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117화 (117/227)

< 고고, 강한놈들 (3) >

-우리 회사 어떻습니까?

“지에스요?”

-예.

성지훈은 순간 말문이 막혀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놀라서도, 기뻐서도 아니었다. 그저 의아할 뿐이다.

지에스에서 왜?

지에스는 연기자만 영입하는데··· 가수인 자신을 왜?

“오늘 일 때문에 그러신 거면, 이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지만, 성지훈은 최재환의 제안을 무턱대고 받아들일 순 없었다.

-갑작스럽겠지만, 전부터 지훈 씨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지에스는··· 연기자만 영입하지 않나요?”

-맞아요.

“그럼 지금······.”

-예. 지훈 씨 연기 활동을 전제로 영입하려는 겁니다. 물론 음반 활동을 배제하는 건 아니고요.

역시였나.

성지훈은 씁쓸한 얼굴을 숙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최재환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일단, 매니저와 상의를 해보시고 다시 얘기를 나누죠.

“예.”

끊어진 전화를 내려놓는 손이 무겁다.

성지훈은 차의 시동을 잠시 껐다. 히터에서 나오던 바람 소리가 멈추자, 그의 한숨이 무릎에 짙게 내려앉았다.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진가.’

지에스에 가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못해도 기사는 내주겠지··· 그걸 잘 알지만.

‘연기라니.’

실은 8.15특집드라마에서 하차했을 때, 내심 기뻤었다.

되지도 않는 연기를 하라는 노병기 본부장 때문에 미칠 노릇이었으니까.

그랬는데 지금 또 연기라니.

성지훈은 찌푸려진 얼굴을 쓸어내리고 오디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띡.

타이틀곡 ‘그리워서’ 뿐 아니라, 이번 4집에 수록될 전곡이 그가 직접 작사 작곡을 한 노래다.

지금까지의 가수 인생을 이 시디 한 장에 건다는 의미이며, 그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

‘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MR에 귀를 기울이면서, 잠시 눈을 감았다. 입술은 천천히 노래를 부른다.

“보고 싶어서 또다시 그대 사진을 꺼내요······.”

그대는 날 참 많이 사랑했는데

나는 이제야 그 사랑을 알 것 같네요

그대의 소중함 너무 늦게 알아 미안해요

“큭······.”

갑자기 울컥해서, 성지훈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콧잔등이 시큰거리더니 눈물이 쏟아졌다.

“노래··· 정말 부르고 싶다.”

무대에서, 팬들을 향해, 이제야 그 소중함을 아는데.

**

“지훈 씨가 무척 적극적이네요.”

작가의 말에 금 피디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운전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작년에 봤을 때는 허세가 있었는데, 오늘은 좀 다르긴 하더라.”

“그렇죠? 아까 팬한테 인사하는 거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뭐, 이것저것 겪으면서 배운 게 있나 보지.”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고, 금 피디는 다시금 차를 출발했다. 조수석에 탄 작가가 서류철을 뒤적거린다.

“일단 운동선수 사연은 성지훈 씨가 하고··· 근데 이시현은 진짜 연락 안 오나.”

“좀 기다려봐. 전화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하긴. 뭐 그래도 다행이에요. 그때 그 3W 매니저가 지금 이시현 매니저라니.”

“그러게. 나도 깜짝 놀랐네.”

금 피디는 아까의 전화통화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얼마나 놀랐던지, 통화하다가 수화기를 떨어트렸을 정도니까.

“피디님. 우리 어떻게 해서든 이시현 데려와야 해요.”

작가가 무척 적극적이다.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처음부터 좀 그렇게 하지.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못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야. 지금 팬 미팅이다, 노래다, 차기작이다, 장난 아니게 바쁠 텐데.”

“아니 아까 구내식당에서 국장님 못 봤어요? 이시현 잡아오라고, 이시현 차기작은 무조건 SBC라고, 난리더구만.”

“그거야 피디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지원은 못 해줄망정 맨날 들들 볶고 난리야!”

금 피디가 투덜대며 액셀을 밟자, 작가가 눈치를 보며 속삭인다.

