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후우우우… 감당이 안 되는 취향이라니까.”
선실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카일은 고개를 돌렸다.
개인의 개성은 존중하고 배려하는 게 카일의 평소 생각이긴 했지만… 세피로스의 사디즘은 예외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카일 자신을 대상으로 저 욕망을 품고 있으니 더 꺼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카일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세피로스를 경계하고 경멸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주인님. 저는 저 여자가 정말 싫어요.”
바로 아리시아였다.
아리시아는 진심으로 혐오스럽다는 듯이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세피로스의 저런 취향은 날 때부터 생긴 건 아니었다.
아무리 뱀파이어라고 해도 일개 노예일 뿐인 그녀가 어떻게 이런 독특한 성적 취향에 눈을 뜨겠는가?
노예의 기본은 어디까지나 복종이다.
다만 그녀의 경우는 처음에 그녀를 노예로 구입했던 중년의 귀족 남자가 문제였다.
그는 백작의 직위를 가진 귀족으로 세간에는 위엄과 관록을 겸비한 고귀한 귀족의 표상이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남들이 모르는 은밀한 취미가 있었고, 그 취미를 채우기 위해서 여러 노예들을 구입하고 있었다.
도저히 세상에 밝힐 수 없는 은밀한 취향인 만큼 오직 노예들을 대상으로 해서만 자신의 변태적인 취향을 만족시키고 있었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어느 날 그는 세피로스를 손에 넣었다.
세상에 보기 드문 뱀파이어 노예.
무엇보다 그를 흥분시킨 것은 뱀파이어에게 있는 고유 능력인 매료의 존재였다.
그건 그야말로 잘못된 만남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뱀파이어의 매료 능력을 통해서 그저 연극으로 하던 소프트한 플레이를 넘어서, 진짜 굴욕과 치욕을 동반한 하드한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된 그 귀족은 점점 선을 넘어갔다.
나중에 가서는 누가 주인이고 누가 노예인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점점 선을 넘어가다 보니 비밀을 유지하기도 힘들어졌고, 결국 둘의 역전된 관계가 집안사람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당연하게도 백작가에는 난리가 났다.
귀족이 노예를 상대로 성적인 관계를 가지며 즐기는 건 딱히 흠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세간의 인식이다. 하지만 당시 그 둘의 플레이는 그런 선을 아득하게 넘었다고 한다.
얼마나 기겁할 만한 것이었는지 귀부인은 그대로 졸도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세피로스는 폐기 상태까지 고문을 당한 후에 폐기장으로 팔려 갔다.
사실 귀부인과 그 자식들은 세피로스를 죽이려고 했지만 당시 주인이었던 귀족 남자는 그것만큼은 봐달라고 애원해서 그녀는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그렇게 폐기장까지 떨어진 세피로스는 카일에게 구원받았지만 뼛속 깊이 새겨진 그녀의 여왕님 기질은 변하지 않았다.
자신의 매료 능력으로 카일을 지배해 보려고 한 시도 또한 그녀의 과거와 그로 인한 여왕님 기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물론 실패했지만 그 열망은 아직도 그녀의 안에 있다. 오히려 손에 넣지 못한 만큼 더욱더 소유욕이 커져 간절해졌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세피로스에게 있어서 카일은 꼭 손에 넣고 싶은 남자 중에 한 명이 되었다.
“주인님, 진짜 쟤는 없애면 안 돼요? 도저히 못 봐주겠어요.”
아리시아가 거의 애원하듯이 카일에게 말했다. 하지만 카일의 대답은 단호했다.
“안 돼.”
“왜요?”
“능력이 있으니까. 테이밍을 이용한 정보 수집 능력과 매료를 이용한 첩보능력. 둘 다 굉장히 유용한 능력이야.”
“그건…….”
“약이든 독이든 쓰기 나름이지. 나만 조심하면 되는 문제니까, 걱정하지 마렴.”
