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야인의 땅(8)
“으, 으음…….”
부잔타이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천막에 갇힌 상태였다.
“포로로 잡히고 말았군.”
그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조선군과 자신이 이끄는 여진 전사들의 격돌. 그 자리에서 부잔타이는 기괴한 경험을 했다.
그와 그가 이끄는 전사들은 천하무적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철조차 뚫어버리는 조총. 그런데 그게 먹히지 않았다.
분명 그들이 먼저 쏘았고, 명중한 것까지 확인을 했다. 적병의 갑옷이며 마갑에 구멍이 나는 것까지 보았다.
그러나 당시의 일은 그때까지의 경험과는 차원이 달랐다.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는 황급히 도주를 시도했지만, 그의 말이 총탄에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절한 듯했다.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이냐…….”
그렇게 혼자 탄식을 하고 있으니, 간수가 그가 갇힌 곳을 들췄다.
“일어났으면 다시 자라. 아직 한밤중이니. 내일부터는 이렇게 여유롭지 않을 거다.”
“여기가, 어디요?”
“일본국 소서 공방의 군영이다. 너는 포로로 잡혔고, 내일부터 심문을 받게 될 예정이지.”
간수는 그 말만 하고 도로 닫아 버렸다.
* * *
한극함이 아주 훌륭한 성과를 냈다. 내가 준비한 장구를 받자마자, 바로 울라부 족장의 아들을 붙잡아 온 것이다.
“공방께서 주신 무명갑 덕에 단 한 사람도 상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팔총의 위력도 대단하더군요.”
조선군은 면으로 된 갑옷이라 하여, 무명갑이라고 불렀다.
애초에 일본에는 기마전투라는 개념이 없어, 문자 그대로 방탄조끼의 형상을 표현한 배갑이라 했다.
그러나 조선군은 그 배갑을 뜯어서 말에 씌울 수 있는 마갑으로 개조할 필요가 있었기에, 면제배갑이라는 명칭은 걸맞지 않았다.
한극함 본인은 부상자들을 이끌고 두만강 너머로 간 상태였고, 그와 같이 갔던 군관 중 하나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근래 들어 조선에도 일본산 목면이 많이 들어오긴 했습니다만, 여럿을 겹쳐서 방탄으로 쓴다는 개념은 처음이었습니다.”
“옛 고사에서 따 온 것일 뿐이네. 비단이 화살을 막을 수 있다면, 다른 섬유도 능히 가능한 일이 아니겠나.”
그리고 사실 그들이 세운 전공은 이런 기물이 돕기는 했지만, 이순신의 꾀가 더 기여한 바가 컸다.
“그리고 이렇게 빠른 성과가 나온 것은 참군의 계략이 정통했기 때문이겠지.”
처음 계획은 단순히 부상병을 후송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당분간 본영에 눌러앉아 휴식을 취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호위를 든든하게 붙이고, 애초에 습격 자체를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아예 적을 끌어낼 미끼로 쓰자는 안을 내어놓았다.
- 공방이 가져온 무구는 아군의 손실을 허용치 않으며 여러 적을 일거에 소탕할 수 있으니, 이걸 이용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원래의 역사에서 그의 이미지는 대체로 두 가지였다. 엄정한 군율, 그리고 함 대 함 전투에서 화포의 적극적인 사용.
거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사면초가의 위기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 정도일까.
그러나 동시에 그는 책략을 사용하는 모장(謀將)의 면모도 갖춘 자였다. 단지 그가 왕국의 명장이라는 것이 문제였을 뿐.
- 수레를 지킬 병사들의 숫자를 줄이고, 그들도 작은 부상을 입은 것처럼 위장시킵니다.
- 소장이 예상컨대, 적의 규모는 아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백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이순신이 내어놓은 계책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약간의 품이야 들겠지만, 아군이 잃을 게 없었다.