“송 피디님한테······.”

생방송한밤의 송 피디.

“아 또! 그 인간 얘기는 왜 자꾸 해?”

“그러지 말고, 지금 SBC에서 유일하게 송 피디님이 이시현하고 얼굴도장 찍었잖아요. 그래서 다른 피디들은 송 피디님한테 등 비비려고 난린데······.”

“됐어, 됐어!”

금 피디가 툭툭 뱉자 작가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갑자기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괴성을 토하기 시작했다.

“아이 진짜! 정말 너무하시는 거 아녜요? 피디님이나 나는 철밥통 정직원이지만, 애들은 계약직이잖아요! 이번에 폐지되면 걔들 겨울에 굶어 죽어요! 아니면 피디님이 애들 다른 데 꽂아줄 거예요? 지금은 땅에 떨어진 인연이라도 붙잡아야 한다고요! 막내가 불쌍하지 않냐고요!!”

작가가 씩씩 숨을 몰아쉬며 금 피디를 노려보자, 끼익! 소리와 함께 차가 갓길에 멈췄다.

금 피디가 콧바람을 싸하게 내쉰다.

“전화!”

작가가 서둘러 휴대폰을 건네자.

띡! 띡! 띡···

금 피디가 송 피디 전화번호를 누르고 엄지를 바르르.

곁에서 보던 작가가 통화 버튼 누르는 걸 도우려고 손을 뻗었다.

“아, 안돼!”

금 피디는 서둘러 손을 내렸다.

전화를 뺏으려는 작가, 빼앗기지 않으려는 금 피디.

띠리리. 띠리리.

“응? 뭐지?”

금 피디는 뜬금없이 울린 전화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눈이 휘둥그레져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예, 매니저님!”

**

“일정표랑, 촬영콘티 보내주시고요. 대본도 있으면 그것도 보내주세요.”

온종일 전화를 붙잡고 있는 저 모습이, 이제는 내가 보는 최재환의 모습이다. 그나마 달라진 게 있다면 조금은 깔끔해진 옷차림과 머리 모양.

“피디님, 절대 몸 쓰는 건 안 됩니다. 시현이 곧 팬 미팅이고, 차기작 들어가야 해서 몸 다치면 안 돼요. 예. 그럼 내일모레 뵐게요.”

전화를 끊은 최재환이 한숨을 휴! 내쉬자, 뒤늦게 도착해 통화를 엿들은 강 실장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입을 열었다.

“야 시청률 망인 프로그램인데, SBC 본부장은 왜 거기에 이시현 나와달라고 부탁이야?”

“그 프로그램 막내 작가가 뉴월드 손녀란다.”

“뭐?”

강 실장의 눈이 댕그래진다. 나도 놀란 건 마찬가지.

방송국 막내 작가가 뉴월드 손녀라고?

“아니 무슨 재벌가 손녀가 방송작가야?”

“그러게 말이다.”

최재환이 팔자주름을 보이며 다시 말했다.

“어차피 음반 나가면 방송 한번 나가야 하니까, 뭐 프로그램 컨셉도 괜찮고··· 다만, 촬영이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라서 걱정이네.”

최재환이 수첩을 펴들고 내 스케줄 조정을 하는 사이, 파마 끼가 반쯤 풀린 미역 머리를 흔들며 강 실장이 나를 돌아봤다.

“시현이 너 ‘고고, 강한놈들’ 알아?”

“뭐 얼추 들었어요.”

금 피디와 통화하면서 기억을 떠올리긴 했다.

“아, 강 실장님 책상에 사인 올려놨어요.”

“그래?”

문득 생각나 말했더니, 강 실장이 얼굴에 화색이 돋아 나를 우러러본다. 어제 퇴근하면서 나한테 사인 열 장만 해달라고 부탁하길래 알았다고 했었다.

“아휴 고맙다. 요즘 니 사인 부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래. 친척에, 사돈에 팔촌까지. 아이고.”

푸념하면서도 강 실장은 기분 좋게 껄껄 웃었다.

