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
29. 고립되는 도시(1)
“세은 씨, 유럽에서 답신이 왔습니다.”
이지호의 말에 세은이 물었다.
“거절인가요?”
“음…… 그게 조금 애매합니다.”
이지호는 유럽이 전해온 답을 세은에게 전달했다.
“정보 공개는 가능하나, 직접 와서 보랍니다.”
세은이 대답했다.
“보내줄 수는 없단 말이군요.”
“예.”
“이상하네요. 분명히 실장님 판단으로는 거절할 거라고 하지 않았나요? 제 생각도 그렇고요.”
유럽 연합이 태국에서 보여준 태도에 따르면, 정보를 보내주지 않는 건 거의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럽에 협조를 요청한 것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정보를 보내주지 못하지만 직접 방문하면 보여준다고?
태국에서 막스가 세은을 초청했던 것과 맞물려 무엇인가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겨왔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지호가 세은에게 물었다.
그러나 세은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입을 열었다.
“직접 가죠.”
“직접 가시겠습니까?”
이지호가 약간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물론 세은 씨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직접 와서 보라는 것 자체가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압니다.”
세은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혼자 가겠습니다.”
“혼자 말입니까?”
“굳이 수상한 곳에 누구를 데려갈 필요도 없고, 더 이상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몇 번이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세은이 너무도 자신의 말과 어울리지 않게 싱그러운 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한 번 움직여 주겠다고요.”
꿀꺽―
그런 세은의 웃음을 보며 이지호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 *
“헤이! 여기야!”
브뤼셀 공항에 내리자 한 명의 여자가 세은을 맞이했다.
“네가 세은 도?”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에 파란 눈, 약간은 각진 턱을 지닌 여자가 세은을 훑어보며 물었다.
여자와 동행한 통역가의 통역을 들은 세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예상과 전혀 다르게 생겼네?”
약간은 우락부락한 모습을 생각했던 애슐린 피어스는, 생각보다 여리여리한 세은의 모습을 보고 살짝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세은을 안내해서 이동을 시작했다.
“일단 반가워, 나는 애슐린 피어스야.”
“도세은.”
“그런데 혼자 온 거야?”
세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뭐야?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굴어.”
피어스는 세은을 팔꿈치로 툭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
“나중에 대련 한 번 어때? 응? 네가 그렇게 강하다며?”
세은은 자신을 툭툭 건드리는 피어스의 행동에 짜증이 치솟았다.
일부러 이런 놈을 보낸 건가?
경우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자신들이 초청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모습을 보고도 통역 역시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세은은 자신을 대하는 유럽 연합의 태도를 여실히 느낄 수가 있었다.
‘일단 정보를 보고 나서 보자고.’
어차피 실력을 보여줄 시간은 차고 넘쳤다.
당장은 모든 정보를 모으는 게 중요했다.
쉽게 정보를 보여주진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보다 나중에 일으키는 게 더 나았다.
계속된 자신의 도발에도 세은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금방 싫증이 난 피어스가 투덜거렸다.
“에이. 재미없어. 너 사실은 약한 거 아니야? 이렇게까지 하는데 반응이 없어?”
피식―
통역이 피어스의 무례한 말까지 정확하게 전달해 주었다.
이건 한마디로…….
‘자신 있으면 덤벼보란 얘기지.’
대충 상황을 보니 유럽 연합에서도 꽤 강하고, 자리까지 차지한 사람인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원하는데 말이야, 한 번 보여줘야지.’
탁―
준비된 차량에 탑승한 세은이 나직이 통역에게 말했다.
“원하는 대로 자료를 다 보고 나면 상대해 줄 테니, /덤비라(기다리라)/ 해.”
통역은 기다렸다는 듯이 세은의 말을 전달했다.
“아, 진짜? 나중에 겁난다고 도망가기 없기다?”
피어스는 세은의 말에 반색했다.
세은은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할 소리.”
“아싸! 신난다. 재밌겠다.”
주먹을 꽉 쥐고 신나하는 리액션을 보이는 피어스를 보니, 통역을 듣지 않아도 대충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세은을 태운 차는 어느새 EU 본부에 도착했다.
피어스와 통역의 무례와 달리, 세은은 귀빈 대접을 받으며 빠르게 안으로 입장했다.
그리고 바로 하나의 방으로 안내 되었다.
“죄송합니다. 현재 협의회에 긴급한 안건이 올라와 손님을 이곳에 모셨습니다. 우선 원하시는 자료가 있으면 이곳으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차라리 세은으로서는 더 잘 된 일이었다.
세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원하는 자료를 요구했다.
“최근 평소와 다른 경향이나 환경을 보이는 지역이나 도시에 대한 모든 자료.”
“그렇게 말씀하시면 자료가 너무 방대해집니다. 정말로 다 가져다드릴까요?”
“물론. 가장 최근 자료부터.”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턱―
잠시 후.
세은이 요구한 자료가 세은의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내 세은은 잘못된 점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다 영어잖아.”
한국에서야 정보가 다 번역되어서 왔지만, 이곳에 있는 정보가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세은이 순간 당황했다.
“이걸 어떻게 하지? 통역 보고 읽어달라고 해야 하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황에 세은은 고민에 빠졌다.
“끄응……”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을 섭외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결국 세은은 대기하고 있는 통역을 불러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받는 방법을 택했다.
