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첫 단추 (2)
플루슈드 남문을 통과하여 대략 2km를 걸어가면 약초숲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마치 관광지 입구라도 되는 양, 등산로의 출발점이라도 되는 양 인공적인 구조물과 선한 인상의 경비병으로 가득한 이곳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숲이 시작된다.
“아악!”
그리고 숲에 들어선 이들은 채 100m 구간을 넘기도 전에 독충에게 쏘이거나 물렸다.
“바니!”
퉁퉁 붓기 시작하는 발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는 바니의 모습에 칼은 그의 곁에 앉아 상처를 살폈다.
고통스러워하는 바니의 모습을 보며 칼은 망태기에서 응급약을 꺼내 상처에 발랐다.
약초숲에 서식하는 독충을 주로 잡아먹는 독두꺼비의 오줌으로 만든 연고였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응급조치일 뿐,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선 의사에게 데려가야 했다.
“그러게 수풀로는 가급적 들어가지 말라니까.”
칼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약을 바니의 발목에 발라주었다.
“새벽의 눈물이 있잖아. 그걸 어떻게 참냐고. 으으으…….”
바니가 통증에 눈물을 찔끔 흘리며 이야기했다.
칼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바니를 바라보며 고함쳤다.
“새벽의 눈물 얻으려다 자네 부인의 눈물부터 보게 생겼어!”
“으으으……”
응급 처치를 끝낸 후 약을 도로 가방에 집어넣은 칼이 천천히 바니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다행히 독성이 강한 벌레가 아니었던 만큼, 바니의 생명 자체에는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독이 계속 퍼지기 시작하면 다리를 잘라야 하는 수도 있음을 알기에 칼은 다급한 발걸음으로 바니를 이끌고 숲 밖으로 나가려 했다.
문제는 바니의 상태였다.
“아으으윽…….”
한 걸음 뗄 때마다 바니는 고통을 호소했고, 그로 인해 두 사람의 움직이는 속도는 상당히 느려졌다.
“바니. 아파도 참고 서둘러 움직여야 해. 안 그러면 자네 다리를 잘라야 해.”
“아으으으…….”
“자, 움직여 봐.”
그렇게 칼과 바니가 힘겹게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거기 두 사람.”
누군가 등 뒤에서 그들을 불렀다.
고통에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바니를 대신해 칼이 시선을 뒤로 돌렸다.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 아딘이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로브로 코 위쪽이 모두 어둠에 가려진 남자의 등장에 칼은 흠칫했다.
아딘은 천천히 칼에게 다가가 그에게 열매 하나를 건넸다.
칼은 얼떨결에 열매를 받아들고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아딘을 바라보았다.
“그 열매를 친구에게 먹이시오. 그럼 통증이 가라앉을 것이오.”
아딘의 말에 칼은 여전히 불신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신 바니가 행동을 보였다.
“바니!”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정체 모를 열매를 잽싸게 가져가 급히 먹는 바니를 보며 칼은 화들짝 놀랐다.
아주 가끔, 고약한 성질머리를 지닌 변태들이 부상자에게 더 독한 독물을 약이랍시고 먹이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장 고통에 시달리는 바니에게는 그런 드문 경우를 고려하여 의심할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순식간에 열매를 먹어치운 바니.
걱정스러운 눈과 의심하는 시선으로 바니와 아딘을 번갈아 바라보는 칼.
그리고 무심하게 발걸음을 옮겨 숲으로 들어가는 아딘.
“이봐, 자네!”
말없이 떠나는 아딘을 칼은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하지만 아딘은 그의 부름을 무시한 채 그렇게 숲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뭘 부르고 난리야. 어차피 한 5분 지나면 멀쩡해질 텐데.’
칼의 의심을 떠올리며 아딘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다들 목숨 걸고 들어오는 곳이다 보니 쉽게 서로를 믿지를 못하는가 봐. 사실 이런 곳일수록 서로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 법인데.’
바니와 칼.
사실 두 사람은 아딘에게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은, 그들이 어떻게 되건 아딘은 상관이 없었다.
단지 그들은 같은 여관에서 지낼 뿐인, 가끔 오다가다 서로의 존재를 힐끔거릴 뿐인 존재니까.
