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91화 (191/227)

< One day in Las Vegas (3) >

-속보! 시현 오빠 라스베거스에서 발견!

우리 이모가 라스베거스에 갔다가 이시현 봤대! 근데 현장에서 거리 공연하고 있었는데··· 현장 분위기 완전 좋아서 ··· 아무튼 각설하고 이모한테 받은 동영상 파일 올린다. 아 그리고 여기 상주하는 기자언니오빠들! 이거 퍼가도 됨! BUT, 1면 안 박을 거면 후폭풍 각오하셈!

인터넷을 발칵 뒤집은 10분 길이의 영상엔 이시현이 라스베거스 한복판에서 행위예술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얘 미국에서 뭐하는 거냐?”

황 국장이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연속극으로 편성된 ‘미스터 미스터리’는 발로 차버리고 뭐 하나 했더니만, 미국에서 저런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니.

“회당 팔백을 준다는데도 까더니만, 돈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어.”

“어디 팔백이 성에 차나요. CF 하나에 얼만데.”

박태 피디는 노트북을 뚫어지게 보며 속삭였다. 황 국장 눈에는 이게 별 볼 일 없는 짓거리 같지만, 동영상 속 이시현은 한층 더 여유로워졌고, 한층 더 표정이 살아있었다. 이제는 스스로가 배우라는 걸 각인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촬영장과 무대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설사 그곳이 거리 한복판일지라도 말이다.

“이시현은 당분간 드라마 안 할 것 같아요.”

무명의 배우에게 드라마란 간절한 꿈의 무대다.

하지만 스타에게 드라마는 그저 선택지일 뿐.

“걔가 드라마를 하든 말든 상관없어. 타 방송국만 안 가면 돼.”

황 국장 말에 박태 피디가 피식 웃는다.

“근데 미국에서 전화 온 건 뭐야?”

“아, 채널 12요.”

“채널 12?”

“그쪽에서 이번에 전쟁드라마를 촬영한대요. 그것 때문에 얘기 좀 듣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걔들이 우리 드라마를 어떻게 봤어? 비디오로 빌려 봤나?”

황 국장이 차 한 모금을 호로로 삼키고 다시 물었다.

“그게, 오디션 본 배우한테 관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우리 드라마를 발견했대요.”

“오디션을 본 배우? 그게 누군······.”

황 국장 눈이 커진다.

“설마··· 아니지? 야, 이시현은 드라마 안 한다며!”

그 말에 박태 피디는 난처해서 이마를 긁으며 말했다.

“한국에서 안 한다는 거죠. 미국이, 한국이랑 같나요.”

**

「라스베거스 체류 이틀째 밤」

“데럴, 천천히 좀 가!”

뭐가 또 심술이 났는지 데럴이 주머니에 손을 팍 꽂고 걸음을 서두른다. 그 뒤를 클린턴이 바싹 쫓아갔다.

“여자 꼬시러 가는데 그렇게 찡그리고 갈 거야?”

이틀째 공연도 그럭저럭 끝냈다. 그래서 라스베거스를 떠나기 전, 파티가 있는 클럽에 가는 중이었다.

“그러는 너는 가기 싫다는 놈을 뭐하러 데려가?”

“먹히잖아.”

클린턴이 뒤를 힐끗 보고 속삭였다. 이시현과 로돌포가 부지런히 따라오고 있었다.

“뭐가 먹혀?”

“어제 거리에서 아시아 요정들이 쟤한테 껌뻑 죽는 거 못 봤어?”

“요정은 무슨.”

“동양인 여자들은 다 요정이야. 밤에는 날개를 떼고 잔다잖아.”

클린턴은 헛소리를 지껄이고 낄낄 웃었다. 분명한 것은 그 요정들이 이시현의 주위를 맴돈다는 거다. 어제와 오늘,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니 파티에 가서 그 요정들 중 하나 정도는 낚아챌 수 있는 것 아닌가.

“푸흐흐.”

라스베거스의 화려한 네온사인, 늘씬한 여자들, 돈의 빗장이 풀리는 밤 거리를 걸어 도착한 클럽 앞에는 건장한 가드들이 지키고 있었다.

“우리 4명!”

클린턴은 손가락 네 개를 펴고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런데 가드가 고개를 갸웃한다.

“4명?”

“예스!”

힘차게 외치고 뒤돌았는데, 클린턴의 등 뒤에는 땅딸보 로돌포 밖에 없었다.

“시현은?”

“아까 갔는데?”

“왓?”

“일이 있다고 갔어.”

로돌포가 헤헤 웃는다.

“이 멍청아!”

**

자식들이 하도 재촉해서 파티에 가던 길이었다.

클린턴의 눈을 보니 아주 그냥, 기대가 무척 크더만.

그렇게 클럽으로 가던 길에 어제 그 여자를 봤다. 똑같은 분장과 복장 그대로 어딜 바삐 가고 있었다.

