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28. 비어 있는 게이트(3)
마왕이 게이트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한 세은은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건 단순히 마왕 한 명이 게이트 밖으로 나간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같은 사례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었고, 게이트란 한정된 공간이 아닌 곳에서 그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오션 시티의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적어도 도심에서 전투가 일어나면 인명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건 자명한 일이었다.
궁극적으로 게이트의 발생을 예방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지만, 지금은 당장 게이트에서 벗어난 마왕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야 했다.
세은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이지호에게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고 연신 신신당부를 하며 지시를 내렸다.
미국, 일본, 중국 등 협조를 구할 수 있는 국가에 연락을 취해서 최근의 이상 상황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모아오게 했다.
세은의 지시를 들은 이지호가 자료의 양이 매우 방대할 것이라고 난색을 표했지만, 세은은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그렇다고 지구를 샅샅이 뒤지는 것보다는 훨씬 효율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만약 몸으로 뛴다고 해도, 찾으러 다니는 동안 마왕이 계속 한곳에 머문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리고 역시나 마왕에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은 미국의 정보가 빠르게, 그리고 방대하게 전달되어 왔다.
비록 태국 치앙마이의 게이트에서 사라졌기는 하지만, 미국도 완전히 안전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중국과 러시아에서도 미국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자료를 보내왔다.
펄럭―
“끄응…….”
이지호와 정보를 취합하고, 분석하던 세은이 침음을 흘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세은이 읽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자 이지호가 물었다.
세은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답답함을 감추지 않고 대답했다.
“보면 정보들이 다 주변국에 대한 얘기지, 본인들 국가에 대한 얘기는 별로 없군요.”
“하하……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 대외비라도 보내준 게 다행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국을 제외하고는 쓸 만한 정보가 거의 없네요.”
케인이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국을 제외하고 다른 국가에선, 대외비 유출을 우려해 주변 국가와의 국경지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점적으로 보냈다.
그 덕분에 러시아의 자료에서는 중국 정보를, 중국의 자료에서는 러시아의 정보를 더 많이 보게 되는 진풍경이 일어났다.
“다른 국가들은 보내주지 않는답니까?”
“일단 중국과 미국이 아태 지역에서의 영향력 행사에 도움을 주고는 있습니다만…….”
“동남아에 유럽 세력이 들어와서 힘들겠네요.”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중국은 본인들 정보를 제대로 주지 않으면서, 이런 쪽으로는 협력을 하네요.”
“뭐, 자국의 민감한 정보는 주기 어려워도 세은 씨에게 밉보이기는 싫단 태도일 겁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돕는 게 다행이네요.”
대저 마왕이란 놈들은 아주 짧은 순간에도 민간에 커다란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 놈들이 숨어 있다가 한 번에 밀물처럼 움직이면 얼마나 피해가 클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렇죠. 그런 놈들이 밖으로 나왔다니 상황이 매우 심각한데 말입니다.”
이지호도 세은과 함께 마왕을 대면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는 편에 속했다.
순식간에 자신과 동료들의 정신을 조종해 서로를 상잔하게 만들었던 경험은, 꿈으로라도 나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되는 잊고 싶은 기억이었다.
“일단 미국과 중국의 도움을 받아 가능한 국가에 전부 정식으로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럼 일단 기다려 봐야겠네요.”
“예, 그렇습니다.”
짧은 휴식을 가진 세은과 이지호가, 다시 가득 쌓인 서류 더미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 * *
“이게 뭡니까?”
“한국이 이상 징후에 대한 정보 공개를 요청했습니다.”
“한국?”
마르키시오가 비서관의 보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이면 그자가 있는 곳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무슨 정보 공유를 요청한 겁니까?”
“태국 치앙마이의 게이트에서 마왕이 사라졌다고, 혹시 국내에 이상한 징후나 사건이 있는 일이 있으면 협조를 부탁한다는 내용입니다.”
비서관의 간단한 요약에 마르키시오의 볼이 살짝 씰룩거렸다.
“마르키시오 경……?”
“아, 아닙니다. 그냥 잠깐 웃겨서요.”
마르키시오가 다시 표정을 원래대로 돌리고 비서관에게 물었다.
“협의회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이 압도적입니다.”
“그렇겠죠.”
마르키시오는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고 몸을 살짝 뒤로 눕혔다.
탁. 탁.
마르키시오의 하얀 손이 규칙적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어떤 의견을 전달하시겠습니까?”
“흠…….”
비서관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마르키시오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바로 대답하기에는 고려할 것이 있군요. 저는 내일 대답을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협의회에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동남아로 파견 나갔던 헤더 막스가 작성한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그렇습니까?”
“보고서를 가져다드릴까요?”
“괜찮습니다. 혹시 보고서의 내용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대충 무슨 내용입니까?”
“생각보다는 호전적이지 않다고 합니다. 다만 치앙마이에서 그를 겪은 인원들, 특히 조장의 경험을 들으면 정보와 다르지 않은 상당한 무력을 가지고 있단 건 확실하다고 판단됩니다.”
“뭐, 그렇겠죠.”
“더 이상 필요한 것 없으십니까?”
“예, 감사합니다.”
모든 용무가 끝나자 비서관은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이고는 마르키시오의 집무실을 나섰다.
탁―
비서관이 완전히 방에서 몸을 감추자, 마르키시오는 의자를 빙글 돌리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막는 것은 무리였나? 아무래도 다시 조언을 구해야겠어.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마르키시오의 파란 눈이 순간 날카롭게 반짝였다.
* * *
콰앙―!
“병신.”
재호가 시전한 마법이 제대로 목표물을 타격하지 못하는 걸 본 그레모리가 중얼거렸다.
노골적인 그레모리의 말에 재호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니, 왜 이걸 못하지?”
