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야인의 땅(6)
두만강을 넘어 야인의 땅에 들어선지 사흘째,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이천의 기보는 여덟 개의 크고 작은 여진족 마을을 격파했다.
주민의 숫자는 아무리 많아도 오백을 넘기지 않는 상황, 다섯으로 쪼개져 척후를 수행하는 이백의 기병 정도면 충분히 짓밟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흘째부터는 여진족도 사태를 파악했는지, 산발적으로나마 저항해왔다.
“한 부사, 피해가 적지 않소.”
“우리 부대 역시 열 명도 넘는 병사들이 다쳤소이다.”
이일이 유키나가에게 붙여주었던 군관들은 종종 자기네끼리의 회합을 벌였다. 본대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고, 그 틈새를 이용해 상관의 명을 수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 합쳐서 벌써 50기(騎)가 싸울 수 없게 된 게 아닌가.”
“우리도 이 모양인데, 온성부는 어떻겠소이까.”
사방이 적지라고는 해도, 전방과 측후방의 차이가 없을 수는 없을 터였다.
아직 울라부의 본거지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남은 상황, 이렇게 극심한 소모를 겪어서는 곤란한 일이었다.
“전면의 척후를 맡았으니, 그들의 피해도 상당하겠지. 이렇게 손실이 커서는 울라부 토벌도 요원한 일이야.”
“지금이라도 회군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릅니다.”
“회군? 이보게, 아직 출병한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도적떼의 소굴에도 닿지 못했네.”
좌장격인 한극함은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는 가운데, 나머지 군관들의 의견이 분분하게 갈렸다.
“자네야말로 병사 영감의 당부를 잊었는가?”
“그 말이 아니잖은가. 섣불리 빼자고 말한다면, 아국의 체면이 뭐가 되겠나?”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소모가 커서는 곤란하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다친 병사들을 교대할 필요가 있어.”
셋 중 둘이 회군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한극함 역시 그쪽으로 마음이 쏠린 상태였다.
그들은 머리를 맞댄 끝에 일본국 공방에게 대책을 요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대표로 한극함이 본영을 찾아갔다.
* * *
“병사들을 교대시키고 싶다?”
“그렇습니다, 공방.”
이제는 슬슬 반응이 나올 때도 되었다 싶기는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넷 중 최선임이라 할 수 있는 한극함이 아침부터 내게 면담을 요청해왔다.
“다행히 죽은 자는 없으나, 무거운 부상으로 싸울 수 없게 된 병사들이 수십입니다. 그들을 돌려보내고, 멀쩡한 인원으로 교대하고자 합니다.”
다친 병사들의 교대는 사전에 이야기된 바 있었다.
일본에서는 사후의 보상을 노리고 죽겠다면서 싸우지만, 조선은 이긴 싸움도 전사자가 있다면 탄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부상자를 돌려보내자는 말은 부당한 게 아닐 터였다.
“음, 그렇다고는 해도 회군이라…….”
경원부사는 내게 전 병력의 회군을 이야기했지만, 그건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한번 돌아온 군대는 다시 출격시키기 어려울 터, 그게 상대가 노리는 바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보다는 이렇게 하는 편이 어떻겠나?”
“말씀하시지요.”
“다친 병사들은 후방으로 보내도록 하지.”
조만간 군량을 보급할 수송대가 올 것이다. 그 편에 부상자들을 돌려보내고, 새 병력이 오기를 기다리자. 나는 그렇게 제안했다.
“수백이 죽거나 다친 상태라면 회군을 해야겠지. 하지만 고작해야 수십의 부상자라면, 그리 할 수 없네.”
내가 타협안을 내놓았지만, 상대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물론 본대는 멀쩡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측후방에서 수십의 부상자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하오면 척후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역시 예상한 논거 중 하나였다.
여진족이 사방에서 습격해오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척후가 가장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이치를 따지자면 한극함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이억기의 병력은 특별한 무구를 갖춘 상태였다.
“온성부사가 이끄는 병력은 아무도 상하지 않았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극함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말 그대로일세. 척후는 모두가 멀쩡하다네.”
