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74화 (7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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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벗을 시간 (3)

“다들··· 나가 있어.”

팀장들이 머뭇거린 끝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병기와 이시현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그러나 발걸음을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문이 닫히자 노병기는 눈을 부릅뜨고 이시현을 마주봤다.

이놈 정체가 뭔지, 대체 어디서 뭘 듣고 온 건지, 수많은 궁금증이 입안에서 맴도는데··· 입술 밖으로 나간 건 겨우 하나.

“너 뭐야.”

“질문이 틀리셨는데.”

이시현은 속삭이듯 뱉고 노병기를 눈에 담았다. 술과 담배에 찌든 색 바란 자주색 입술, 칙칙한 피부톤, 넙데데한 얼굴, 찢어진 눈과 좁은 미간···

차마 못 볼 것을 본 마냥 이시현이 얼굴을 찌푸린다.

그러더니 한발 물러나 소파에 덥석 엉덩이를 붙였다.

“내가 어떻게 그걸 아냐고, 물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천연덕스러운 반문에 노병기는 뜨거워진 목을 쓸어내렸다. 좁은 미간을 더 좁히며,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 물고 소파에 마주 앉는다.

“후······.”

담배 연기 사이로 이시현을 바라보는데, 녀석이 웃고 있다.

“너··· 지금 멀쩡히 앉아 있는 거, 차 대표 덕인 거는 알고 있냐?

그렇지 않았다면 당장 요절을 내버렸을 텐데.

“아닌데? 내가 잘 나가서인데. 그렇잖아요? 지금 주목받고 있는 배우 이시현이 VVW에서 폭행당하다··· 그런 기사 뜨면, 감당할 자신 있어요?”

노병기는 두 눈을 깜빡였다. 그건 생각지 못했는데, 오히려 이시현에게 얘기를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든다.

“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 내가 누군지는 알고 이러는 거야?”

“아이고, 우리 입 아픈 얘기는 하지 말자고요. 왜 굳이 빙빙 돌아요? 서로 알 거 다 아는데.”

“뭘 알아 임마!”

“갈색이라고 해야 하나요, 나무색이라고 해야 하나요?”

노병기의 성난 고함에도 이시현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뭐?”

“크레도스 색상.”

노병기의 눈이 커진다. 담뱃재가 그의 무릎에 툭.

“시간은 새벽 3시. 장소는 서울 마포. 잘 달리던 크레도스가 신호위반을 했고, 그다음은··· 쾅!”

이시현이 순간 두 팔을 쫙 펼치자 노병기는 ‘흡!’ 숨을 들이켰다.

“그게, 작년 일이었죠?”

흔들리는 눈동자, 어디로 둘지 모르는 시선 처리, 바싹 굳은 얼굴 가죽, 연거푸 올라가는 목울대··· 더 삼킬 마른침도 없어 보일 때쯤 노병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너 죽일 수도 있어.”

그나마 흩어졌던 노병기의 시선이 다시금 뭉쳐 이시현을 노려본다.

지금이라도 전화 한 통이면 밑에 놈들 불러서 어디 하나 부러트리는 건 일도 아닌데··· 이시현 이놈은 미소를 띠고 있다. 대체 무슨 깡인지.

“아니죠, 그쪽 머릿속에 있는 생각은 그게 아니잖아요.”

“뭐?”

“이 자식이··· 어떻게 알았지? 그걸 알 수가 없을 텐데? 대체 어떻게?”

조롱.

“너 이 새끼!”

“그것도 아니면, 지금 이 사실··· 이놈 혼자만 알고 있는 걸까?”

생각을 들키면 사람은 반응하기 마련이다.

온몸에 힘이 빠진 것처럼 노병기의 어깨가 처진다. 그 상태로 다시금 담배를 입에 물지만 불똥이 반쯤 떨어져나간 담배는 희멀건 연기만 뱉을 뿐이다.

“이런.”

