신을 구원할 사람을 찾는다.

그런 분위기를 선호하는 감독이 있다면 홀로 조용한 점심시간을 원하는 감독 역시 존재한다. 그는 후자 쪽이었다.

“리처드!”

걸음을 재촉하는 중에 등 뒤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방금 택시에서 내린 케이시가 금발을 흔들며 리처드 옆에 바싹 붙었다.

“오디션 결과는 언제 알려주려는 거예요? 우리 배우는 이미 준비가 끝났어요. 뮤직비디오 촬영이 끝나고, 뉴욕에서 돌아오면 당장에라도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다고요.”

“오디션은 안 됐어.”

걸음을 멈춘 리처드 감독이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예?”

그럴 리가.

“먼저 오디션을 요구한 건 채널 12였잖아요? 근데 왜?”

“그 친구가 페이 프로덕션하고 관련 있는 거 알았어?”

리처드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향해 한숨을 쉬었다.

“페이 프로덕션? 거기서 왜요? 무슨 문제가 생겼어요?”

“당신 배우, 할리우드에서 카메라 앞에 서기는 글렀어.”

무슨 말도 안 되는.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친구가 페이 프로덕션과의 계약을 파기했나 봐.”

“무슨 영화였는데요? 뭣 때문이었는데요?”

“감독하고 트러블이겠지. 그 감독도 관뒀다지만.”

“감독이 누구였는데요?”

고개를 내린 리처드 감독이 다시 그녀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마이클 본.”

**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감독님!”

차에서 내린 마이클 본 감독을 여기자와 카메라맨이 뒤쫓았다.

“감독님, 영화제 수상 축하드립니다. 저는 뉴욕데일리 크리스틴입니다. ”

“예, 고맙습니다.”

“감독님, 올리비아의 퇴원 소식은 들으셨나요? 그녀에게 할 얘기 없으신가요?”

침묵과 걸음이 계속 이어진다.

“감독님, 미국에는 언제 돌아오실 생각이세요?”

여기자의 질문은 비아냥이나 다름없었다. 귀국하면 그는 공항에서 바로 체포되니까.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하실 말씀 있으세요?”

순간 마이클이 걸음을 멈췄다.

뒤돌아선 그는 카메라를 바라보고 분명히 말했다.

“나는 예술을 했을 뿐입니다.”

할 말을 잃어버린 여기자를 두고 마이클은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저 미친 새끼··· 찍었어?”

카메라맨이 고개를 끄덕이고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근데 어떻게 그 일이 아시아의, 그것도 조그만 나라에서 이슈가 된 거야?”

“마이클 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을 예정이었던 영화가 있었어. 반추라고. 그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된 배우가 이 문제를 처음 거론한 것 같아.”

여기자는 건물 입구를 바라보며 카메라맨의 궁금증을 풀어줬다.

“그래?”

“페이 프로덕션 관계자들 사이에 떠도는 얘기로는 그 배우가 오디션에서 마이클 본 감독이 저지른 일들을 연기로 재구성했다는 것 같아.”

“허. 시비를 건 거네? 그럼 혹시, 그 오디션 카메라에 담았으려나?”

“누가 카메라맨 아니랄까 봐. 아마 지금쯤이면 테이프가 뉴욕에 도착했겠네.”

여기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 크리스틴. 그럼 이제 뉴욕으로 바로 돌아가는 거야?”

“응. 만나러 가야지.”

“만나러 가? 누굴?”

**

「미국, 콜로라도 주」

밴드와 뮤직비디오 촬영팀은 라스베거스에서의 2회 공연, 유타에서의 1회 공연을 마치고 오늘 아침 덴버에 도착했다. 새벽이슬 맞으며 이동하는 탓에 다들 지쳐 있었다.

“거기서 뭐 해? 좀 더 자 두지 않고.”

버스에서 카메라를 꺼낸 감독이 팻시에게 다가갔다. 아까부터 모텔 입구에서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는 그녀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끈적한 더위 속에 고개를 치켜든 채로 있으니 땀방울이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데도 미동조차 없었다.

“실컷 잤어.”

퉁명하게 뱉더니, 퉁명하게 묻는다.

“촬영은? 잘되고 있는 거야?”