“도저히 믿기지가 않습니다만…….”
지위의 격차가 있는 만큼, 조선의 군관은 내 말을 내던져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이곧대로 듣는 태도도 아니었다.
“정 그렇게 여긴다면, 자네가 직접 온성부사를 찾아가보도록 하게.”
내 허락을 받은 경원부사는 곧바로 말을 타고 달려나갔다. 꼬박 한나절 하고도 반의 시간이 지난 뒤, 돌아온 그는 도깨비에게 홀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저 천갑은 다 무엇입니까? 어찌하여 저희들에겐…….”
“일이 이리 될 줄 알았나. 그래도 온성부가 길에 익숙하여 척후를 맡은 모양새였으니, 그들이 더 위험한 일을 맡았다고 봤을 뿐이네.”
애초에 이억기의 병력을 최전방으로 밀어넣은 게 그들 스스로였으니, 거기에 더 할 말은 없을 터였다.
“어쨌든 자네가 무엇을 건의하려 한 것인지는 잘 알겠네. 그러니 내일 모든 병력을 본영에 집결시킨 다음, 다시 논의하도록 하지.”
한극함은 더 이상 뻗대지 않고, 자신의 부대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야규 무네노리가 혀를 차면서 입을 열었다.
“꽤나 한심한 자들이군요. 고작 수십이 다쳤다고 약한 소리를 하다니.”
“그렇게 볼 일은 아닐세. 어디 사람이 죽음을 탐하고 삶을 하찮게 여기겠나.”
“전장에 나가면 모두가 멀쩡하게 살아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무네노리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아직 어린 소년 장수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그간 배웠던 가르침이 헛된 것은 아닐 터였다.
다만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그의 견해는 단편적인 경향이 없지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이보게, 사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할 때도 있지만, 그런 상황은 피할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교대 인원이 없으면 몰라도, 지금은 그게 아니니 저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벌써부터 회군을 거론하는 것만큼은 문제가 있다. 그게 시마 카츠타케가 내놓은 결론이었다.
“뭐, 그런 꿍꿍이까지 어찌할 수는 없겠지. 어쨌거나 저들은 내 봉록을 받는 자들이 아니니 말일세. 그보다도 참군의 의견도 좀 듣고 싶군.”
이제는 이순신도 간단한 회화는 가능할 정도가 된 상태였다. 약간의 설명을 들은 그는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전장에 나간 이상, 죽기로 싸울 뿐입니다. 그러나 미리 준비한 만큼 아군의 피해는 적겠지요. 장수된 자의 책무는 거기에 있다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조선의 군관들이 엮인 문제라 그런지, 말을 아끼는 모양새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과연 그다운 답이었다.
야규 군학의 이치와도 어느 정도 닿은 내용이었기 때문에, 무네노리 역시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카츠타케는 씩 웃으면서, 자기 스승의 아들이자, 자기 사제의 어깨를 두드렸다.
“용기와 만용은 구분해야 하는 법이지. 물론 신중과 비겁 역시 그러하다만, 언제나 대비할 수 있을 때 대비해야 하는 법이다.”
* * *
이억기는 자기 군막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낮에는 경원부사 한극함이 다녀가고, 저녁에는 공방의 본영으로부터 소집령이 내려왔다.
그가 출진하기 전, 미리 공방에게 들었던 내용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 나는 온성부사를 본보기로 세울 생각일세.
본보기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길 수 있지만, 대개 군문의 본보기라 하면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공방이 말한 본보기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 내가 알기로 조선은 장수의 싸움을 까다롭게 보는 것으로 알고 있소. 가령 이긴 싸움도 전사자가 나오면 탄핵을 받는다던가 하는 것들 말이오.
-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질문을 받은 공방은 온성부사의 상관이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리고 같은 자리에 있었던 경흥부사와 옛 녹둔도 만호 역시 거기에 동조하는 눈치였다.
- 지금 소장에게 상관을 배신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 내가 왜 그런 걸 요구하겠나. 다만 좀 더 잘 싸워주길 바랄 뿐이네.