내가 참군을 띄워 주자, 군관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 줄을 바꿔 잡을 작정이라고는 해도, 염치가 있으면 그럴 수밖에 없을 터였다.
보고를 올린 군관이 조용해지자, 시마 카츠타케가 입을 열었다.
“여진족 수괴의 아들이라면, 협상의 재료로 걸어볼 수 있을 듯도 합니다만…….”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지만, 여진족을 겪었던 조선의 장수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그리고 나 역시 거기에는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지금 우리가 저쪽과 협상을 할 만한 구석이 있겠나?”
“포로는 족장의 혈족이고, 조세이 그자는 잘 쳐줘 봐야 객장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붙잡아 보낼 가능성이 없진 않다고 봅니다.”
내가 거기에 답을 하기도 전에, 이경록이 먼저 말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진족을 비롯한 유목민은 부자간의 정리가 그리 돈독한 편이 아닙니다.”
족장쯤 되고 보면, 첩을 여럿 두고 자식도 수십을 본다. 그런 사정은 일본도 크게 다를 게 없었으나, 카츠타케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만주 황야는 말 그대로 야생의 땅이라는 것.
일본에서는 그래도 일족과 가문의 보호라는 게 있었다. 여러 다이묘가 난립하는 상황에서, 우두머리와 가까운 일족은 외교적 수단의 가치로 활용이 가능했다.
만약 다이묘의 방계가 본가를 거스르다가 실패하면, 그 주체는 역도로서 죽어야 했다. 그러나 그 아들이나 손자 대에 가서는 또 다를 수 있었다. 본가의 양자가 되어 가문 전체의 우두머리가 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물론 여진족도 그런 모습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훨씬 척박하고 궁핍한 환경에서는 각자도생의 면모가 더욱 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부잔타이라는 자가 부간의 아들이니, 그걸 이용할 방법이 없지는 않겠지. 어쨌든 그 역시 자기 부친의 자리를 계승할 위치가 아닌가 말이야. 아니면…….”
최대한 처참한 몰골로 만들어 모욕한 다음, 격장지계의 수단으로 쓰는 것도 생각해 봄직했다.
“어쨌든 경원부사가 교대 병력을 이끌고 올 때까지는 움직이기 어려우니, 계책의 가닥을 잡고 다듬어 보세.”
* * *
“부잔타이가 포로로 잡혀? 그 아이가 이끌던 전사들이 떼죽음을 당해?”
총탄의 폭풍 속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자들이 울라부에 소식을 전했다.
“적이 고작해야 이천, 그것도 반은 제 발로 걸어다니는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에게 졌다고……!”
부간은 길길이 날뛰었다.
“부잔타이, 그 녀석은 자신 있게 나서놓고, 그리 허망하게 져 버렸단 말이냐!”
족장의 분노는 자신의 아들을 향하다가, 살아 돌아온 자들에게 쏟아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야!”
“조, 족장, 적은 처음 보는 방식으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오백이 순식간에 몰살당했다는 게 말이나 된다고 나불거리는 것이냐!”
그러나 여기에서 답을 하지 못한다면, 기껏 목숨을 부지해 온 의미가 없을 터였다. 분노한 우두머리의 칼이 그들의 목을 날릴 테니까.
패잔병들은 잔뜩 움츠러들었으면서도 필사적으로 있었던 일을 고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의미가 없었다.
“허튼 소리! 비겁한 변명만 늘어놓는구나. 끌고 가라! 목을 베어 출진의 제물로 삼을 것이다.”
부간은 그렇게 말하긴 했으나,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직 다른 부족이 마음으로 따르지 않는 상황에서, 오백의 전사들이 증발해버린 패전은 명백히 악재였다.
그러니 거짓말로 몰아서 입을 다물게 만들어야만 했다.
부간은 그렇게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지금 모인 자들이면 충분할 것이다.”