이시현이 소파 앞 테이블에 놓인 담뱃갑을 집었다. 담배 한 대를 빼더니, 그에게 다시 건네고.

“한대 더 태우세요. 내 얘기 끝날 때까지 입 열지 마시고··· 말했잖아요. 백진철만 내 앞에 데려오라고.”

**

내가 아는 노병기는 꽤 성가신 놈이었다. 날 때부터 피라미인 놈. 정해진 몸집에서 더 자라지 못해 성질과 잔머리만 있는 놈.

그 피라미가 너무 큰물에서 놀았다.

우물 안에서만 놀았으면 지 분수는 몰라도 적당히 흙탕물만 튀기고 말았을 텐데, 큰물에서 놀다 보니 지가 어디서 헤엄치고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를 몰랐다.

급기야 자신이 피라미인 것도 잊고 몸집 큰 물고기들 틈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내가 차 대표의 신임을 받아 지에스 C&C의 전권을 위임 받고 ‘정’ 엔터테인먼트로 사명을 바꾼 지 얼마 안 됐을 때, 계약 연장을 논의 중이던 배우를 VVW에서 채 갔다.

그것도 배우와 나 사이를 이간질해서.

사실 어떻게 보면 가벼이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배우야 많고 많으니까.

마음 떠난 놈은 다시 손잡아봤자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그 일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본보기.’

그걸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노병기와 그 주위를 모두 캤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놈 없으니까. 돈으로 못 찾는 건 없으니까.

오래 걸리진 않았다. 폭행에, 탈세에, 마약까지··· 심지어 녀석의 엉덩이에 새끼손톱만한 점이 있다는 것까지 금세 알아냈다.

그리고 또 하나.

카센터를 운영하는 노병기의 고향 후배가 부서진 크레도스를 끌고 왔던 노병기를 기억해냈다. 시기는 1999년 9월. 그런데 사고 부위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는 거다. 거기다 수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노병기가 차를 처분했다는 점까지.

이상해서 더 샅샅이 뒤졌다.

노병기가 카센터를 방문했던 시기의 서울에서 일어난 뺑소니 사건을 뒤졌다. 한 해 동안 일어나는 뺑소니 사건이 20만 건이 넘는데, 그 시기에 서울에서 일어난 뺑소니 사망 사건이 23건.

물론 증거는 없었다.

노병기의 크레도스는 이미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내게 증거는 필요치 않았다. 증거를 찾는 건 검사나 경찰이 할 일이고, 나는 그저 특정한 사건에 특정한 용의자를 집어서 알려줬을 뿐이다.

폭행과 탈세, 마약 등의 몇 가지 선물과 함께.

그리고 보름 뒤, 맥없이 끌려가는 노병기의 모습과 뺑소니 사고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들어간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통쾌한 순간.

그런데 더 대박은, 노병기의 뺑소니 피해자가 현직 검사의 가족이었다는 사실.

“너, 내가 술을 마셨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왜 모르겠냐. 잡히고 나서 다 밝혀지니까 음주운전이라고 아득바득 우긴 게 넌데. 모든 범죄에 술만 마셨다고 하면 형이 줄어드는 이상한 나라니까.

“노병기 본부장님. 나중에 혹 잡히더라도, 술은 무조건 마셨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형량이 줄어요. 사람이 죽었으니까.”

“이런 개세······.”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고요. 내가 알려줄게요. 그쪽 지금 답이 2가지밖에 없어. 날 죽이거나, 나하고 타협하거나··· 납치범들이 몸값 요구할 때 왜 피해자들이 돈을 건네주는지 알아요? 답이 없으니까.”

나는 지금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다. 그저 약간 미소를 띤 채로, 눈앞의 등신한테 현실을 명확히 알려주는 거다.

“그러니까 날 죽일 생각은 나중에 하고, 오소리 문제부터 정리하죠.”

“또··· 누가 알고 있어?”

“그거 중요하지 않다니까 그러네요.”

텁석!

