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첫 단추 (3)
어릴 적, 겨울이 되면 아버지는 항상 퇴근하실 때마다 붕어빵을 사 오셨다.
갑질 금수저에게 징역 1년의 실형이 법원에서 선고되던 12월 15일, 난 붕어빵을 사서 집으로 들고 갔다.
아버지의 영정 앞에서 먹던 붕어빵은, 그러나 그 옛날 아버지와 함께 먹던 그 맛이 나지 않았다.
* * *
두루마리는 충실하게 아딘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수행했다.
덕분에 아딘은 목표했던 1천 골드를 상회할 정도로 약초를 캘 수 있었다.
상회하는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아예 플루슈드 약초 시장의 공급망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좋았어.’
여관방에서 침대 위에 약초들을 쭉 늘어놓고 그것을 바라보며 아딘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만하면 충분해.’
한동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약초를 바라보던 아딘은 이내 그것을 다시 망태기에 주워 담았다.
망태기를 어깨에 멘 후 아딘은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약초 시세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아딘은 곧장 두루마리를 말아 품에 넣은 후 방을 나섰다.
1층으로 내려가자 아침 일찍부터 맥주를 마시는 칼과 바니 그리고 회복된 레니가 눈에 들어왔다.
“일어나셨수?”
칼이 웃으며 아딘에게 인사했다.
아딘도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침 식사나 하고 가시지.”
칼의 제안에 아딘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거 참…… 겨우 맥주 두 잔 가지고 은혜를 갚았다고 하기 부끄러운데…….”
칼의 말에 바니와 레니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쪽이 준 그 향수 덕분에 독충한테도 안 물렸잖아요. 이리 와요. 우리가 아침 시원하게 한 턱 쏠게요.”
“그래요. 이리 와요.”
바니와 레니도 아딘에게 아침 식사를 대접하겠다며 의자를 하나 빼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딘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짧게 이야기할 뿐이었다.
“괜찮소.”
그렇게 아딘은 아쉬워하는 세 사람을 뒤로한 채 여관 주인에게 숙식비를 준 후 여관을 나섰다.
활짝 떠오른 태양이 환히 비추는 플루슈드의 대지를 바라보며 아딘은 김현수의 부친 김철호 씨를 연상시켰던, 그래서 특별히 몇 가지를 챙겨주었던 세 약초꾼을 뒤로하고 시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플루슈드 시장은 약초숲에서 채취한 약초가 1차로 판매되는 곳이었다.
아딘처럼 제니스 공화국으로 갈 일이 없는 사람, 당장 급전이 필요한 사람, 제니스 공화국까지 가는 모험보단 안전을 택하는 사람이 주로 이곳에서 약초를 판매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판매자들을 상대로 약초를 구매하는 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가격을 후려칠 준비가 된 자들이었다.
“그래,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수?”
대규모 상단과 약초꾼 사이에서 중개사 역할을 하는 상인 자크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악독하게 약초의 가치를 낮춰서 매입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음을 지급하는 다른 중개상들과는 달리 자크리는 100% 현금을 지급했기에 약초꾼들은 어쩔 수 없이 가격을 약간 낮게 치더라도 그에게 가는 수밖에 없었다.
샘플로 아딘이 내놓은 새벽의 눈물과 인내의 뿌리를 돋보기로 슥 훑어본 자크리는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며 아딘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딘은 속으로 온갖 욕을 내뱉었다.
‘하여간 어딜 가나 이런 놈들은 있지.’
처음 스마트폰을 구매하던 날, 뭣도 모르고 대리점에 들어갔다가 온갖 쓸데없는 부가서비스에 다 가입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아딘은 무심한 표정으로 짧게 이야기했다.
“새벽의 눈물 1개당 40골드, 인내의 뿌리 1개당 200골드.”
아딘의 말에 순간 자크리는 흠칫했다.
‘이 자식이?’
두루마리에 나온 약초 시세.
그것은 약초꾼들에게서 중개 상인들이 구매할 때의 시세가 아니었다.
그것은 중개 상인들에게서 대형 상단이 구매할 때의 시세였다.
자크리는 포커페이스를 가까스로 유지한 채 아딘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냥 막 부르는 건가?’
