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야인의 땅(7)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도 저들 중 최선임이라는 것인지, 한극함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저희도 공방께서 마갑을 주셨으면, 이렇게 교대를 청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핑곗거리를 빠르게 만들어 낸 것을 보면, 역시 북병사의 심복이란 자리를 투전으로 따낸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억기가 이끄는 기병은 면제배갑을 마갑으로까지 완전무장으로 지급받았다. 그러나 자신들은 그렇지 못했다.
경원부사가 물고 늘어진 부분이 바로 거기였다. 필요한 물자의 지급은 주장의 몫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저들이 끼리끼리 뭉쳐서 태업을 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것만큼은 어떤 변명을 내민다 해도, 달리 방법이 없을 터였다.
“그게 온성부사 휘하의 병력이 내내 적 앞으로 내몰려야 했던 이유인가?”
“그, 그건…….”
가장 험지를 맡았던 것도 온성부의 병력이었고, 여진족 부락을 밀어 버린 숫자가 많은 것 역시 그들이었다.
그간 초토화시킨 여덞 마을 중, 반은 그들이 세운 전공이기도 했다.
저들의 주둔지가 온성부에 비하면 후방이라고 해도, 어쨌든 북변을 지키는 장수들이 아니던가.
경험부족을 감안해도, 최소한 같은 부사급인 한극함은 그래서는 안 될 터였다. 정말 본인도 신경 쓰지 못한 거라면, 만호 미만으로 끌어내려도 모자랄 일이었다.
“아니면 혹시 온성부의 병력이 북병사 휘하 부대 중에서 최정예고, 척후를 전담으로 맡은 것이었나? 그렇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네만, 여태껏 들은 바가 없군.”
이제는 한극함조차 입을 다물었다.
설령 내 말이 사실과 닿았다 하더라도, 선선히 인정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북방 최정예가 아니게 될 테니까.
이일은 이들이 믿을 만한 장재요, 가장 우수한 기병 지휘관이라고 했다. 게다가 휘하의 기병들은 북변 최정예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런 소개와 함께 파견을 온 상황에서, 내 말을 순순히 인정하면? 내게 붙여 준 이일의 낯짝에 먹칠을 하게 되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온성부사도 이일이 붙여 준 것이긴 하지만, 지금껏 따로 움직인 것을 보면 너무나도 뻔한 술수였다.
“소, 송구합니다, 공방.”
“송구하다는 말로 덮기에는, 너무 심한 추태를 보였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래도 북병사가 자신 있게 붙여 준 자네들이 고작 이 정도 수준이라고 보기는 그렇고……. 혹시 다른 꿍꿍이를 품고 있던 것인가?”
“겨, 결코 아닙니다!”
지나친 부정은 긍정과 통하는 법. 아닌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지금 한극함과 아이들의 모습은 자신들의 죄를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해십니다. 저희는 그저 공방께서 맡기신 역할에 충실하려 했을 뿐입니다.”
“오해? 내가 맡긴 역할? 국경을 나서기 전에 했던 군의는 전부 까먹은 것인가?”
나머지 셋 중 둔하게 생긴 자가 입을 놀리다가, 되레 좋은 소재 하나를 더 만들어 주었다.
사전에 역할을 배정할 때, 나는 조선 군관들의 의견을 취합해서 그대로 따랐다. 사실 취합했다는 말조차 어색할 정도로 고스란히 받아들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맡긴 역할 운운한다? 사실 이쯤 되면 과거는 무슨 수로 통과했는지 의심할 만한 일이었다.
조금 머리가 돌아가는 듯한 자들이 탄식하는 모양새인 것을 보면, 이미 자신들의 운명을 눈치 챈 모양새였다.
그리고 내 반문을 들은 뒤, 발단을 꺼낸 자도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차린 듯했다.
이쯤 되면, 생선이 펄떡 뛰어서 도마 위로 올라와 준 격이었다.
“이제 보니, 그대들의 속이 참으로 시꺼멓기 짝이 없군.”
그렇게 슬슬 몰아치려는데, 그나마 조금 더 똑똑해 보이는 자가 또 입을 열었다.
“공방, 저희는 억울합니다. 이건 참군의 모함입니다!”
“참군의 모함이라……?”
“그렇습니다. 참군은 불미스러운 일로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고, 당시 상관은 북병사영감이셨습니다. 그러니…….”
그걸 정면돌파랍시고 걸어 본 듯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도마 위의 생선이 이제 스스로 비늘까지 벗는 모양새에 지나지 않았다.
“참군. 자네에게 상당히 불미스러운 말이 나올 것 같은데, 어떤가. 잠시 나가 있는 게?”
“소관은 군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켜봐야 합니다.”
“하긴, 그게 전하께서 자네에게 내리신 어명이라 했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어명이라는 말이 나오자, 다른 군관들이 움찔했다.
“내가 타국 사람으로서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그게 사리에 맞는 소리라고 한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순신을 모함한 자는 이왕 내친 김에 끝까지 가려는 듯했다.
“조선의 조정에는 동과 서라 하여, 양당이 존재한다고 하더군. 그 둘이 무슨 연유로 갈렸으며, 누가 어디에 속했는가를 굳이 입에 올리진 않겠네. 단지 나로서는, 상당한 배신감을 느낄 뿐이야.”
정작 이순신은 그런 당파에 연연하는 인물이 아니었지만, 여기 있는 다른 자들은 그렇지가 않을 터였다.
이일부터가 정치에 끈을 대고 있는 판에, 그 심복이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물론 내가 도성을 떠나면서, 조선 국왕에게 조정의 균형을 맞출 자료를 주긴 했다. 하지만 그게 실질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건 조금 나중의 일이 될 터, 아직 일본과 긴밀하게 엮인 쪽은 이일이 몸담은 파당이었다.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자네들이 팽 당하는 일만큼은 막아 줄 수 있네.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지.”
