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해전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후 카일의 영지는 본격적인 발전에 시동을 걸었다.
그 해전의 승리는 카일이 예상하던 것보다 더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피바다 라킨은 이 근방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던 해적이었다. 그런 해적을 박살 냈다는 말은 카일의 세력권을 함부로 침략할 해적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거기다 피바다 라킨의 후계자로 아르트라 한구에 자리를 잡은 데드는 공식적으로 카일의 세력권을 터치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즉, 사람이 살아가기에 가장 중요한 안전이 보장된 땅이 되었다는 말이다.
도적까지 말끔하게 정리하고 또 주기적으로 순찰을 하며 싹이 틀 여지조차 주지 않는 카일의 영지는 이 근방에서 가장 안전한 땅으로 여겨졌다.
당연히 주변에서 인구가 몰려들었고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인구가 세 배 이상으로 늘었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많은 일자리가 필요했다.
일자리가 부족하면 부랑자가 늘어나고 부랑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영지의 치안이 다시 무너진다는 것과 같았다.
다행히도, 일자리는 차고 넘쳤다. 오히려 늘어난 인구로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말이다.
항구의 확장 공사를 위한 건설 현장과 영지의 도시 건설을 위한 공사 현장, 외성벽의 축성 현장, 영지의 산업지역으로 분류된 대장장이 특구 지역 등등…….
일자리는 차고 넘쳤고, 카일에게는 이런 일자리를 모두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있었다.
원래 카일이 바이에른에서 벌었던 돈만 있었다면 지금의 사업 규모를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르트라 항구를 장악한 데드가 카일에게 보내 주는 돈이 지금의 막대한 일자리를 감당하고도 남게 했다.
환락과 쾌락의 도시로 유명한 아르트라 항구의 지하 경제는 카일이 생각하던 것보다 더 규모가 컸다.
데드가 카일에게 보내 주는 돈은 도시 건설과 항구 확장, 그밖에도 카일이 생각하던 사업을 무진장 진행하게 해주었다.
그 밑에서 행정 업무를 돕고 있던 에이라는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완전 신나. 치트키 치고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느낌이야.”
그런 에이라의 모습을 보고 카일은 적성에 맞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좋아. 이 정도면 발판은 안정적으로 다졌군.”
카일이 바라보는 목표는 훨씬 더 멀리 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기초가 되는 토대는 탄탄하게 다진 편이라고 생각했다.
* * *
검은 바람이 이끄는 투란 전사단.
발레리아가 이끄는 장미 기사단.
이 두 단체는 카일의 병력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존재들이다.
카일의 영지에 돈이 돈다는 소식이 들리며 은근슬쩍 ‘자리를 잡아 볼까?’라는 생각으로 들어온 도적단들은 대부분 이 두 개의 단체 중에 하나만 나서도 순순히 박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도시의 치안 관리도 순조롭던 나날의 연속이었다.
“응? 검은 바람. 자네가 왜 여기에 있지?”
“우리는 우스터 마을에서 근처에 도적들이 보인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지. 발레리아 너는?”
“우리 역시 그 도적단을 토벌하기 위해서 찾아왔지.”
우연히도 두 단체가 같은 신고를 받고 같은 날 움직여서 마주한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별 문제는 없다.
“그럼 같이 하면 되겠군.”
“그렇게 하지. 오랜만에 합동 임무가 되겠군.”
그저 도적들만 더 불쌍해질 뿐.
우스터 마을의 촌장 에드워드는 몹시 든든하다는 얼굴을 하고 말했다.
“도적들은 서쪽의 산에 자리를 잡은 듯합니다. 길잡이로 우리 마을 청년을 붙여 드릴까요?”
“아니, 괜찮소.”
“우리만 있어도 충분하오.”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도적들이 있다는 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전 중에 산에 들어간 투란 전사대와 장미 기사단은 저녁 해가 지기도 전에 돌아왔다.
당연히 규모가 50명 정도 되는 도적단은 초전 박살 내고 난 후였다.
하나만 해도 재앙이나 다름없는 전력이 둘이나 찾아왔으니 도적들이 불쌍할 정도로 압도적인 토벌이었다.
“말끔하게 해결했으니 이제 안심해도 되오.”
“오오오……. 감사합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별일 아니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 주시오. 그럼 우리는 이만…….”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는 그렇게 촌장에게 일이 해결되었음을 알리고 마을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에드워드 촌장이 황급하게 둘을 잡았다.
“이렇게 바로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희 마을에서 축승회를 겸한 환영회를 준비했습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주군의 명령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원래 같았다면, 이 세계에서 영주의 병사나 기사들이 움직이면 그 지역의 마을 주민들은 몸살을 앓기 마련이다.
그들이 움직이는 동안 먹이고 재우는 것을 모두 감당해야 했고, 병사들이 마을 처녀들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급하게 숨기기 바빴다.
하지만 카일의 병력은 그런 짓을 전혀 하지 않았다.
횡포는 고사하고 마을에 들어가서 물 한 잔 얻어 마시는 것도 몹시 조심스러워 했다.
카일이 주민들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를 엄금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오히려 촌장이 검은 바람에게 애원을 하면서 제발 마을에 하루만 머물다 가라고 애원하는 신기한 광경이 펼쳐진 것이다.
결국 검은 바람은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마을 촌장이 거듭 요청하자 어쩔 수 없이 하루만 머물다 가기로 했다.
투란 전사단과 장미 기사단은 마을 전체에 열렬하게 환영을 받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젊은 남자들과 여자들에게 어마어마한 환영을 받았는데 그건 이들이 영지의 핵심 전력이자 중요한 이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 투란 전사들과 장미 기사단이 노예 신분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다.