“알았어요. 주인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아리시아는 일단 카일의 의견에 순종했다. 다만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만에 하나 주인님에게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그때는 반드시 죽이겠어, 반드시.’
* * *
대륙력 528년 8월.
대륙의 남동쪽의 해역은 크게 술렁거렸다.
피바다 라킨이 이끈 삼백 척의 대선단이 카일이라는 새로운 영주가 이끄는 열두 척의 선단에 전멸해 버린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전멸은 아니다.
데드라고 하는 선장을 중심으로 해서 약 서른 척의 배는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거의 전멸이나 다름없었다.
생환한 해적들은 그날의 해전을 악몽이라고 표현했다.
적의 배에는 자신들이 이해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신병기가 가득했고, 적의 강함은 이제까지 봤던 어떤 해적들보다 더 강했다.
원래 해적은 당하면 이길 때까지 복수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들이라고 하지만 데드는 그 반대로 행동했다.
“카일 화이트 자작의 세력을 공격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하겠다. 만에 하나 여기에 따르지 않는 해적이 있으면 내가 가만히 두지 않겠다.”
카일에 대한 복수를 금하는 공식적인 경고문을 해적들 사이에 퍼트렸다.
사실상 패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해적들은 데드의 행동을 보고 겁쟁이라고 비웃는 한편 다른 쪽으로는 ‘카일 화이트 자작의 선단이 얼마나 무시무시하면 그러는 걸까?’라는 생각도 했다.
어찌 됐든 해적들은 카일에 대한 복수는 잠시 접어 두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피바다 라킨이 만들어 놨던 세력을 누가 접수하느냐는 것이었다.
비록 대부분의 주력 함선이 가라앉았다고 하지만 피바다 라킨의 이름하에 복속되어 있는 크고 작은 해적들의 숫자는 여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암시장과 환락의 광광산업으로 막대한 돈을 벌이고 있는 아르트라 항구에 대한 이권은 해적들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었다.
다만, 다른 해적들이 끼어들 틈도 없이 데드는 빠르게 피바다 라킨의 유산을 접수해갔다.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던 암시장의 커넥션을 모두 접수했을 뿐만 아니라 아르트라 항구의 대형 카지노와 창관까지도 모두 접수했다.
그 과정에서 반항하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이들은 다음날 해가 뜨기도 전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데드가 생각보다 강한 저력이 있다고 판단하거나 눈치 빠른 이들은 데드의 뒤편에 다른 세력이 붙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두 달도 되지 않아서 데드는 피바다 라킨이 남긴 세력을 모두 접수했다
피바다 라킨의 후계자이자 새로운 남서 해역의 패자로 떠오른 그 이름 캡틴 데드.
“나쁘지 않군. 수고했다, 멍멍아.”
“멍멍.”
하지만 누군가의 앞에서는 그냥 멍멍이일 뿐이었다.
보고서를 받은 세피로스는 자신과 같은 특수 부대원이자 직속 상사라고 할 수 있는 레이븐에게 말했다.
“이제 여기서 할 일은 거의 다 끝났어요. 주인님에게 가서 상… 아니, 보고해도 되겠죠?”
“보고는 이미 내가 다 했다.”
“내가 직접 가서 해야 할 보고도 있다고요.”
“그런 건 없다.”
“진짜 이럴 거예요, 대장.”
따지고 드는 세피로스에게 다크 엘프 레이븐은 무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인님의 명령이다. 너는 아르트라 항구에 머물면서 이 도시의 어둠의 조직을 규합하고 지배 구조를 공고히 해라.”
레이븐은 자기 할 만만 남기고 그대로 스르륵 사라졌다.
“하아아……. 짜증나!”
뒤에 남은 세피로스만 짜증을 낼 뿐이었다.
* * *
“와아아아아!”
“영주님, 축하드립니다!”
“영주님~ 여기 좀 봐주세요.”
