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93화 (193/227)

< 너, 내 동료가 돼라 (2) >

「서울, ‘시현 수포’ 정기 오프라인 모임」

카페를 가득 메운 팬들은 이시현 얘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드라마 ‘스텝’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었다. 지금 대한민국이 스텝 때문에 난리니까.

남자들은 장태원이 보여주는 복싱의 매력에, 여자들은 장태원과 권여름의 갈등과 로맨스에 푹 빠져버렸다. 그런데 그 열풍의 주역인 이시현이 대한민국에 없는 이상한 상황이다.

한차례 폭풍 수다가 지나가고, 실내의 불이 꺼졌다.

팬들은 이제 스크린에 펼쳐진 프로젝터 영상에 흠뻑 빠졌다. 얼마 전 해외 팬이 팬카페에 올린 영상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은 이시현이 화려한 라스베가스 한복판에서 어김없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행위예술을 하는 영상에서는 다들 숨을 죽였다.

묘령의 여인과 춤을 추는 영상에서는 탄성을 질렀다.

“오빠는 진짜 연기 중독이라니까. 어떻게 라스베거스, 그것도 거리 한복판에서 연기를 해?”

촬영자의 말로는 돌발행동 같았다는데,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뿐이야? 존재감 완전 드러내고 있잖아. 역시 배우는 배우.”

“아무나 그런가. 우리 오빠니까 그러지.”

준비된 연기자, 뼛속까지 연기자, 그래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배우 이시현.

“아. 라스베거스에서 오빠 본 사람들 너무 부럽다.”

“오빠가 거기서 만난 한국 사람들한테 일일이 사인해주고 포옹까지 해줬대.”

“아 부러워!”

“근데 오빠 지금 라스베거스에서 뭐하시는 거야?”

“어떤 밴드하고 같이 있었대. 뮤직비디오 촬영 같았다고 했어.”

“밴드?”

“어쩜, 오빠 지금 미국에서 앨범 작업하는 건지도 모르지.”

“세상에··· 해외 로케이션 촬영?”

예측할 수 없는 행보와 알 수 없는 정보들.

회원들은 너도나도 어디서 들은 얘기를 쏟아냈다. 출처는 상관없다. 이시현으로 인해 함께 모이고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회원들이 수다 삼매경에 빠진 사이,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백유진의 눈가에는 촉촉이 물기가 어렸다.

고개를 돌리던 조별아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회장님 왜 그러세요?”

“기뻐서. 우리 오빠가 이제 진짜 배우가 됐구나 싶어서.”

지금 흘린 눈물에는 무명의 시간을 견뎌내던 이시현에 대한 기억이 스며있었다. 남몰래 지켜본 시간이 무려 5년이니까. 존재감 없던 그 시절, 이따금 회사에서 보면 축 처져 있던 어깨와 씁쓸한 미소.

하지만 지금 모니터 속 이시현은 어떤가.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고, 스스로가 배우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이제 그가 서 있는 곳은 흔한 거리 한복판이라도 촬영장이고 무대가 된다. 그러니 1호 팬으로서 어찌 기쁘지 않을까.

“에이 회장님도 참, 오빠야 명실공히 스타 배우죠.”

위로의 말 한마디에 백유진은 눈물을 훔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주목!”

박수 두 번에 모두가 숨죽이고 주목했다.

“현재 오빠가 미국에 있다 보니까 카페에 해외 제보가 많이 올라오고 있어요. 이번 라스베거스 영상도 그렇고. 그래서 당분간은 해외 팬이 올린 자료나 게시물은 우선적으로 카페 메인에 오릅니다. 이점 양해 부탁드리고요.”

생각보다 해외 팬들이 부지런하다. 제보가 빗발치고 있다.

“여러분 이달 말에 오빠 돌아오는 거 아시죠? 그날, 공항에서 오빠 환영회 행사를 할 겁니다. 우리 25만 팬카페 회원 모두가 갈 수는 없으니까, 내일부터 참가 신청자 받습니다.”

드디어, 우리 오빠가 온다.

“그러니 여러분. 안 다치게 단단히 준비하고 오세요. 그날, 공항 터질 테니까.”

