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매니저-75화 (75/227)

────────────────────────────────────

< 가면을 벗을 시간 (4) - 여기까지 무료 분량 >

[여의도 KIS 별관]

한송이가 별관 입구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다. 파란색 숄더백을 어깨에 걸치고, 더위에 지친 얼굴을 숙인 채로 입술을 푸르르 떨고 있다.

“가자.”

동그랗게 말린 그녀의 앞머리를 톡 건들고 KIS 별관에 발을 들였다. 생각해보면 내 집보다 많이 들락거린 길인데, 지금은 왠지 낯선 느낌이 든다.

“안녕하십니까!”

드라마국에 올라오자마자 큰 목소리의 인사로 내가 왔음을 알렸다. 마침 박태 피디가 나를 알아보고 창가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여, 시현 씨.”

“안녕하세요, 감독님.”

“고생 많았지? 우리도 난리였어.”

KIS 방송국도 오소리 일이 꽤 신경 쓰인 모양이다.

별관 입구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얼마나 많은 시선이 달라붙던지. 쟤가 지에스 아니야? 오소리 낙하산이라던데? 등등의 시선과 수군거림.

“누구야? 새 매니저야?”

박태 피디가 주름진 눈을 올려 박용현을 쳐다봤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부터 이시현 매니저를 맡은 박용현이라고 합니다.”

“어, 반가워요. 근데 김 작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바로 움직이자고.”

우리는 곧장 회의실로 이동했다. 파티션 너머 책상에서 각자의 업무를 보던 작가들과 피디들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개중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릴 쳐다보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하고 있는데··· 이러다가 목에 담 오겠다. 역시 방송국은 배우가 자주 올 곳이 못 된다.

회의실에 들어가자 우릴 기다리고 있는 김은수 작가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동그란 안경 속 단단한 시선이 나를 바라본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내가 넙죽 인사하자 그녀가 엉덩이를 살짝 들었다가 앉았다. 그러자 박태 피디가 그녀 곁의 의자를 빼서 앉으며 운을 뗐다.

“시현 씨, 연속극 촬영은 처음이지?”

“예.”

내 대답에 김은수 작가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입을 연다.

“연속극은 단막극과 많이 다른 거 알죠?”

“예. 잘 압니다.”

대답이 마음에 드는 건지, 아니면 부족한 건지··· 김은수 작가는 고개만 끄덕인다. 그나마 박태 피디가 이것저것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우선은 출연 배우들의 변동.

이시하라 유이 뿐 아니라 주요 배역의 연기자들이 출연을 고사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처음부터 연속극으로 기획된 작품이 아니었기에 배우들이 스케줄을 조정하는데 어려운 점이 있었다.

그리고 KIS에서 내게 책정한 출연료는 회당 3백.

2016년에 잘나가는 신인배우가 회당 5천을 받는 것에 비하면 현저히 낮지만, 지금 물가는 이 정도가 적정이기에 딱히 불만은 없다.

“지난번에 너무 잘해줘서, 기대가 커요.”

“아니에요. 작가님이 박춘삼을 너무 잘 만들어주신 덕분이죠.”

“처음 유 작가님에게 시현 씨 얘기 들었을 때, 사실 긴가민가했는데··· 우리가 촬영 전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르죠?”

“왜 모르겠어요.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

나 역시 살얼음판 위에 있었으니 작가나 감독의 걱정은 오죽했을까 싶다.

“영화는 언제 들어가요?”

“아직 확정된 건 없습니다.”

내 대답에 박용현이 불쑥 끼어든다.

“절대, 드라마에 지장 주지 않을 겁니다.”

“그래야죠.”

김은수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색빛이 담긴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넘기며 박태 감독을 돌아본다.

“감독님, 더 하실 얘기 있으세요?”

“흠··· 일단 일정은, 모레 뒤풀이하고 다음 주에 정식으로 ‘우리 오빠’ 편성 소식을 외부에 알릴 거야. 배우들이야 이달 안에 캐스팅하면 되는 거고, 일단은 시현 씨를 중심으로 밀건대······.”

그 말인즉, 지금 한창 잘 나가니 겸사겸사 윈윈하자는 건데, 약간의 변수가 발생했다.

“그 낙하산 얘기 말이야.”

최초 보도된 오소리 기사에 8.15특집드라마와 내가 언급됐다. 최재환이 손 쓴 덕에 해당 기사는 정정 됐지만, 이미 묻은 먹물이 쉽게 지워질 리는 없다.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촬영 잘했잖아? 배우는 연기로 보여주는 거야.”

“예, 감사합니다.”

다행히 우려와 달리 박태 피디가 미소를 보인다.

한때는 이 인간을 또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가까이서 겪으니 인간적인 면도 있구나 싶다. 아니면 내가 박태 피디의 코드에 맞는 걸까.

“좋아, 계약에 관한 세부 사항은 그쪽 회사와 얘기할 거고··· 오늘은 이만.”