그레모리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단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능도 없는데 그 새끼는 왜 이걸 가르치라고 하는지…….”
옆에서 대련을 하고 있는 채연과 영한이 민망해질 정도의 독설이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처음에 그레모리가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지금과 같은 독설에 반발했다가 호되게 당한 기억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세은이 친구라고 했을 때 미심쩍었던 건, 그레모리가 실력을 보여주자 바로 사라졌다.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실력도 그렇고.
외향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행들에게 깨닫게 해준 그레모리였다.
세은도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고 벌을 주는 건 용인하고 있었다.
“이런 놈들을 데리고 무슨 마왕들을 잡겠다는 거야?”
그레모리는 무심하게 계속 날카로운을 말을 툭툭 입밖으로 던져내었다.
“이건 전력은커녕 정찰용으로도 못 쓸 정도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열심히 찾아다니는 건가?”
그레모리는 세은이 마왕이 게이트에서 사라진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세은이 데리고 있는 이들이 이 정도면, 다른 놈들은 볼 것도 없을 터였다.
물론 다른 국가엔 더 수준 높은 각성자들 역시 있지만, 그레모리로선 그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혹시 그 새끼가 지는 거 아니야?”
퍼뜩 그레모리의 머릿속을 무엇인가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알기로 현재 지구에 넘어온 마왕은 4명.
이들이 치앙마이의 게이트에서처럼 밖으로 나와서 합류를 한다면 세은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 될 게 자명했다.
“물론 같은 파벌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그 새끼의 존재를 인지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지만 말이야…….”
혹시 자신이 도우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아쉽게도 그레모리는 이미 러시아에서 세은과 피의 맹약을 맺은 상태였다.
그때야 너무 힘이 약해진데다가, 세은의 부하들이 이렇게 약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같이 있을수록 너무 성급하게 행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위 10위 안에 드는 놈 한둘만 있어도 해볼 만할 텐데 말이야……”
마왕 사이에도 실력의 격차는 분명 존재한다.
마왕들의 위는 실력 순이 아니지만, 적어도 상위 10위의 마왕들은 가진 실력 순이었다.
세은과 일대일로 자웅을 겨룰 수 있는 마왕은 1위 바알이나 2위 아가레스 정도.
나머지 8위는 여덟 중 두 명만 모여도 세은을 조금 압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마왕들이 모든 전력을 개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지만 말이다.
그러나 항상 세은에게는 교단이란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기 때문에 마왕들 마음대로 붙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레모리가 본 바로는 신도라고는 에린 한 명.
다른 이들의 실력도 형편없었다.
“일단 맹약의 기간이 6개월이 지난 다음에 생각을 다시 해봐야겠어.”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그레모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혼자 중얼거리던 그레모리를 바라보는 재호가 있었다.
별다른 지칭이 없었기 때문에, 재호는 그레모리가 말하는 대상이 세은이란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뭘 멀뚱히 봐? 다시 해.”
“예, 예!”
재호가 잔뜩 짜증내는 그레모리의 호통에 찔끔거리며 다시 마법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현재 재호의 수준은 4써클 정도.
겨우 5써클도 올라가지 못하고 빌빌거리는 모습을 보니 가르칠 맛도 나지 않았다.
그레모리는 재호가 지금 배우고 있는 마법을 완벽하게 시전 할 때까지 옆에서 기계를 만지는 데 여념이 없었다.
* * *
에린은 요즘 학교가 끝나면 신성 마법을 수련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신성 마법은 마법과는 달리 써클의 구분이 없다.
다만 얼마나 더 자신이 할 수 있느냐에 대한 믿음이 신성 마법의 구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신에 대한 믿음과도 연결이 되는데, 신의 힘을 빌어 자신이 이적을 행할 수 있단 자신감이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였다.
“나 먼저 갈게!”
외국인 학교라서 말과 문화가 통하는 친구들도 꽤 많았지만, 마치 강제라도 되는 듯이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 수련에 빠져들었다.
에린이 가장 많이 심상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던 마법은 실드와 홀리 애로우였다.
실드는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 세은이 필수 조건으로 건 마법이었다.
그리고 홀리 애로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직접 들어가서 싸운다고 하면 세은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서 에린이 선택한 마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신성 마법들의 수련을 소홀히 하는 건 아니었다.
태국에 가기 전, 세은이 꼭 시간을 내서 에린을 지도하는 게 중요한 하루 일과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태국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세은이 이지호와 함께 서류 더미에서 씨름하는 통에 혼자서 수련을 하던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
파앙―
신성력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과녁에 박혔다.
세은의 홀리 애로우보다 더 작고 속도가 느렸지만, 그래도 꽤 훌륭한 정확성과 위력을 보였다.
그리고 요즘 채연의 도움을 받아서 실드가 방어할 수 있는 오러의 한계를 미리 알아내고 있는 중이였다.
적어도 세은이 여유가 생긴 다음에 다시 에린의 수련을 지도했을 때, 한 번은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매일 에린의 수련을 도와주고 있는 채연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에린의 실력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적어도 발전 속도로만 따지면 일행 중에서 에린이 가장 빠른 것 같았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부술 수 있던 실드도, 나중에는 상당한 오러를 사용해야 파괴할 수가 있었다.
콰앙―!
“으하! 이제는 꽤 힘든데?”
“헤헤. 많이 단단해졌죠?”
“응. 이 정도면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부수지도 못하겠다.”
“정말요?”
“응. 오러로도 이렇게 파괴하기가 힘드니까.”
채연의 칭찬에 에린이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채연은 그런 에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이어 나갔다.
“어지간한 각성자들은 상대할 수 있겠는데?”
“더 강해져서 꼭 오빠한테 도움이 될 거예요!”
에린이 두 손을 꼭 쥐며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