이미 울라부에는 삼천의 전사들이 모여 있었다. 당연히 그들 모두가 사납고 기마에 능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부족까지 합류한다면, 족히 오천을 넘는 거대한 규모의 군세가 만들어질 터였다.
그러나 이미 시작부터 패배한 상황, 지금은 자신의 위신을 보여야만 했다.
그 자리에 있던 도토야 조세이 역시 부간의 약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기에, 섣부른 움직임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처럼 분노한 상황에서는 고개를 숙이고 비바람을 피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족장의 시선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봐, 도토야! 같이 가야겠다.”
“저는 여기에서 기다릴 생각이었습니다만…….”
자신은 현상금을 걸었고, 굳이 나가서 싸워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게 설득하려 했지만, 여기에서 칼자루를 쥔 자는 부간이었다.
“그러겠다면 가둬 둘 수밖에.”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네 녀석이 부잔타이를 꼬드긴 걸 모를 것 같나? 그리고 너는 몸값을 약속했으니, 내 손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다.”
왜국 쿠보를 잡아도 조세이가 모르쇠로 일관하면 의미가 없다. 그게 부간의 논지였다.
“황금을 약속하지 않았나.”
“유키나가, 그자를 잡아 오면 드릴 겁니다.”
“물론 그리 약속하긴 했지. 하지만 쿠보를 생포한다는 보장은 없는데, 죽고 나서 네 녀석이 입을 씻어 버리면 그만 아닌가.”
같이 전장에 나서거나, 혹은 울라부 심처에 얌전히 갇히거나. 조세이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알겠습니다. 족장을 따라가도록 하지요.”
급변하는 분위기 속에서, 조세이는 자신의 마지막을 느꼈다.
* * *
“부간이 이끄는 전사들이 빠르게 남하하고 있다고 합니다.”
“벌써?”
부잔타이를 포로로 잡은 게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아직 계책을 건 상태도 아니었다. 뭔가를 꾸미기도 전에 부간이 먼저 달려온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한 끝에, 부간의 입지가 그리 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근 복속시킨 다른 부족이 불안한 모양이군.”
“소장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여진족을 오래 겪은 조선의 장수들 역시 내 예상에 동의했다.
“적의 규모는 얼마나 되나?”
“약 삼천가량의 기병이라 했습니다.”
“삼천…….”
예상했던 것보다는 적었지만,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숫자였다. 애초에 기병의 가치는 보병의 그것을 상회하게 마련이 아니던가.
물론 적이 숨거나 도망치는 대신 뛰쳐나온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콘, 총검의 훈련은 어떤가.”
“용법이 조선군의 전술과 크게 다르지 않아, 익히기에 부족함은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장창을 들어서 내리찍는 식으로 사용한다. 서로가 방진을 짠 상황에서 돌파할 만한 수단이 마땅치 않으니, 그렇게 바깥부터 깎았던 것이다.
그러나 착검한 철포를 그렇게 휘두를 수는 없었고, 결국 찌르는 전술을 익혀야 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게 조선군의 방식과 맞아떨어졌다.
경흥부의 병력이 전면을 맡아주기로 했지만, 그래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적은 하루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곧장 습격하는 대신, 아군의 진영을 빙글빙글 돌면서 탐색전을 펼쳤다.
부간은 자신의 위신이 더 깎여나가기 전에 결전을 벌이려는 듯했다.
이경록이 그 모습을 보고 내게 조언을 해 주었다.
“저러다가 곧바로 들이칠 겁니다. 막아낸다면, 순순히 물러나겠지만, 틈을 보이면 비집고 들어오려 할 겁니다.”
“그렇겠지.”
이 대화가 끝나기가 무섭게, 일단의 여진족 무리가 밀고 들어왔다.
“적이 몰려온다!”
“아직 나팔총은 쓰지 않는다. 모두 철포로 상대하라.”
한바탕 콩 볶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약간의 피해를 입은 적이 물러갔다.
“이제 시작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