“잘되고 있냐고?”

감독은 콧바람을 들썩이고 그늘 아래 놓아둔 맥주병을 손에 쥐었다. 한 모금을 마시고, 두 팔을 으쓱했다.

“너희들 정말 운 좋은 거야. 시현 같은 배우 만나기 쉽지 않거든.”

“뭐가 그렇게 특별한데?”

“잘 봐. 내가 카메라를 켜고 액션을 외쳐. 이게 원테이크야.”

“그래서 뭐?”

“그래서 뭐라니. 팻시, 내가 당신한테 카메라를 들이대고 이제 찍는다고 외친 거야. 그러면 당신은 연기를 해야 해. 분위기, 말투, 대사, 눈빛 같은 잡다한 것들을 카메라 앞에서 보여줘야 한다고. 그중 하나라도 틀리면? 바로 NG야. 그러면 또 찍어야 해, 제대로 나올 때까지 계속, 계속.”

꿀꺽꿀꺽.

미지근한 맥주를 단숨에 삼키고 나서 그는 젖은 입술을 훔치고 다시 말했다.

“그렇게 찍어도 기껏해야 한 컷 담는 거야. 쉽게 말해서 한 장면에 각기 다른 방향의 컷이 세 개가 필요하면, 최소한 카메라를 세 번 돌려야 한다는 말이야. 물론 좀 전에 말한 NG가 없다면 말이지.”

팻시는 대충 알아듣는 것 같았다. 아니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도 모르지만. 어찌 됐든 감독은 빈 병을 흔들며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시현은 카메라를 딱 세 번만 돌리게 하고 있단 말이지.”

“배우라면 당연한 거 아니야?”

“그렇지. 몸값 1천만 달러의 할리우드 톱스타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하지만 이시현의 출연료는 고작 천이백 달러.

팻시는 이마를 찌푸리고 저 멀리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강아지와 놀고 있는 이시현.

뮤직비디오 촬영 때와는 달리 그는 색바랜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흰 셔츠가 바람에 나풀거린다. 입가의 미소는 어제처럼 변함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림같지 않아?”

감독은 이시현을 바라보며 팻시의 동의를 구했다. 저건 마치 방금 사 온 잡지의 모델이 현실로 튀어나온 것 같지 않은가.

“그림은 무슨. 여자애도 아니고 삐쩍 말라서 어딨다가 써?”

팻시는 엉덩이를 툴툴 털고 일어났다. 방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겁다. 찜통 같은 더위에 절로 지친 한숨이 나온다.

“대체 에어컨은 언제 고치는 거야.”

구시렁구시렁.

매니저가 방을 두 개 잡았지만 둘 다 에어컨이 고장 난 방이다.

“혼자서 뭐해?”

남자들 방 앞에서 팻시는 걸음을 멈췄다. 상반신을 탈의한 데럴이 땀을 뻘뻘 흘리며 기타를 잡고 있었다.

“뭐하긴. 공연 준비하고 있지.”

데럴은 눈썹을 살짝 덮은 머리카락을 흔들 뿐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팻시는 기타를 퉁퉁치는 그를 지켜봤다. 성격은 지랄 같아도 기타를 잡은 모습은 역시 멋있으니까.

“다른 애들은 어딨어?”

그녀의 질문에 데럴은 이마를 찌푸려 천장을 잠깐 바라봤다. 이시현 방이다. 그곳만 유일하게 에어컨이 나온다.

“쓸모없는 자식들.”

“뭐?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돌아서려던 팻시가 데럴의 짜증 섞인 말투에 볼을 찌푸렸다. 한두 번이야 참지. 라스베거스에서부터 계속 저기압이다.

“심해? 이번 앨범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물어? 다들 대체 언제까지 마이너로 살 생각이야?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그러니까, 너라도 정신 차려. 제발 부탁이니까!”

이번 앨범의 결과에 따라 밴드의 운명이 결정된다.

성과가 좋으면 메이저 유통망을 타고 말 그대로 별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리로 내몰리는 단순한 이치.

“데럴, 밴드는 너 혼자만의 밴드가 아니야. 다들 말은 안 해도 너를 걱정하고 있어. 그러니까 가끔은 기타를 내려놓고 바람이라도 쐐. 엉덩이 안 아파?”