피바다 라킨을 바다에 침몰시킨 후 당당하게 개선한 카일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왜냐하면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영지민들이 카일을 열렬하게 환영했기 때문이다.
항구에 가득 모여 있는 영지민들은 꽃잎과 색종이를 뿌리면서 카일의 개선을 환영했다.
배에서 내린 카일을 에이라가 가장 앞에서 맞이하며 말했다.
“개선을 축하드립니다, 영주님.”
“이거 네가 준비한 거니?”
에이라는 작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설마요. 전부 영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거예요.”
에이라의 말대로였다.
영지민들은 사실 이번 전쟁에서 대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카일이 영주로 부임하고 그들의 생활은 완전히 달라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영지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제 과거로 돌아가라고 하면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돌아가지 못하겠다고 결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큰 변화였다.
그런데 그런 영주가 전쟁터에 나갔다.
심지어 적선은 삼백 척이 넘는데 아군은 열두 척만 끌고 출진했다고 한다. 영지민들의 절반은 ‘존경하는 영주님이 드디어 미치셨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무모한 전쟁이었다.
영지민들은 제발 영주님이 이기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영주님이 용감하게 적을 무찌르고 당당하게 개선하기만을 바랐다.
그게 비록 현실성이 거의 없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미친 짓을 한 줄 알았던 영주가 대승을 거둔 것이다.
열두 척의 배만 끌고 가서 삼백 척이 넘는 적을 괴멸시켰다.
거기다 아군의 피해는 전무한 상황.
그야말로 어린애의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처럼 거짓말 같은 대승이었다.
자고로 사람은 기적에 열광하는 법이다.
그게 자신에게 유리한 기적일 때는 더욱더 그렇다.
“영주님이 승리하셨어. 결국 해내셨어.”
“와하하하. 난 걱정 같은 것 하나도 안 했다. 우리 영주님이 어떤 분인데.”
“웃기고 있네. 너 영주님이 미쳤다고 했잖아?”
“그랬나? 아무렴 어때? 이겼는데!”
“크하하하하하!”
영지민들은 카일의 승리를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들은 영주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누가 말도 안 했는데 모두가 항구로 모였다. 기적을 일으킨 영주를 환영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영주민들이 모인 것이다.
“와아아아! 영주님! 만세! 만세!”
“카일 화이트 자작님, 만세!”
“영주님! 영주니이이임!”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근처의 들꽃을 꺾어서 뿌렸고, 흩날리는 꽃잎 아래서 모든 이들이 목이 터져라 외치며 영주의 승리를 찬양했다.
카일은 그런 환대를 받으며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좀 죄책감이 생기는군. 이기는 게 당연한 전쟁에서 이기고 왔을 뿐인데 말이야.”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니에요.”
“걱정들이 많았나 보지?”
“영주가 미쳤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긴 했죠.”
“잡아낼까 보다. 미치긴 누가 미쳐.”
투덜거리는 카일이었지만 입꼬리는 계속 올라가 있었다. 에이라는 그런 카일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면서 말했다
“좋은 기회니까 뭐 좋은 말이라도 해봐요.”
“좋은 말? 무슨 좋은 말?”
“뭐든 해봐요. 지금 같아서는 오빠가 무슨 말을 해도 다 통할 것 같아요.”
‘확실히 그런 분위기이긴 하네. 그렇다면…….’
카일은 항구에 가득 모인 주민들을 보고 말했다.
“영주민들이여!”
카일의 한 마디에 환호성을 지르던 영주민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카일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이겼노라.”
“오오오오오오!”
“영주님 만세!”
“어쩜 저렇게 말도 멋있게 하실까?”
“크으으~ 짧고 간결하면서도 멋지다.”
“진짜, 타고난 카리스마야.”
카일의 한마디에 영주민들은 그야말로 뻑 가는 표정으로 자지러졌다.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와……. 표절하는 인성 좀 보소.”
“뭐 어때?”
카일의 옆에 있는 에이라 한 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