“여기로 간 것 같은데.”

사람들 사이를 가로지르다 결국 분수대 앞에서 멈췄다.

걸음도 빠르지.

그냥 궁금해졌을 뿐이다. 어떤 사람인지, 왜 그러고 있었는지··· 그런 사소한 것들.

잠시 분수대에 앉아 쉬면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기억이 난다.

연기 선생들이 레퍼토리처럼 하는 얘기가 있다.

사람 구경하라고. 표정, 행동, 말투를 눈에 새겨보라고.

그래서 어느 때는 노숙인이 돼 서울역에서 종일 앉아있기도 하고, 어느 때는 백수가 돼 거리에서 주야장천 사람 구경을 할 때도 있다.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런 내가 매니저로, 엔터테인먼트 대표로, 그리고 이제는 배우로 여기 미국에 있으니 꽤 많이 돌고 돈 삶이다.

근데 이 여자 진짜 어디로 간 거야.

키를 봤을 때 보폭이 크진 않을 텐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결국 나는 그녀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이 밤이 샐 때까지 찾아 헤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자정에 밴드는 라스베거서를 떠나 유타로 넘어간다.

그런 마당에 그놈들은 파티에 갔다. 뭐 젊은 놈들이니 힘이 넘칠 수밖에 없겠지만.

나는 숙소가 아닌 쇼핑몰로 향했다.

전부터 박 상무한테 선물 하나 주려고 생각했었다.

“어, 저 남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져서 모자 하나를 급히 사서 눌러썼다.

어제오늘 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눈부신 조명 아래에 진열된 보석과 귀중품들을 구경한 끝에, 선글라스 하나를 사서 쇼핑몰을 나왔다.

그 무뚝뚝한 박 상무가 좋아할까 모르겠다.

“괜히 돌아다녔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그녀였다.

어제의 거리에서, 챙모자를 앞에 두고 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아마 저건 연기 이전에 그녀의 생계수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가 근처 벤치에 앉아 그녀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그녀의 공연을 방해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어제 일은 괜히 그녀의 무대에 끼어든 꼴이었다.

저 여자, 나이는 얼마나 됐을까. 미국인일까. 뭐 하는 사람일까.

궁금증을 가지고 지켜보는 동안 그녀뿐 아니라 또 다른 거리 공연도 곳곳에서 펼쳐졌다.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무대를 보인다.

이제 일어설까 했는데, 그녀의 자세가 갑자기 깨졌다. 천천히 내게 다가온다. 나는 당황해서 손을 내젓고 말했다.

“아,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궁금해서 왔어요. 당신은, 배우인가요?”

바로 이어진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답했다.

“배우 이시현입니다.”

“비비안이에요.”

“비비안?”

바람과 함께 사라진··· 그 비비안인가.

“어제는 미안했습니다. 괜히 끼어들어서.”

“아녜요. 나도 재밌었어요. 오랜만에 상대 배우의 호흡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내가 미안하네요, 나 같은 사람이랑 같은 무대에 서게 해서.”

영어가 서툰 나를 배려해 그녀는 천천히 또박또박 얘길 했다.

밤바람이 그녀의 색바랜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젊었을 적엔 나도 꽤 예뻤어요.”

누구나 다 젊은 시절이 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가면, 그때가 가장 아름다웠음을 깨닫는다.

“오래전에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바로 여기에서.”

비비안은 좀 전까지 서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어떤 영화였어요?”

“별 볼 일 없는 영화였어요. 라스베거스에서 우연히 만난 남녀가 하루를 보내는, 흔한 이야기였죠. 나는 카페 직원으로 출연했어요. 남자배우에게 커피를 건네는 작은 역이었죠.”

작은 역은 있어도 작은 배우는 없다.

‘정’ 엔터테인먼트 최재환 대표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지만··· 지금의 나는 그 흔한 말에 울림을 느낀다.

“저 자리에서, 남자 배우하고 여자 배우가 거리악사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 왈츠를 춰요.”

그 시절을 떠올리는 듯,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감독님이 즉흥연기를 요구해서 NG가 많이 났어요. 남자배우와 여자배우의 호흡도 썩 좋지 않았고.”

그녀의 말에 내 머릿속에 씬이 그려진다.

눈앞에 여자의 미소, 남자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 라스베거스 거리 / 낮

사랑을 속삭이면서 라스베거스를 관광하던 남녀의 눈에 바이올린을 켜는 거리악사가 보인다.

한가로운 오후의 햇살과 음악.

분위기에 취한 남자는 즉흥적으로 여자에게 손을 내민다.

“그래도 그 씬을 촬영하는 두 배우의 모습이 너무 부러웠죠.”

카메라 밖에서 주연배우의 연기를 바라보는 단역배우의 기분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주연배우가 된다는 건 쉽지 않으니까.

사실 외적인 부분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래서 10년, 20년 보조출연만 전전하는 배우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고.