다시 새로운 시작이 펼쳐진다.

그 기대만으로 팬들의 박수와 환호가 하나 돼 울려 퍼졌다.

**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

머리카락색이 다른 네 명의 여학생은 햇볕을 피해서 나무 그림자 아래 모였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오늘 본 영상에 대해서 갑론을박을 펼친다.

“카메라 효과.”

“원근법이 일으킨 착시.”

“어두운 날씨로 인한 조도 센서 이상.”

노랑머리가, 갈색머리가, 빨강머리가 조잘조잘 각자의 의견을 냈다. 이유는 하나.

“그렇지 않고는 동양인 얼굴이 그렇게 하얗게 보일 수가 없거든.”

“키에 비해서 머리 크기 봐,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거야.”

“비도 왔었어. 그러니 절대 그렇게 찍힐 수가 없는데 찍혔다는 건, 카메라 이상이 틀림없어. 암, 그렇고말고!”

친구들의 얘기를 잠자코 듣던 주근깨 여학생이 미소를 씩 올린다.

“너희들 말은 비율 짱이고, 얼굴 완전 하얗고, 되게 잘생겼다는 거네? 너희들이 보기에는 말이야.”

“그러니까 카메라 이상이라고! 절대 동양인한테는··· 아, 널 무시하는 건 아니고.”

갈색머리가 서둘러 제 입을 가렸지만, 주근깨 여학생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자라면서 인종차별을 숱하게 겪어서 이 정도는 그런 축에도 끼지 못한다. 오히려 실실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후후. 너희들도 직접 보면 알게 될걸? 카메라 이상이 절대 아니란 걸.”

언제부터인가, 주근깨 여학생은 오늘 본 영상 속 배우에게 푹 빠졌다. 작년 겨울에는 한국까지 가서 그 배우를 보고 오기도 했다.

“무려 5만 명이었어.”

그녀의 얘기에 친구들은 서로 눈을 마주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또 그 얘기야?”

5만 명이라니. 보이그룹이라면 모를까 겨우 그 배우 하나를 보려고 그 많은 사람이? 더구나 배우가 콘서트를? 도저히 믿지 못할 얘기였다.

“리나, 그 배우가 노래 부르는 건 왜 안 보여줘?”

“그거야··· 너무 느리잖아.”

카페에 올라온 뮤직비디오나, 홈페이지에 올라온 영상들은 선명한 고화질 동영상이다. 한국이라면 모를까 미국에서 보려니 받다가 끊기고, 끊기길 반복해서 포기했다. 그나마 이번에 학교에서 인터넷 서비스 업체를 바꿔서 다행이다.

“그럼 라스베거스 가서 그 사람 볼 거야?”

“그러려고 했는데, 엄마가 안 된대.”

주근깨 여학생은 아이스크림을 살짝 핥고 말했다. 그러다가 손목시계를 살피고 벌떡 일어났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어디 가?”

“오늘 레드록스 공원에서 제시카가 연극 하거든.”

“아하. 제시카가 직접 썼다는 그 연극?”

“그 꼬맹이가?”

빨강머리가 피식 웃자 노랑머리가 끼어들었다.

“노노, 꼬맹이 우습게 보지 마. 얘네 고모가 채널 H 총괄 프로듀서라고.”

“정말?”

정말이고 자시고 시간이 진짜 없다. 가족들 다 모였는데 안가면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단식투쟁 중이라도 가족모임은 필수 참석이다.

“너희들도 있다가 와야 해! 캠코더 꼭 챙겨오고!”

서둘러 가방을 챙기는 그녀를 향해 친구가 물었다.

“리나, 그 배우 이름이 뭐라고 했지?”

“이시현!”

**

뮤직비디오 팀은 늦은 점심을 먹고 먼저 숙소를 나왔다.

감독은 좀 더 좋은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했고, 덴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끝에 레드록스 공원에 도착했다. 무대까지 갖춰진 공원은 관광지답게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니들은 왜 왔냐?”

박 상무는 핫도그를 물고 있는 두 놈을 바라봤다.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도 아니고, 저 둘은 어째 항상 같이 다닌다.