“예.”

깔끔하게 끝난 미팅. 순풍에 돛단 듯이 잘 흘러가고 있으니 기분이 싱숭생숭한데, 회의실을 나오는 길에 웅성웅성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모니터링 TV에 꽂혀있는 시선들. 화면에는 김포공항이 비쳤다.

-잠시 후 배우 오소리 씨가 나옵니다.

마이크를 쥔 리포터의 긴박한 목소리에 이어서 카메라가 공항의 전경을 담는다. 마중 나온 팬들, 오소리를 픽업하려 대기 중인 지에스 식구들.

오소리 팬이 저렇게 많았던가.

플랜카드도 보이고.

[사랑스러운 여배우 오소리, 우리는 그녀를 응원합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지금 전 국민의 시선이 오소리에게 쏠렸다. 그녀는 피해자고, 억압받은 피해 여성이며, 아픔을 이겨낸 강인한 여성이라는··· 숱한 이미지와 기사 타이틀이 달라붙은 상황이니 공항 입국장의 열기는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입국장에 오소리 씨가 나옵니다!

기자의 상황 설명에 이어 환호성이 터진다.

오소리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고, 최재환이 보인다.

포토라인에 오소리가 서자 강 실장이 곁에서 기자들의 녹음기를 들었다. 환호성이 잦아들고, 카메라 플래시가 잠잠해진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오소리.

-안녕하세요. 배우 오소리입니다.

그녀는 꾹 다문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많이 지친 모습이다.

-언니 힘내세요!

-오소리 파이팅!!

-우리가 곁에 있을게요!

그녀를 응원하는 목소리들이 공항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 끼쳐 드린 점, 정말 죄송합니다.

목이 메는지 그녀가 입술을 깨문다. 미소를 띠고 있는데,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결국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흐르는 모습에 TV를 지켜보던 작가들이 분개했다.

“아우 백진철 개새끼!”

“그러게 말이야. 근데, 얘기 들었어? 노병기 뺑소니 피해자가 현직 검사의 가족이래.”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끝난 거지.”

작가들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오소리의 모습을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그런 뒤에 발길을 돌렸다.

“가요.”

TV에 집중하던 한송이와 박용현이 서둘러 뒤쫓아 온다.

“이제 오소리 씨 어떻게 돼요?”

“글쎄··· 좀 지켜봐야겠지.”

한송이의 질문에 박용현은 대답을 망설였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다.

분명 이번 일로 오소리는 다시 살아날 거라는 걸.

최악의 스캔들이지만, 오히려 그녀를 향한 대중의 관심은 높아졌다.

다행히 스캔들이 길게 끌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의 피로도 역시 높지 않았다. 빠르고 깔끔하게, 그녀는 피해자라는 인식이 자리잡혔다. 이걸 활용하느냐 못하냐는 이제부터 회사와 오소리의 몫이다.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래요.”

잠시 화장실에 들어온 나는 바로 세수부터 했다.

‘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오늘따라 너무 낯설다.

오소리의 스캔들 이후 나는 정 엔터테인먼트 대표 최재환으로 돌아갔다. 그때처럼 행동하고, 그때처럼 생각했다. 그동안 나라는 놈이 참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제자리를 찾아가는 건 너무도 쉬웠다.

‘너, 노병기 본부장이 널 지켜줄 것 같냐?’

그날 노병기의 사무실에서 백진철에게 물었다. 여태 당한 놈이 제일 잘 알만한 질문이었고, 현실을 깨닫게 해주는 질문이기도 했다.

노병기에게 버림받은 백진철.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사면초가에 빠진 백진철은 혼자서 쏟아지는 화살을 맞고 있느니 화살받이가 돼 줄 노병기 뒤에 숨는 게 낫다는 걸 금방 깨우쳤다.

물론 기자회견 전까지는 노병기나 백진철이 언제든 마음을 바꿀 수 있었지만, 두 놈 모두 오소리 일은 관심도 없고 그저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급급해서 다른 생각을 하질 못했다.

뚝.

턱을 타고 흘러 떨어지는 물방울을 닦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생각하고 있다.

왜, 무엇 때문에 오소리를 도운 걸까.

그 이유를 생각하며 화장실에서 나오자 박용현이 혼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송이는요?”

“먼저 차에 갔는데.”

“이제 말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박용현이 바로 말을 놓고 활짝 웃는다. 신이 난 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전화가 울렸다. 누구지.

“여보세요?”

휴대폰을 귀에 붙인 나를 박용현이 쳐다본다. 그 묘한 시선 뒤로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왔다. 나를 스치는 사람들의 시선,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에 신경이 쓰여 상대방의 목소리가 앵앵이듯 들린다.

“여보세요? 얘기하세요.”

-이시현 씨?

처음 듣는 목소리.

“예 맞습니다. 누구시죠?”