로브 아래 인중 윗부분이 모두 어둠에 가려진 아딘을 바라보며 자크리는 가볍게 헛기침을 한 후 다시 돋보기를 들고 새벽의 눈물과 인내의 뿌리를 살펴보는 척을 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것들을 내려놓은 후 아딘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약초 상태가 영…… 윤기도 없고 끝부분이 살짝 마른 게 조금만 힘을 줘도 바스라 질 것 같기도 하고…… 땅에서 뽑은 지 너무 오래돼서 그런가, 영 생기도 없는 것 같고…….”
한동안 혼자 중얼거리던 자크리는 한 차례 슥 아딘의 얼굴을 보더니 가격을 불렀다.
“새벽의 눈물은 25골드, 인내의 뿌리는 170골드면 적당하지 싶은데…….”
“40, 200.”
가격을 후려치려는 자크리의 모습에 아딘은 단호하게 시세가를 고수했다.
자크리의 미간이 꿈틀했다.
“30, 175.”
“40, 200.”
“32, 180.”
“40, 200.”
“37, 190! 이 이상은 못 줘!”
자크리가 최후통첩을 날리자 아딘은 망설임 없이 샘플로 내놓은 약초들을 망태기에 집어넣은 후 등을 돌렸다.
“겨우 그거 하나씩 들고 그 가격을 불러 봤자 아무도 안 사!”
자크리가 그 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아무리 새벽의 눈물이 귀하고 인내의 뿌리가 희귀해도 겨우 1뿌리씩을 그딴 가격에 팔면 누가 사겠어!”
자크리의 말은 다급함에서 나온 소리였지만, 일견 사실이기도 했다.
“200, 100.”
문제는 아딘이 가지고 있는 두 약초의 개수였다.
“…… 뭐?”
당황한 자크리를 바라보며 아딘은 짧게, 약간의 부연설명을 덧붙여서 한 번 더 말했다.
“새벽의 눈물 200개, 인내의 뿌리 100개.”
결국, 자크리의 포커페이스는 무너지고 말았다.
“…… 몇 개?”
자크리의 당혹스러움이 가득 묻어난 질문을 뒤로한 채 아딘은 상점을 나섰다.
‘아, 안 돼!’
자크리는 그대로 아딘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이, 일단 들어가서!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네?”
자크리는 아딘의 앞을 가로막고 간사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딘은 정색한 채 그를 옆으로 밀치곤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자크리는 다시 아딘의 앞을 가로막았다.
“40에 200. 오케이. 그렇게 합시다. 내 인심 쓰겠소.”
마침내 자크리가 항복을 선언했다.
그만큼 아딘이 가지고 있는 물량 자체가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었다.
‘새벽의 눈물 200개에 인내의 뿌리 100개. 이 정도면 사실상 내가 가격을 주도할 수 있어. 그래. 까짓거 40에 200주고 더 올려서 넘기고 말지.’
새벽의 눈물과 인내의 뿌리.
두 약초는 비단 플루슈드 뿐 아니라 대륙 전역에서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싼 약초였다.
특히 유통 비용이 과다하게 책정되는 제니스 공화국으로 가면 그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당연히 시장에서는 공급 부족 현상이 자주 발생했다.
1년에 약초숲에선 많아 봐야 300개 정도의 새벽의 눈물과 200개 정도의 인내의 뿌리가 발견될 뿐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나는, 다소 품질이 떨어지는 것까지 합쳐도 둘 다 500개를 넘기질 않았다.
그런 귀한 약초를 각각 200개, 100개씩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은 곧 가격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더구나 자크리가 감정한 결과 아딘이 가진 것은 품질이 매우 좋았다.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아라곤까지 가서 팔면 그만이야. 그래. 까짓거 용병이라도 구해서……’
자크리가 그런 생각을 품고 있을 때, 아딘은 짧게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50, 250.”
자크리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아딘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딘은 자크리를 향해 조소를 지어 보였다.
* * *
과연 자크리의 현금 지급 능력은 자타공인 플루슈드 최강자였다.
개당 1천 골드의 값어치를 하는 금두꺼비 20개와 1백 골드의 값어치를 하는 금괴 150개, 도합 3만 5천 골드.