“후후. 밤바람이 좋아서 그런가, 쓸데없는 얘기를 했네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녀가 다시 일어나며 내민 손은 여전히 회색 칠을 하고 있지만, 문득 나는 아름다운 여배우가 내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저와, 춤추시겠어요?”

놀란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눈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낡은 가방을 앞에 두고 바이올린을 켜는 연주자가 있었다.

무대가 있고, 배우가 있고, 음악이 있다.

잠시 나를 보던 그녀가 미소를 끄덕였다.

내 손을 붙잡은 여배우. 나는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를 지나 조심히 팔을 넣어 등을 받쳤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보며 속삭였다.

“준비됐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액션.”

근사할 필요까지는 없다.

우리는 즉흥적인 순간을 맞이한 거니까.

컷소리 대신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비안과 나는 정중한 자세로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유쾌한 시간이었다.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시계를 살피고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자정에 출발하니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최고의 하루였어요.”

“저도, 최고의 하루였습니다.”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 할 때.

“아, 이거.”

나는 비비안에게 카지노칩을 건넸다. 카지노에 한 번 들릴까 했지만, 괜히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 눈에 띌 수 있어 조심해야 했다.

카지노야 LA에도 있으니 뭐.

“잘 있어요.”

떠나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그때마다 손을 흔들고 있는 비비안을 볼 수 있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그녀를 오래 기억할 것 같았다.

**

-파파파! 받아라, 에너지파!

-꺄아!

“응?”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형비디오플레이어를 보고 있던 로돌포는 고개를 들었다. 부스스한 머리의 팻시가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팻시!”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든 로돌포에게, 그녀는 찌푸린 얼굴로 다가왔다.

“로돌포. 넌 어제 파티 안 갔어?”

나머지 놈들은 어젯밤 뭘 했는지 차 안에서 내내 졸더니 지금도 방안에서 뻗어 있다.

“갔는데?”

“가서 뭐했어?”

“애니메이션 봤지.”

파티장 구석에서 소형비디오플레이어를 봤을 로돌포의 모습을 잠시 상상한 팻시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로돌포가 그녀를 빤히 보고 묻는다.

“울었어?”

“응?”

찔끔 놀란 그녀가 제 볼을 어루만진다.

“아, TV에서 옛날 영화가 하길래.”

“뭐 봤는데?”

“One day, in Las Vegas.”

“아아. 나도 알아 그 영화.”

로돌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거 마지막에 여배우 죽잖아. 침대에서 조용히.”

**

똑똑.

문을 두드린 직원은 볼 가득 바람을 채워 넣었다. 빵빵해진 볼이 홀쭉해지는 동안 잠시 기다린다.

이 방의 장기 투숙객은 낮과 밤이 없다.

그래서 가끔은 자고 있을 때도 들어가 조용히 치우고 나온다. 물론 그만큼 긴 시간을 보면서 친분이 쌓였기 때문이다.

“비비안, 해가 중천에 떴어요.”

직원들은 손님을 비비안이라고 부른다.

정확한 정체는 모르지만, 거리 공연하는 걸 보면서 배우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다들 비비안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오늘은 많이 피곤하신가 보네.”

모텔은 식사가 조식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직원들은 비비안을 위해서 점심까지는 1인분의 식사를 남겨놓는다. 그러니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그녀는 내일 조식을 기다려야 한다.

“비비안, 식사하셔야죠.”

고민하던 직원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문을 열어둔 걸까.

커튼이 흔들리고 있었다. 커튼을 따라 움직이던 햇살은 침대에 드리워졌다.

비비안은 이불을 완전히 덮어쓴 채로 자고 있었다.

마치 산에 드리워진 햇살처럼, 이불 위 굴곡진 그림자를 바라보던 직원은 왠지 겁이 덜컥 났다.

“비비안?”

불러도 미동이 없다. 이불의 들썩임도 없다.

언젠가 비비안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약, 어느 날 방에 들어왔는데 자신이 죽어있다면 숲속의 잠든 공주처럼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을 거라고.

“비비안!”

직원은 침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손이 푹 들어간다. 그림자가 굴곡져 있던 이불 속에는, 베개가 들어있었다.

“여기서 뭐 해?”

문 앞에서 들린 소리에 직원은 고개를 들었다.

매니저가 서 있었다.

“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비비안이 아직도 자는 줄 알고.”

“그 여자 어제 안 들어왔어.”

“예?”

“지금 카지노에서 제공해준 펜트하우스에서 자고 있을걸.”

뜬금없는 소리에 직원이 눈썹을 들썩이자, 매니저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 여자 어젯밤 ‘휠 오브 포춘’으로 잭팟 터트렸대. 무려, 948만 달러.”

“세상에······.”

놀란 그녀를 보고 매니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젯밤의 그녀야말로 진짜 라스베거스의 여배우였던 거야.”

하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 One day in Las Vegas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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