만약 그들의 동료 중 하나인 레니가 아딘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바람에 쓸데없이 독충을 손으로 눌러 쏘이는 일만 없었다면, 아딘은 그들을 돕지 않았을 터였다.
‘고향으로 가니 마니 하더니, 친구가 깨기 전에 어떻게든 풀 한 포기는 더 가져가려는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딘은, 조금 전 바니가 들어갔던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과연 그곳에는 할미꽃처럼 생긴 보랏빛 약초, 새벽의 눈물이 있었다.
그것을 뽑아 매고 있는 약초 망태기에 집어넣은 후 아딘은 수풀을 해치며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치이익-!]
한참을 수풀을 가르며 움직이고 있을 때, 고양이만 한 크기의 거미를 연상시키는 독충이 아딘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미처럼 생기긴 했지만, 다리가 10개에 눈이 1개뿐인 독충의 등장에 아딘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가만히 독충을 주시하며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과부거미독사슴>
<독거미를 주식으로 삼는 독충이다.>
<이빨에서 분비되는 독에 중독될 경우 30초 안에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해독을 위해선 자색독두꺼비의 땀이 필요하다.>
두루마리는 독충에 대한 정보를 담백하게 아딘에게 알려 주었다.
아딘은 피식 웃으며 두루마리를 접어 품에 넣었다.
그리곤 천천히 독충을 향해 전진했다,
[키이잇……]
그러자 독충은 처음의 당당하던 기세는 오간 곳 없이 파르르 떨며 뒤로 물러나더니 이내 다른 수풀로 모습을 감추었다.
‘네놈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아딘은 망태기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병뚜껑을 따고 안의 내용물을 손바닥에 뿌린 후 양손을 비벼 로브 전체를 문질렀다.
‘만드는 과정이 좀 까다롭긴 하지만, 괜히 또 불칸의 갑옷을 입은 채로 돌아다니다 엉뚱한 사람 놀라게 할 순 없으니까.’
아딘에게는 필요로 하는 정보를 바로 알려 주는 두루마리가 있었다.
모든 것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많은 것을 알려주기는 하는 두루마리.
그것 덕분에 아딘은 약초숲에서 주의해야 할 독충과 그에 대한 대처법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지금 아딘이 꺼내 바른 향수였다.
향수라기보단 스킨로션에 가까운 이 액체의 정체는 독충을 주식으로 하는 검푸른독수리 새끼의 오줌과 놈들의 알을 주식으로 하는 검은머리거미의 체액으로 만든 것이었다.
즉, 독충의 천적과 그 천적의 천적이 지닌 호르몬으로 독충을 물리치는 이치였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아딘은 근 사흘 동안 불칸의 갑옷을 입은 채 검푸른독수리의 둥지 다섯 곳을 돌았다.
약간의 운이 따른 결과 그는 사흘 정도 쓸 수 있을 만큼의 향수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딱 오늘 인내의 뿌리 하나만 찾고 돌아가자.’
몸에 향수를 한 차례 더 바르는 일을 끝낸 후 아딘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독충에 대한 대비가 완벽한 만큼, 그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
가끔 조금 전 나타난 과부거미독사슴과 같은 대형 독충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모두 더듬이로 아딘의 향을 맡고는 모양 빠지게 도망치기 일쑤였다.
물론 독충에 대한 방비가 됐다 하여 원하는 약초를 찾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진짜 더럽게 안 나오네.’
벌써 여섯 개째 새벽의 눈물을 뽑아 망태기에 집어넣으며 아딘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제일 비싸던데 말이야.’
두루마리에 따르면 약초 중 가장 비싼 것은 인내의 뿌리였다.
뿌리의 길이에 따라 편차는 있지만, 평균적인 크기라 쳤을 때 1뿌리당 200골드는 무난했다.
200골드. 즉 700만 원의 값어치를 하는 물건인 만큼 당연히 찾기는 어려웠다.
‘후우. 오늘은 공친 건가?’
안톤이 준 100골드로 콘스탄티노바에서 출발해 엘프숲 외곽을 거쳐 플루슈드로 오는 동안 아딘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
어떤 마을에선 아예 화폐가 통용되지 않아 곤란을 겪기도 했고, 화폐가 통용되는 곳에선 살인적인 물가에 제대로 식사도 못 챙겨 먹기 일쑤였다.
‘적어도 1천 골드는 있어야 무난하게 움직일 수 있는 데 말이야.’