“우리 배우가 잘하고 있나 보러왔지.”

우리 배우는 무슨.

이시현이 저놈들한테 물들까 봐 걱정이다.

박 상무는 체념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한국이었으면 수많은 스태프에게 둘러싸여 있을 배우가 말도 잘 안 통하는 감독과 손짓 발짓으로 얘기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젯밤 전화통화를 떠올렸다.

‘미스터 박, 페이 프로덕션 얘기가 대체 무슨 얘기야?’

케이시한테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페이 프로덕션에서 방해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채널 12 오디션도 그것 때문에 물거품이 됐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아주 대놓고 방해하는 바람에 LA에서 더는 오디션을 볼 수 없을 거라는 말도 덧붙었다.

‘아마 여태 오디션마다 결과가 좋지 못했던 것도, 그쪽 손길이 닿았던 것 같아.’

케이시 추측이 맞다면···

그래, 지금 생각하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근래에 봤던 오디션은 분위기도 좋았고 감독이나 스태프들도 이시현 연기에 흡족해했었다. 그래서 내심 기대했었는데, 결과는 매번 탈락.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프로덕션이 배우를 거절할 수는 있어도, 배우가 먼저 거절할 순 없다는 건가.’

더럽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다.

프로덕션의 갑질을 이겨낼 수가 없다. 홈그라운드도 아니니 더더구나.

밤사이 고민 끝에 박 상무는 혼자만 알고 있기로 결정했다. 이시현이 안들 달라질 것도 없으니,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거다. 어차피 8월의 달력은 곧 찢겨나가니까.

그러니 사실상 이번 뮤직비디오가 미국에서의 마지막 스케줄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분위기를 밝게 가보자고. 주인공이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는 때니까. 혹시, 춤도 출 수 있겠어?”

감독이 이것저것 요구해도 이시현은 미소를 끄덕인다. 제대로 알아듣기는 하는 건지. 햇살이 밝아서인지 하얀 얼굴이 유독 하얗게 보인다.

“동양인과 백인의 피부톤에 차이는 있지만, 저건 저것 나름 인상적인데?”

클린턴이 굵은 핫도그를 꾸역꾸역 삼키며 말했다.

“로돌포, 오늘은 꼭 이시현을 데리고 파티에 가자.”

입가에 묻은 케첩을 핥아먹는 녀석을 보면서, 박 상무는 이번 뮤직비디오 스케줄은 아무짝에도 의미가 없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얘들이 뭐가 되든 돼야 이시현 얼굴이 TV에 나오는 건데, 영 글러 먹었다. 어디 사회면에나 안 나오면 다행이지.

“그럼 잠깐 쉬고 다시 하자고!”

감독과 대화가 끝나자 이시현이 그림자 아래로 다가왔다.

박 상무는 서둘러 음료수를 내밀었다.

“덥지?”

“견딜만해요.”

견딜만하다는 녀석이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 얼굴을 잠시 보던 박 상무가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근데, 그 애는 누구야?”

이시현 옆에 있는 작은 꼬마.

**

[Do you want to be my colleague?]

사자는 외톨이가 됐다. 친구도 가족도 잃어버렸다. 그래서 여행을 하면서 동료를 만들기로 했다.

‘Do you want to be my colleague?’

사자는 만나는 모든 것에게 물었다. 나무, 꽃, 돌, 허수아비, 그중에는 요정도 있었다. 그때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물었다.

‘Do you want to be my colleague?’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친구가 있었고, 웃음이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사자는 동료들과 함께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해준다. 내 동료들이라고.

“제시카!”

선생님이 다가와 손을 낚아챘다.

하지만 제시카는 여전히 고개를 추켜들고 눈앞의, 요정을 보고 있었다.

“이름이 뭐니?”

요정이 허리를 숙이더니 친절히 물었다.

투명한 눈동자에, 사자보다는 훨씬 귀여운 여자아이가 비친다. 그래서 제시카는 흡족한 미소와 함께 요정에게 되물었다.

“너, 내 동료가 될래?”

< 너, 내 동료가 돼라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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