스타와 친분이 있다는 건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일이니까. 심지어 그 스타가 자신이 맡은 연기자라면 그 기분 이루 말할 수가 없지.

“야, 니가 그렇게 자꾸 시현이한테 부탁하니까, 애들도 다 사인 부탁하잖아.”

“하··· 눈이 오려나.”

강 실장이 최재환의 핀잔을 못 들은 척 외면한다.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최재환은 녹음실 벽에 달린 시계를 살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오후 4시 10분.

“형은 그냥 가. 애들 퇴근시키고.”

“우오오! 진짜요? 앗싸!”

내 말에 주먹을 내지르고 벌떡 일어나는 한송이.

반면 서아린은 비스듬히 턱을 괴고 있다가 나를 슥 쳐다봤다.

“저는 집이 이 근처니까, 오빠 녹음 끝나면 갈게요.”

“너 집이 어딘데?”

“방배동이요.”

“그래?”

“예.”

나는 잠시 서아린을 바라봤다. 그녀의 안경 속 시선은 늘 차분하다. 옅은 갈색이지만, 선이 짙은 홍채는 매일 나를 비춘다.

“아린이 너 안경 벗으면 예쁘겠다.”

“예?”

그녀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응. 지금도 예쁘지만, 더 예뻐질걸?”

내가 확신하며 말하자 한송이는 입술을 빽 뒤집었고, 강 실장은 고개를 젓는다.

“와 시현이가 저렇게 말하니까 내 심장이 다 떨리네. 나도 한번 나중에 써먹어야겠다.”

“야, 너나 나나 저런 말 하면 성희롱이야.”

최재환이 피식 바람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게?”

“애들 오는 거 보고.”

4시까지 오기로 한 3W가 오지 않고 있는데, 그녀들이 여기 오는 이유. 앞으로 1월 중순까지 3W 멤버 슬기와 내가 호흡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번 녹음에 이어, 오늘은 마스터링 보충 작업을 하기 위해서 그녀들과 스케줄을 잡았다.

“아, 이제 오나 보다. 하여간 저 호랑이 자식들.”

우르르 발소리에 이어서, 지에스 연습생들이 유리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연습생들의 풋풋한 얼굴이 마치 밥 달라고 짹짹거리는 참새 새끼들 같은데, 그 옆으로 3W 슬기와 욱이 매니저가 웃으며 들어왔다.

예쁘장한 남자가 들어왔나 착각이 들 정도로, 슬기는 남자처럼 짧은 커트 머리에 노란 머리카락을 흔들며 들어왔다.

“야, 권혜선은?”

최재환이 입구를 쳐다보며 묻는다.

“오늘 레니 부모님 올라오셔서 언니하고 같이 집에서 저녁 먹어요. 와, 근데 오빠 너무한다. 레니는 안 물어보고 언니부터 챙기네.”

“걱정되니까 그러지 임마.”

“진짜루?”

“흠!”

슬기의 미묘한 시선, 최재환이 괜스레 헛기침하는 사이, 쿵쿵 발소리를 내며 나온 작곡가 이영태가 욱이를 탓했다.

“야, 왜들 이렇게 늦게 왔어?”

“차가 막혀서요.”

“이거 아주 매니저들 버릇이야. 뭐만 하면 차 막힌대.”

“쌩쌩 달려왔어요. 애들이 사고 날까 봐 얼마나 쫄았는지 아세요?”

“됐고! 시현 씨하고 슬기 빨리 들어가.”

우리는 얼떨결에 녹음실 부스로 끌려 들어갔다.

부스 밖에서는 연습생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우리를 본다.

연습차 가이드 녹음을 하러 온 아이들은 운 좋게 우리 앨범의 마스터링 과정을 구경하는 기회를 얻게 됐다.

-오늘은 마스터링한 거 몇 군데 보정하는 거니까, 지난번처럼 진 빼지 말고. 일단은 목 한번 풀고 들어가자.

이영태의 목소리가 들린다.

헤드폰을 쓴 슬기가 입술을 부르르··· 그 옆에서 나도 심호흡을 가다듬고···

이제 우리는 서로를 마주 봤다.