* * *
똑똑―
한참을 통역과 보고서 파악에 매진하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일일이 요약해서 읽어주다 보니 상당한 기력이 소모된 통역은 누군가 방문하자 매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지쳐서 세부적인 내용은 번역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쉬는 시간은 가질 수가 있던 탓이었다.
거의 지쳐가던 통역을 구해준 사람은 로비 웻지의 비서관이었다.
“세은 도, 협의회를 만나러 가실 시간입니다.”
통역이 매우 지쳐서 성의가 없단 것을 느꼈기 때문에, 세은은 별다른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마련해야 할 것 같았다.
“한국의 세은 도입니다.”
세은이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 있던 수많은 눈이 세은을 쫓았다.
여러 명의 시선이 세은을 향했지만, 세은은 아무런 부담이나 압박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이 담담히 걸음을 옮겼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세은은 안내 받은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의 타원형 탁자의 윗자리 중에 하나였다.
가장 상석은 왜인지 비어 있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협의회의 로비 웻지입니다. 안타깝게도 회장님은 현재 부재중이라 제가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괜찮아.”
자연스럽게 나오는 세은의 하대에 실내의 인원들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그러나 세은은 그런 사람들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굳이 초대까지 한 이유가 있을 텐데?”
오래 시간을 끌 생각도 없고, 여유도 없었다.
지금은 사라진 마왕을 찾는 일이 가장 급선무였다.
세은의 직설적인 말에 로비 웻지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휘익! 대단한데? 아까 공항에서완 전혀 다른 사람 같아.”
피어스는 대담하게 나오던 세은의 태도에 휘파람을 불었다.
“많이 급하신 거 같군요.”
로비 웻지가 자신의 안경을 손끝으로 치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보고 받은 바로는…… 치앙마이의 게이트에 마왕이 있었고, 현재 게이트에서 사라졌다. 맞습니까?”
세은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리고 이 마왕은, 미국의 오션 시티의 참사를 만들어 낸 주범과 같은 수준의 재앙이라고 보고를 받았습니다.”
세은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습니다. 그 정도라면 급한 것도 이해가 갑니다.”
웻지가 평온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저희 생각에는 유럽에 오션 시티와 같은 사태가 일어났으면 저희 힘만으로도 수습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웻지의 말은 작았지만,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세은이 너무 한심해서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웻지가 계속 말을 이었다.
“다른 그 어떤 단일 국가보다 많은 최상위 각성자. 수많은 게이트 토벌 경험. 유기적인 협력 및 최첨단 무기의 도움. 사실 미국도 갑작스럽게 일이 터져서 그렇지. 한 번 당한 이상, 혼자서 방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웻지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가 정보를 제공하면서 당신을 초청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여기서 잠시 머뭇거리던 웻지가 결국 말을 꺼냈다.
“그래요. 당신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들려오는 정도의 실력자가 맞을까? 각성자를 육성했다는데 그 방법은 뭘까?”
솔직하게 생각을 털어놓던 웻지의 모습에 세은이 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순순히 부른 이유를 털어놓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웻지가 빙긋 웃었다.
“안 그래도 이 자리에 있는 레이디 애슐린과 대련을 하기로 하셨다고 하는군요.”
“그러려고 저 여자를 보낸 거 아닌가?”
“하하. 사실 그렇기는 합니다. 상당히 무례했나 보죠?”
“모르고 보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세은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좋아. 하지만 나도 조건을 걸어야겠지.”
“무슨 조건을 원하십니까?”
세은이 조건을 건다고 하자 웻지가 물었다.
과연 세은이 자신들에게 걸 수 있는 조건이 뭐가 있을까?
온전한 정보의 제공?
동남아에서의 철수?
그 어느 것이라도 상관없었다.
실제로 보니 피어스가 질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세은에게서 딱히 커다란 힘이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은의 입에서 나온 조건은 침착하고 냉정한 웻지의 이성을 순간적으로 마비시키기에 차고 넘쳤다.
“다 덤벼.”
“예?”
실내의 모든 인원들이 통역을 전달 받고도, 세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있었다.
심지어 통역도 자신이 제대로 통역을 한 것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여기 있는 인원 전부 덤비라고.”
“그게 무슨……?”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웻지가 물었다.
그러나 세은은 이미 공항에서부터 짜증이 나 있던 상황.
거기에 보고서를 통역이 번역하는 대로 일일이 귀로 들으며 스트레스가 상승해 있었다.
거기에 이런 말만 정중한, 매우 건방지기 짝이 없는 제안을 받으니 제대로 보여줄 필요를 느꼈다.
우웅―
세은이 더 이상의 말 대신 한 손에 신성력을 모아 앉아 있던 탁자를 내려쳤다.
콰직!
순식간에 기다란 타원형의 두터운 탁자가 반으로 쪼개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 저런!”
웻지는 물론, 다른 협의회 인원들이 노성을 지르며 세은을 노려보았다.
“뭐야, 얘 미친놈이야?”
피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거 참. 조잘조잘 말들 많네.”
세은은 씩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기회 줄 테니까, 먼저 덤벼.”
통역을 듣지 않아도 세은이 무슨 말을 하는지 실내의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이이익!”
분노와 모욕감으로 모두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일단 저 새끼 잡아!”
그리고 누군가의 격양된 외침과 함께, 세은에게 달려드는 인원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