건강한 흑마 2마리가 끄는 마차를 천천히 몰며 아딘은 마부석 뒤에 고이 모셔진 상자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
애초에 아딘이 책정한 예산은 1천 골드였다.
하지만 두루마리가 제공해주는 지도에 근거해 약초를 캐다 보니 어느새 욕심이 생겼고, 욕심을 채우다 보니 이렇게 과도한 액수의 돈이 들어오게 됐다.
‘뭐,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3만 5천 골드.
머지않은 미래에 아딘이 3대 신물을 모두 손에 넣었을 때, 그의 복수 혈전에 유용하게 쓰일 자금이 될 터였다.
‘이 정도 금액이면 용병 5천 명을 1년 동안 고용할 수 있어. 신물을 얻어 내가 최전선에서 탱킹을 하며 딜을 넣는 사이 그 5천 명이 점령지를 관리하면…… 그래, 충분해. 그 정도면 충분해.’
물론 아딘이 3대 신물의 힘을 극한으로 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정신력을 그 전에 가지게 된다면 용병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 정도 정신력을 가진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소드 마스터나 마법사 모두 정신력의 정도에 따라 힘이 정해지는 세계관인 만큼, 밸런스 붕괴를 막기 위해 김현수가 인간 정신력에 한계를 정해두었기 때문이었다.
‘에이. 인간 정신력에 한계가 없다고 해놓을걸!’
괜한 아쉬움에 아딘은 고삐를 한 차례 세게 당겼다.
[히히히힝-!]
흑마들이 투레질을 내며 속도를 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엄청나게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어오는 여름 슈드 자치령의 바람이 아딘의 기분을 좋게 해 주었다.
[히히히힝-!]
하지만 말들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거, 좋게좋게 마차에서 내려서 걸어서 가시죠?”
대놓고 ‘나 강도요’라고 얼굴로 말하는 것처럼, 굉장히 험악하게 생긴 자들이 쇠몽둥이와 도끼, 단검 등을 들고서 마차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숫자는 도합 스물.
“자크리가 보냈나?”
아딘은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맨 처음 그에게 말을 건,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비웃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딘은 가만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플루슈드에서 노드플루슈드로 이어지는 30km 정도 되는 구간의 길목.
아무래도 플루슈드에서 약초를 처분한 약초꾼들이나 혹은 플루슈드에서 노드플루슈드를 거쳐 동북부의 항구도시 포르트지앵으로 가는 상인들이 지나는 곳인 만큼 그들을 노린 강도나 건달도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환한 대낮에, 비록 머리 떨어져 있다곤 하지만 유동 인구가 없지도 않은 상황에서, 콕 찍어 아딘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단순한 강도나 건달은 아니란 것이다.
“하아…….”
아딘은 한숨을 내쉬며 허공을 바라봤다.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대리점 사기꾼들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리고 그 모습을 건달들은 아딘이 체념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두목이 부하들에게 가볍게 턱짓을 했다.
가서 아딘을 끌어내리고 마차를 확보하란 것이었다.
쇠몽둥이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건달 둘이 아딘을 향해 다가갔다.
“당신들 말이야.”
그들의 발걸음은 아딘이 입을 열자 멈춰졌다.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연 아딘이 다시 건달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참 운이 나빠.”
건달들이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딘을 바라봤다.
아딘의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번졌다.
아딘은 그대로 검을 뽑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건달들은 그제야 그가 뭘 하려는 가를 알게 됐다.
“프하하하하-!”
건달 두목이 박장대소했고, 부하들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 저 새끼 죽이지 말고 데려와라.”
두목의 말에 먼저 앞장섰던 두 명 뒤로 두 사람이 추가로 따라붙었다.
어쨌건 상대방이 무기를 든 만큼, 단 두 명만으로는 상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팔만 한 짝씩 잘라줄까? 아니면 목을 잘라줄까?”
아딘의 말은 건달들을 향한 질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에 가까웠다.
그리고 건달들의 쇠몽둥이가 충분히 아딘을 때릴 수 있을 만큼 양자 간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아딘의 복부에서 섬광과 함께 벨트가 튀어나왔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