엘리베이터에 먼저 탄 박용현을 바라보는데, 상대의 목소리가 들린다.

-반갑습니다. 가경입니다.

**

“가서 쉬어. 아무 걱정하지 말고.”

최재환은 계속 미소를 보였다. 오소리를 안심시키려 최선을 다하고 있다.

“팀장님··· 고마워요.”

“고맙기는. 내 일 한 거야.”

“그래도요.”

오소리의 미소를 최재환이 잠시 마주 본다. 그러더니 꺼낼까 말까 고민했던 얘기를 꺼낸다.

“정 고마우면, 윤 부장님한테 전화 한 통 해.”

“예?”

오소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쳐다본다. 윤 부장은 지금 휴직 중인데.

“일 터지고 신문사마다 찾아가서 난리 쳤대. 기사 내리라고.”

그 말에 오소리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바보같이. 갈려면 VVW를 찾아갔어야지.”

“그건 아마도, 맞을까 봐 안 갔을 거야.”

강 실장의 농담에 오소리가 쿡 웃는데,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찔끔 배어 나온다. 최재환이 그 모습을 보다가 박수를 쳤다.

“자, 강 실장은 오소리 잘 바래다주고 회사로 바로 와. 회식이니까.”

“팀장 되더니 법인카드를 남발하네.”

“이시현이 쏘는 거야 임마.”

오소리의 차가 떠나자 최재환은 공항에 남은 매니저들도 각자의 일터로 보냈다. 그런 뒤 혼자 남아 카니발에 몸을 실었다.

‘후······.’

최재환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정신이 없었다.

일 터지고 기사부터 막은 뒤에 노병기에게 연락을 했다. 만나서 매듭을 지으려고 했더니, 노병기가 바로 기자회견을 한다며 고개를 숙이고 온 것이다.

절대 그럴 놈이 아닌데, 기자회견에서 해명할 내용도 알아서 팩스로 보내왔다.

이런 귀신이 곡할 노릇이 있나. 대체 무슨 염병할 소리를 하나 싶어서 이유를 물었는데 전화는 뚝···

그래서 현재 백진철의 매니저이자 작년에 지에스를 퇴사한 녀석에게 바로 전화했다. 그렇게 걸어도 안 받더니만 노병기와의 통화 뒤에는 전화를 받았다.

녀석의 말로는 현재 백진철과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인데, 일단 VVW에서는 백진철의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고 답을 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하는 말이··· 이시현이 왔다 갔다는 거다.

“하....”

찝찝함.

복잡한 생각을 뒤로하고 최재환은 차에 시동을 걸어 공항을 빠져나왔다.

회색 카니발은 회사가 아닌 병원으로 향했다.

권혜선이 신경 쓰여서 들른 건데, 최재환의 얼굴이 무겁다.

아픈 사람들, 병원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 병문안 온 사람들을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혜선아······.”

노크를 하고 병실에 들어갔는데, 권혜선이 보이지 않았다.

수술은 내일인데.

“화장실에 갔나?”

의미 없이 혼잣말을 뱉으며 주위를 보던 최재환은 이내 병실 안을 서성였다. 흩어진 물건들과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침대도 약간 삐뚤어져서 제대로 맞추고, 이불도 한번 털어주고, 창문도 열어 공기 좀 환기하고··· 정신없이 치우고 나서야 최재환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응?”

소파에 돌돌 말린 게 굴러다녀서, 뭔가 싶어 손을 댄 최재환이 화들짝 놀라 손을 떼더니··· 괜스레 주위를 둘러본 끝에 멀찍이 치운다.

“이시현이나 혜선이나··· 자식들이 치우질 않아. 훗.”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본다.

오후 4시.

피곤해서 잠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제 백진철의 기자회견을 보고 난 후 기콘부 성 팀장과 얘기를 나눴는데, 조금 충격을 받았다.

차 대표가···

사실은 오소리를 버리려 했었다는 얘기.

기콘부를 담당하고 있는 변혜경 이사와 만나서 그렇게 진행을 하려 했다는 거다.

빨리 포기하면 그만큼 잃는 것도 적어지니까.

차 대표는 오소리의 일이 이렇게 빨리 끝날지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건 최재환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최재환의 눈에 보인 시계는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후······.”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요 며칠 회사에만 틀어박혀서 제대로 잠을 못 잤으니까.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는데.

“응?”

권혜선이 바로 옆에서 그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어, 미안. 기다리다 잠깐······.”

“좋아해요.”

“어?”

“좋아해요.”

뭘 잘못 들었나 싶어서 두 눈을 깜빡이는 최재환에게 아련한 표정의 권혜선이 보였다. 미소를 머금은 건지 슬픔을 머금은 건지 모를 입술로 그에게 다시 말한다.

“좋아해요. 오빠.”

“혜선아······.”

< 가면을 벗을 시간 (4) - 여기까지 무료 분량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