“오빠, 준비됐어요?”

“예.”

“근데, 우리 팀 명은 뭐로 할까요?”

무척 고민이라는 듯, 슬기가 노란 눈썹을 좁히고 나를 쳐다봤다.

“이건 어때요?”

“뭐요?”

호수처럼 맑은 눈이 내 미소를 비춘다.

‘너라서’의 노랫말처럼, 이제 우리는 서로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연인이다. 물론 연기지만, 나는 그녀에게 잠시 마음을 주려고 한다.

“썸.”

“썸이요? 그게 뭐야?”

“훗. 이따 설명해줄게.”

피식 웃고 헤드폰을 붙잡으며 그녀를 다시 바라봤다.

하얀 미소를 띤 그녀에게, 따듯한 미소를 보내면서, 노래를 시작한다.

**

“들어가.”

최재환은 한송이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봤다.

종일 참새처럼 짹짹거리더니만, 집에 가는 길은 독수리 비행하듯 잽싸다.

‘후······.’

한송이가 골목으로 쏙 들어가자 최재환은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얘는 전화도 안 주고.”

하루 동안 목소리를 못 들었더니만 가슴에 담이 걸린 것 같다.

일단은 주택가를 벗어나서 도롯가로 나왔다. 갓길에 차를 세우고, 그녀가 좋아하는 라디오 방송을 틀었다. 잔잔히 흐르는 음악에 귀 기울이며 전화번호를 누르는데.

띠리리. 띠리리···

‘응?’

낯선 번호는 늘 있는 일이다.

“여보세요?”

최재환은 라디오 볼륨을 줄이며 다시 물었다.

“누구십니까?”

-저··· 지훈이 매니저 오성식입니다.

“아, 예.”

-지훈이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계약조건은··· 솔직히 저희가 크게 바라는 건 없습니다. 그럴 입장도 아니고. 그쪽에서 잘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예. 일단은 얼마 전에 저희와 계약한 현승아 씨 계약조건이랑 비슷하게 맞출 겁니다. 뭐 그거야 계약서 보고 결정하시면 되는 거고요.”

-제가 입원 중이라 못 나갈 것 같아서요. 알아서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흠. 정 불편하시면 제가 병원으로 찾아갈까요?”

-아, 아닙니다. 그냥··· 부탁을 드릴 게 있어서요. 쉬운 거예요. 들어··· 주실 거죠?

“예, 편히 말씀하세요.”

뭔데 이렇게 거창하나 싶어서, 최재환은 등받이에 등을 깊숙이 묻고 기다렸다.

이제 라디오에서는 영화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성지훈 매니저의 숨소리가 연거푸 들리다 멈췄다.

-지훈이한테··· 살가운 목소리를 기대하지 마세요. 그 자식 원래 싸가지없어요.

“아··· 그래요?”

-그리고 까칠해요. 스타병은 이제 조금 고쳐졌는데, 그래도 그 성격 어디 가나요. 까칠해도 이해해주세요.

“아, 예.”

-때로 욱하기도 해요. 근데 말뿐이에요. 성질 내도 행동으로 못 보이는 놈이에요. 그러니까, 가끔 지랄하면 그냥 받아주는 척만 해주세요. 크흡!

“아······.”

-통닭을 무척 좋아해요. 다이어트 중일 때, 가끔 제가 먹는다고 가져다 놓으면 새벽에 허겁지겁 먹어요··· 그럼 모른척해 주세요. 크흡······.

“또··· 있나요?”

-칭찬을 좋아해요. 애가 세심한 게 있어서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들뜨는 놈이거든요. 그러니까, 칭찬 좀 가끔 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조별아란 이름은 절대 언급하지 마세요.

“조별아요?”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길고 긴, 매우 장황한 부탁이 끝났다.

최재환은 듣는 내내 성지훈을 향한 매니저의 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흐느낌이 들리는 휴대폰을 고쳐잡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제가··· 지훈 씨 편이 되겠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그리고 무슨 일이 있든.

< 고고, 강한놈들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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