노병기가 내 멱살을 쥔다. 하긴 오래 참았지. 한주먹도 안 돼 보이는 놈이 깡패 앞에서 깔짝거리고 있었으니.

“너 이 새끼!”

“잘 들어요. 당신이 누굴 죽였건, 어떤 개같은 짓을 했건 난 관심 없어. 오로지 지금은 오소리 일, 이것만 정리하면 돼.”

노병기의 일그러진 턱이 꿈틀거린다.

“이 손, 계속 이러고 있을 겁니까?”

그제야 노병기는 내 멱살을 다시 놓았다. 분이 안 풀려서 콧잔등을 찌푸리는 그를 보며, 나는 옷깃을 정리하고 편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이 게임은 시작부터, 아니 애초부터 내가 이길 게임이다.

나는 다 알고 있으니까. 뭐든지.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그게 누구인지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백진철이,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온다.

노병기는 넋 나간 얼굴을 들어 백진철을 쳐다봤고, 나는 일어나서 소매를 걷었다.

“부르셨습니까, 본부······.”

입을 여는 백진철, 다가가 손을 휘두른 나.

짝!

오랜만에 사람 뺨을 갈겼더니 손이 얼얼하다. 백진철이 비틀거리다가 멍한 시선으로 나를 보는데.

짝!

한 대 더 갈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닥에 주저앉는다.

동공에 지진이 난 백진철에게서 눈을 떼고, 노병기를 돌아봤다.

“본부장님.”

“······.”

“잠깐 자리 좀 비켜주세요. 걱정하지 마시고. 얼굴은 더 안 때릴게.”

노병기가 일어난다. 바닥의 백진철을 보고, 나를 보고, 힘없이 밖으로 나간다. 철컥 닫힌 문.

“그럼 지금부터··· 가면을 벗어볼까?”

**

[2000년 8월 23일 수요일]

화창한 날씨.

박용현과 함께 오전에 스케줄 하나를 마치고 회사에 출근했다. 오늘 스케줄이.

10시 ? 강남, A 스튜디오 B사 화보촬영

14시 ? 여의도, KIS 연예가소식팀 인터뷰

15시 ? 여의도, KIS 예능국 미팅

······

10시 스케줄을 11시로 미뤘다. 10시에는 백진철의 기자회견, 그 화려한 볼거리가 있으니까.

“오빠!!”

지상에 주차하고 건물 입구로 들어가는 길인데, 아침부터 십여 명의 여학생이 내 주위에 몰렸다.

“잘 지냈어?”

눈에 익은 아이들이 환히 웃으며 내게 달라붙는다. 근데 학교도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오빠 어떻게 해요?”

단발머리 여학생의 얼굴이 울상이다.

“뭐가?”

“오소리요. 오빠도 이번에 불똥 튀는 거 아녜요?”

“훗.”

나는 여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을 왜 하니. 지금 한창 재밌게 돌아가는데.

“니들은 아무 걱정하지 마. 나만 보면 돼. 알았지?”

“예!”

“근데, 니들 학교 안 가?”

“에이······.”

예쁜 이마를 톡 쳐주고, 기다리는 박용현을 따라 회사에 들어갔다. 내가 애들하고 잘 어울린다고 박용현이 감탄한다.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이시현 씨.”

“안녕하세요, 지현 씨.”

내가 이름을 불러서일까. 로비 여직원이 놀란 듯 짙은 눈썹을 세운다. 그 사이 박용현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누르는데, 입구의 자동문이 열리더니 백유진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유진 씨.”

로비 여직원의 인사에 백유진이 통통한 볼을 씨익 올리다가 나를 보곤 입을 쩍! 벌린다.

“안녕하세요, 유진 씨!”

내가 반갑게 인사하자 그녀가 어버버······.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띵!

“안타세요?”

“아, 전 카페에······.”

백유진이 오른손 검지로 머리 위를 가리킨다.

“그럼, 수고하세요.”