오는 길에 말이 호랑이에게 잡아 먹히는 바람에 말도 새로 사야 했다.
게마인샤프트의 경우 여전히 물물교환이 주로 이루어지기에 적당히 식량과 바꿀 물건, 예를 들면 가죽이나 실 같은 것도 구매해야 했다.
거기다 혹시 모를 변수까지 대비하면, 1천 골드 즉 3500만 원도 모자랄 수 있다는 것이 아딘의 생각이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김현수로서의 버릇으로 인한 생각이었다.
항상 물건을 살 때, 그 물건 가격의 2배 이상 되는 금액을 쥐고 있어야 안심을 하는 그의 습성이 아딘의 선택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다.
‘오늘 수확으로는…… 250골드가 전부인가?’
망태기에 담긴 약초들을 살피며 아딘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바퀴만 더 돌고 돌아가자.’
그는 망태기 덮개를 닫은 후 두루마리에 나타난 지도에 의지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대략 30분 정도를 더 걸으며, 새벽의 눈물만 2개 더 구한 채 슬슬 포기라는 단어를 아딘이 생각할 무렵이었다.
“왜 안 나오지?”
아딘이 미간을 좁히며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딱히 뭘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갑갑한 마음에, 일종에 가이드북 역할을 하는 두루마리를 펼쳤을 뿐이었다.
“응?”
그리고 아딘은 볼 수 있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사방 50m를 환히 보여주는 지도가 두루마리에 나타나 있는 것을.
지도 곳곳에 푸른 점과 붉은 점이 찍혀 있는 것을.
<푸른 점은 새벽의 눈물>
<붉은 점은 인내의 뿌리>
아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친절한 두루마리 씨. 감사합니다.’
아딘은 두루마리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두루마리에 난 푸른 점과 붉은 점을 하나씩 지워나갔고 그 작업은 해가 저물 무렵에야 끝을 맺었다.
* * *
“음?”
아딘은 자기 맞은편에 앉는 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칼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거, 같은 여관인 줄은 오늘 처음 알았네.”
그러면서 그는 종업원을 향해 손짓했다.
곧 종업원이 쟁반에 나무잔 2개를 들고 아딘의 테이블로 왔다.
맥주가 든 잔을 종업원이 내려두고 떠나자 칼은 잔을 내버려 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는 고마웠수다. 덕분에 친구가 빨리 회복해 의사 왕진비를 아꼈어요. 내가 뭐 돈이 크게 없어서…….”
그렇게 말끝을 흐린 후 칼은 천천히 자기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곳에 앉아 있던 바니가 아딘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딘은 로브의 어둠 속에서 피식 웃으며 칼이 남기고 간 잔을 들어 맥주를 한 모금 넘겼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모습이다 했는데…….’
자신을 힐끔거리며 자기들끼리 맥주를 마시는 칼과 바니.
두 사람을 보며 아딘은 가만히 예전 기억을 더듬어 갔다.
‘아버지 모습이네.’
김현수의 부친 김철호 씨.
평생 가족을 위해 온갖 험한 일, 위험한 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다가 말년에 만성 관절염에 시달린 남자.
하나뿐인 아들이 금수저를 상대로 한 힘겨운 법정투쟁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기어코 보지 못한 채 계절성 독감으로 세상을 떠난 불쌍한 아비.
어릴 적 보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바니와 칼, 두 남자에게서 보였기에 아딘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없이 맥주만 들이켰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맥주를 들이켜던 아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망태기를 든 채 성큼성큼 칼과 바니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맥주를 마시며 아딘을 힐끔거리던 두 사람은 그가 다가오자 맥주를 내려놓은 채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아딘은 망태기에서 새벽의 눈물 하나를 꺼내 그들의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칼과 바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걸 왜……?”
칼이 아딘을 보며 물었다.
아딘은 대답하지 않고 연거푸 유리병 하나를 꺼내 새벽의 눈물 곁에 놔뒀다.
“내일부터 숲에 들어가기 전에 그걸 적당히 옷과 발목, 손목에 묻히고 들어가시오. 그러면 독충에게 물리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아딘은 말없이 발걸음을 옮겨 2층으로 올라갔다.
삐걱거리는 목재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아딘의 뒷모습을 칼과 바니는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쓴 소설 속 망나니 왕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