그 말과 함께 면제배갑과 그걸 개조한 마갑, 거기에 특별히 개조했다는 조총까지 받았다. 이 기물들의 효용은 실로 대단했다.
지금까지 그가 이끄는 부대는 단 하나의 야인도 살려 보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단 한 사람도 다친 일이 없었다.
여진족 무리가 일제히 조총을 쏘며 달려들어도, 아군의 피해는 전무했다. 심지어 덩치가 큰 말조차도 다리에 생채기가 난 게 부상의 전부였다.
그리고 공방에게 지급받은 조총과 거기에 맞춘 특별한 탄약, 이것들이 천지를 진동할 때마다 적병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작은 납구슬이 넓은 범위를 휩쓸었기에, 단 한 차례의 일제사격이면 충분했다. 전장에 나온 장수에게 방심은 금물이었으나, 이억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여겼다.
단 하나의 적도 도망치지 못했다는 것은 저쪽에 정보가 새어나가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억기와 그 휘하 부대는 강을 건넌 이래, 이틀 동안 여덟 번의 교전을 치렀다. 그 모두를 성공적으로 분쇄한 끝에, 여진족은 더 이상 그들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이쪽이 무슨 수단을 사용했는지는 여전히 파악하지 못한 듯했지만, 적어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깨달은 눈치였다.
경원부사 한극함이 자신을 찾아와서 눈이 돌아간 것도 이 일과 무관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병사 영감, 대체 왜 그리 하신 것이오이까…….”
그는 북병영에 속한 온성부사였지만, 더 큰 범위로는 조선의 장수였다. 그리고 동시에 태조대왕의 후손이기도 했다.
결코 북병사의 처사가 도성에 계실 전하의 의중과 맞을 것인가. 아무리 고민을 거듭해도, 결코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다.
타국의 집정이 오히려 왕실에 도움이 되는 상황, 그는 자기 상관이 부끄럽기만 했다.
* * *
모든 장수들이 모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굳이 내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참군 이순신, 경흥부사 이경록, 온성부사 이억기. 이 세 장수는 잠시 나가있도록 하게.”
경흥부사와 온성부사는 내 지시를 받고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참군은 그렇지 않았다.
“소장, 참군으로서 진중에 벌어지는 일을 확인해야 하오이다.”
이순신은 끝까지 나가지 않을 눈치였다. 물론 그의 옛 동료들의 추태를 보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지만, 그의 주장 역시 타당했다.
“알겠네. 그러나 발언은 허락할 수 없으니, 그리 알고 있게.”
그렇게 정리를 끝낸 뒤, 나는 남아 있는 네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래, 후방은 좀 편했는가?”
“무슨 말씀이시온지…….”
“그간 자네들의 행적을 살펴보았네만, 그 누구도 배치를 교대하자는 말은 하지 않더군.”
만약 이자들이 이억기를 동료라고 생각했다면, 다섯 개의 부대가 번갈아가면서 척후를 맡아야 한다고 말했을 터였다.
그러나 나흘, 닷새가 지나고 엿새가 되는 오늘까지, 저들은 자기 부하들의 교대만 이야기할 뿐이었다.
“경흥부사의 병력은 보병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온성부가 그렇게 겉도는 줄은 몰랐네.”
“오, 오해십니다, 공방.”
“오해? 이보게,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고는 해도, 사람 사는 이치라는 게 약간씩은 비슷한 법이 아닌가.”
어제는 회군을 말하던 한극함조차, 뜻밖의 기습에 기가 꺾인 모양새였다.
“자네들 넷은 상당히 긴밀하게 움직이면서도, 가장 험한 일을 맡은 온성부는 내버려두었더군. 이걸 내가 어찌 봐야겠나?”
후방의 네 부대가 서로의 피해 상황은 파악했으면서도, 척후의 근황은 확인하지 못했다. 드러난 물증은 없지만, 이들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심증이 되기에는 충분할 터였다.
“나는 주장으로서, 자네들의 추태를 더 이상 묵과할 수가 없네.”
내 질책을 들은 군관들의 낯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걸로 요리 재료의 손질이 끝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