그녀를 두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우리는 4층에서 내렸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모여있는 매니저들과 최재환을 볼 수 있었다. 기콘부 성 팀장도 있고.

“아, 한다!”

시간을 제때 맞춰온 모양이다.

모니터링 TV에 백진철의 모습이 비친다. 강단에 선 놈이 마이크 앞에서 초췌한 얼굴로 서 있다. 손에는 A4 용지 한 장이 들려 있고, 얼굴에 카메라 플래시가 정신없이 쏟아지고 있다.

“저 쓰레기 자식······.”

매니저들 틈에서 누군가 속삭인다. 나는 팔짱을 끼고 최재환의 곁으로 다가갔다. 나를 힐끗 보더니,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다시 TV를 보는 최재환.

-안녕하십니까, 백진철입니다.

백진철이 입을 연다. 입술에는 떨림이, 눈동자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흔들린다.

-오늘 저는 어제 보도된 기사의 진실을 고백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기사의 내용은··· 모두 사실입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정신없이 터져서 백진철의 얼굴이 백지장보다 더 하얗게 보인다. 쏟아지는 질문들. 다시금 입을 여는 백진철.

-2년 전, 촬영이 끝나고 스태프들과 함께한 야외 회식 자리였습니다. 오소리 씨는 술을 마셔서 몸을 가누기 힘들었고··· 저는 인간으로서는 해선 안 되는 잘못된 행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그 일이 미수에 그쳤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사에 나온 ‘성폭행’ 이라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 일··· 이후 저는 자숙을 위해 방송 활동을 중단했고, 오소리 씨는 당시 저의 잘못된 행동으로 한동안······.

백진철이 입술을 다문다.

자식, 누가 연기자 아니랄까 봐 눈물을 뚝뚝 흘린다.

-한동안 많이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저는 겁이 나서 회사의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사죄합니다.

기자회견을 지켜보는 동안 매니저들의 숨소리가 사무실을 채운다.

“젠장, 저런다고 뭐가 달라져? VVW가 책임을 져야지! 백진철 저놈만 은퇴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오소리는 지금 이미지가 똥이 됐는데!”

분통을 터트리는 매니저들.

“조용히들 해.”

최재환이 소란을 잠재우고 TV 볼륨을 높인다.

-오소리 씨가 지금이라도 저를 고소한다면 저는 죗값을 달게 받을 겁니다.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앞으로 저는 은퇴 후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겁니다.

백진철이 손에 든 A4용지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최재환이 턱 끝을 쓸어내린다. 일단 급한 불을 껐다는 표정인데, 그 사이 TV에서는 백진철에게 질문이 쏟아지고 있었다.

-백진철 씨! 지금 피해자가 오소리 씨 한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가 있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오소리 씨와 합의를 했다는 건 어떤 합의를 뜻하는 건가요?

-팬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더 이상은 들어도 쓸모없는 얘기들.

-물의를 일으킨 점, 국민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 상처받은 오소리 씨에게,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찌푸려진 얼굴의 최재환이 리모컨을 손에 쥔다. 그러더니 볼륨을 줄이는데··· 내가 그 리모컨을 뺏었다. 그런 다음 오히려 볼륨을 더 키웠다.

“뭐해?”

“아직이야.”

쇼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허리를 굽혔던 백진철이 자세를 바로 한다. 마른침을 삼키고, 아랫입술을 적시고, 그런 다음 가슴을 들썩이고.

-한 가지, 더 고백할 게 있습니다.

그 목소리에 최재환이 다시 TV를 향해 시선을 가져간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VVW라는 연예기획사에 소속된 배우입니다. 제가 있는 VVW에서는··· 탈세, 마약, 그리고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

다들 잘못 들었는지 알았을 거다.

오죽하면 백진철의 얼굴을 두드리던 카메라 플래시가 잠시 멈췄을까. 이는 최재환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멍하니 본다.

훗.

왜? 이런 거 처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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