그렇게 말한 뒤, 나는 이순신을 이끌고 잠시 군막 밖으로 나왔다.
그의 표정은 복잡한 듯해 보였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굳이 건드릴 필요는 없을 듯했다.
어차피 그가 보고 들은 것들은 모두 조선 국왕에게 올라갈 게 뻔하니, 굳이 내가 따로 조치를 취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잠깐 군중을 시찰하다가 돌아가니, 죄다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공방. 부디 살려 주십시오.”
* * *
부잔타이, 울라부 수장의 아들이자 차기 후계자로 인정받는 자였다. 지금 그는 자기 부친의 명을 받아, 왜국 쿠보의 군대를 살피고 있었다.
“역시 전방에는 최정예를 세워 둔 모양이군.
그가 받은 병력은 고작해야 기병 오백에 불과했다. 당연히 정면으로 싸울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습격으로 괴롭히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생존자가 하나도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지만, 계속 건드려서 피해를 늘릴 필요는 없지. 그보다는 약한 녀석들을 물고 늘어지는 편이 나아.”
먼발치에서 본 싸움은 기괴하기만 했다. 적의 척후는 모두 명사수인 것인지, 한두 차례의 일제사격만으로 모조리 낙마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먹잇감은 다른 것도 많이 있었다.
측후면을 맡은 조선군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기에, 손쉽게 사냥이 가능했다.
부잔타이가 이끄는 여진족은 늑대 무리처럼 그들을 덮쳤다.
우선 상처를 내는 것으로 피해를 강요하고, 그렇게 격차를 줄여나간 다음 우르르 몰아쳐 버리는 방식.
본대를 그렇게 괴롭힐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렇게 기병 전력을 깎아나가는 것 역시 승산을 쌓는 길이 될 터였다.
최근 욱일승천의 기세로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고는 해도, 울라부 단독으로는 기보 이천을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아직 울라부의 지위가 굳건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상황. 여진족 전부를 규합한 것도 아니었지만, 복속된 자들 역시 온전히 울라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가장 먼저 눌러 버린 호이파부터, 가장 최근에 무릎 꿇린 로툰까지. 모두 등을 맡기기는 곤란했다.
지금까지 부잔타이가 훌륭하게 상대해 낸 만큼, 부간이 다른 부족을 규합하기도 수월할 터였다.
“저들이 마침내 한데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지친 모양이군. 이대로 시간을 끌다가, 아버님께서 본대를 보내시기만 기다리면 된다.”
적이 본영에 모여 웅크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부잔타이와 그 부하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이대로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쿠보의 군대를 주저앉히면 그들의 역할도 끝이었다. 그런데 추가로 전공을 세울 기회가 그들 앞에 나타났다.
“부잔타이 님, 저길 보십시오. 수레에 부상자들을 실은 모양입니다.”
부하가 가리킨 그대로였다. 군량을 싣고 왔던 수레에는 부상자들로 가득했고, 말에 오른 자들도 몸이 성한 구석은 없었다.
“저건 무슨 조짐이겠나?”
“그간 상했던 자들을 후방으로 보내고, 새 병력을 받아오려는 걸로 보입니다.”
그 말을 들은 부잔타이는 쾌재를 불렀다.
“기회다! 저들을 습격할 것이니, 모두 준비를 갖춰라.”
호위를 맡은 자들도 약간씩은 부상을 입은 경우가 많았다.
비록 그들이 당분간 국경 밖으로 나오지는 않을 거라 해도, 사냥할 수만 있다면 조선군 전체의 전력이 깎일 터였다.
* * *
“경계를 늦추지 마라! 적은 반드시 습격해 올 것이다.”
“적탄은 결코 무명을 뚫지 못한다. 이십 보까지 왔을 때 쏴야 하니, 명심해라!”
한극함은 이를 사리물었다. 이 임무가 그에게 드리워진 동앗줄이 될 터였기에, 지금까지처럼 태만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여진족이 정말로 기습을 할 것인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적어도 상대가 머리를 쓸 줄 아는 자라면 공격해올 가능성이 높았다.
적이 습격해 온다면, 반드시 전멸시켜야 했다. 그게 일본국 공방의 지시였기에.
- 온성부사는 단 하나의 적도 살려 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너 또한 그리 해야 할 것이다.
적에게 신무기에 관한 정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지급받은 장비는 정말 그만큼 귀중한 것이기도 했다.
총탄을 막는 갑옷, 그리고 다수의 적을 사냥하다시피 할 수 있는 중절 나팔총.
작은 크기의 총탄은 조잡해 보였지만, 온성부사 이억기의 증언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시연을 목격한 뒤로, 한극함 역시 거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것들을 사용하고도 실패한다면, 정말로 군관으로서의 자격 미달일 터였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드디어 그가 기다렸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순히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여기 있는 자들은 모두 부상을 입은 몸이다. 인륜과 명예를 생각한다면, 보내 주기 바란다.”
“수시로 쳐들어 와서 소금까지 뿌린 자들이, 이제 와서 인륜과 명예를 논하느냐?”
그 말과 동시에, 여진족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숫자는 약 오백 정도. 지금 싸울 수 있는 자들에 비하면 다섯 배나 많았다.
“쳐라!”
습격을 가한 여진족도, 그걸 맞받아치는 조선군도 서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한 손에 각자의 화기를 든 상태였다.
그렇게 두 무리의 말탄 자들이 서로 가까워졌고, 마침내 총성이 황야를 뒤흔들었다.
먼저 불을 뿜은 쪽은 여진족이었으나, 조선군의 그 누구도 상하지 않았다. 거기에 놀란 부잔타이는 황급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