“하. 너희는 참 속 편해서 좋겠다.”

데럴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다시 기타를 잡았다. 떠오른 기타 리프를 치며 금세 연주에 열중하는 모습에 팻시는 한숨을 뱉고 방을 나왔다.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 보면 회사와 계약을 하고 나서부터인 것 같다.

좁고 냄새나는 방에서, 다 함께 술에 취해 웃고 떠들며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던 순간이 아주 오래전 일이 돼버렸다.

지금은 각자 다른 의미로 움직일 뿐.

누구는 성공을 위해서, 누구는 익숙해져서, 누구는 어쩔 수 없이.

왠지 재미가 없어졌다.

지친 걸음으로 방으로 향하던 팻시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이시현이 제 방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

방으로 돌아왔더니 두 놈이 내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시현, 미안한데, 우리 이 방에서 못 나가겠어.”

나뭇가지 같은 팔을 허우적거리며 클린턴이 선전포고를 했다. 로돌포가 그 옆에 누워서 간절한 시선으로 나를 본다.

“밤에 여기서 애니메이션 봐도 될까?”

“상무님, 그래도 돼요?”

나는 문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도 없지만.

벌떡 일어나 두리번거린 두 사람이 투덜대며 다시 드러눕는다.

“시현, 한국에 가면 너 쫓아오는 여자들 많다며?”

“팬들 말하는 거야?”

나는 1인용 소파에 앉으며 되물었다.

“그래 팬들. 로돌포, 우리 아예 시현 따라서 한국 갈까? 여기선 글렀어.”

“난 용산이란 곳에 가고 싶어. 거기 가면 온갖 애니메이션이 다 있다던데.”

로돌포의 희망 사항에 클린턴이 혀를 차고 다시 나를 바라봤다. 저 음침한 시선을 피할 길이 없다.

“근데 시현.”

“왜?”

“팬들이 쫓아다니는 스타가 되면 어떤 기분이야?”

별개다 궁금하다. 근데 어떤 기분이었더라.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그저 일상의 순간인데.

“좋지. 좋아.”

팬들과의 대화는 늘 즐겁고 유쾌한 시간이다. 그래서 해줄 말이 이것밖에는 없었다. 경험해 보지 않고는 모르니까.

나는 피식 웃고 창 너머로 흐르는 구름을 바라봤다.

한국에서 저 하늘을 보고 있을 팬들이 그리워진다. 다들 뭐 하고 있을까. 설마 날 잊은 건 아니겠지? 에이,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그래, 좋구나.”

클린턴이 넋두리하듯 속삭인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미스터 박 결혼했어?”

“뭐?”

“우리 내기했거든. 미스터 박이 결혼했는지 안 했는지.”

대체 그게 왜 궁금한 건데.

“로돌포는 안 했다에 걸었고, 나는 결혼 했는데 이혼까지 하고, 아이도 있다에 걸었어.”

아주 삼류 드라마를 쓰고 있다.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어 헤어졌고, 그래서 아이는 엄마가 홀로 키우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없이 지켜보는데, 로돌포가 손가락을 까딱까닥 움직이며 말했다.

“나 그 영화 알아. 남자가 십수 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더니, 자신도 모르는 딸이 있는 거야. 근데 아이는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주눅이 들어있어. 왜냐하면, 엄마 혼자 키우는 아이니까. 근데 제목이 모였더라?”

“The best dad in the world.”

나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왠지 알고 있는 영화였다.

“아, 맞아 그거. 미스터 박 분위기가 딱 그거지. 헤이, 내가 너의 아빠다! 하하······.”

침대에서 뒹굴며 크게 웃던 클린턴이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언제 온 건지 박 상무가 문 앞에 서 있다.

단단한 어깨, 각진 턱, 선글라스 속 번뜩이는 눈. 마치 미래에서 온 기계 전사 같다.

“아. 화장실.”

슬쩍 화장실로 도망치는 클린턴을 향해 그가 나직이 말했다.

“총이 좋아? 칼이 좋아? 원하는 거로 골라봐.”

< 너, 내 동료가 돼라 (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