하지만 노예라고 해도 그게 누구의 노예이며 어떤 노예인가에 따라서 그 신분과 가치는 완전히 달라지는 법이다.
실제로 다른 영지에서도 노예 출신의 기사나 관리들은 일반 영지민들에게 대우를 받는 것처럼 투란 전사단과 장미 기사단이 카일의 영지에서의 입지는 굉장히 높은 것이었다.
그런 이들이 마을에 들어오자 젊은 남녀들은 동경 반 선망 반의 심경을 담아서 그들을 바라봤다.
“와아아……. 진짜 사람이 어쩜 저렇게 아름답지?”
“저기 근육 좀 봐. 어머어머…….”
“여신이다. 여신은 실존하는 거였어.”
“저 탄탄한 가슴 좀 봐. 한 번만 안겨 봤으면…….”
사실상 그들도 자신들이 투란 전사단이나 장미 기사단의 일원과 한눈에 사랑에 빠져서 불타는 로맨스 같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장미 기사단은 마을 청년들이 넘보기에는 기죽을 정도로 너무 아름다웠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즐거웠다.
“자, 모두 즐겁게 먹고 마십시다. 술과 고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오오! 촌장님 감사합니다!”
“역시 우리 촌장님이셔.”
마을 촌장은 양과 돼지를 다섯 마리나 잡아서 연회를 열었고 사람들은 모두 흥겹게 먹고 마시며 즐겼다.
투란 전사단과 장미 기사단은 갑옷과 무기를 내려 두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며 흥겹게 먹고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는 한쪽에서 술을 홀짝거리며 그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런 것도 꽤 오랜만이군.”
“그러게 말이야. 술과 고기……. 작지만 그때는 그게 참 행복했는데 말이지.”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에게 이런 자리는 마치 카일과 함께 모험가로 활동하던 시기를 떠올리게 했다.
던전에 들어가서 며칠 동안 모험을 하고 올라오면 항상 카일이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술과 고기.
그냥 비싼 요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작은 뜰에 모여서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먹고 마시는 것뿐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도 그 시간은 참 즐거웠다.
“섭섭한가 보지?”
발레리아의 말에 검은 바람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쉬운 건 사실이지. 하지만 주인님이 점점 성공하는 것에 따라서 상황이 변하는 건 당연한 거지. 과거를 아쉬워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은 현재를 좋은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거야.”
“호오, 자네가 한 말 치고는 현기가 넘치는 말인 걸?”
“잊었나 본데, 발레리아. 나는 너보다 세 배는 더 산 늙은이야.”
“하하하! 그러고 보니 그랬지?”
검은 바람의 나이는 이미 일흔이 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건장한 중년 정도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이미 보통 사람 1인분만큼의 인생을 산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게 되면 지식의 습득 여부와 달리 자기 나름의 철학이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인데 검은 바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레리아는 그런 검은 바람을 믿음직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든 간에 주군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서로 최선을 다하지. 나는 자네를 진정으로 믿고 있어.”
“나 역시 발레리아 너를 같은 동료로서 믿고 신뢰하고 있어. 이건 진심이야.”
“고맙군. 자네 정도의 남자에게 동료로서 신뢰받는 건 기쁜 일이지.”
“하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면 영광이고.”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는 서로 술잔을 마주하고 훈훈한 분위기로 이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이다음에 벌어지는 일만 없으면 말이다.
“검은 바람 아저씨.”
“발레리아 누나.”
한 무리의 아이들이 도도도― 하는 귀여운 발소리와 함께 다가왔다.
“응, 무슨 일이니?”
아이들을 좋아하는 검은 바람은 반갑게 웃으면서 맞이해 주었는데 그때 아이들 중에 한 소년이 말했다.
“검은 바람 아저씨, 투란 전사단이 영주님의 군사들 중에서 가장 강한 거죠? 그렇죠?”
그러자 옆에 있는 작은 여자 아이가지지 않고 말했다.
“아니거든? 장미 기사단이 더 세다고 했거든? 그렇죠, 발레리아 누나!”
쩌저적―
순간 사람들은 훈훈했던 공간과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어린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호기심일 뿐이다.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같은 레벨의 순수하고 엉뚱한 호기심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양쪽 모두 강한 건 아는데…….’
‘누가 더 세지?’
원래 그런 순수하고 엉뚱한 호기심은 호불호를 가리지 않는 법이다.
마을 사람들은 검은 바람이나 발레리아가 어떤 답변을 할지가 내심 궁금했다.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는 잠시 서로를 의식하는 듯이 경계하다가 검은 바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크흠, 전투라는 것은 서로 간에 상성이라는 것이 있고 경우의 수가 다양하단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물론 우리 투란 전사단은 틀림없는 영주님의 최강 전력이지. 하지만 발레리아가 이끄는 장미 기사단도 분명 강하단다. 상황에 따라서는 우리도 고전을 면치 못할 수도 있단다.”
검은 바람의 입장에서는 이게 객관적인 사실을 알려주면서도 동료인 발레리아의 자존심도 살려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대답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하.하.하. 검은 바람 그렇게 말하면 애들이 꼭 우리 기사단이 자네들보다 약하다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잖아? 실제 붙으면 30분 만에 반으로 접어버릴 수 있는데 말이야.”
하지만 발레리아는 검은 바람의 생각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자신이 검은 바람보다 더 강하고 자신이 이끄는 기사단도 투란 전사단보다 더 강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카일의 휘하에서 가장 강한 것은 역시 정식 기사단인 자신들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둘의 대화에 따라서 한쪽에 있던 투란 전사단과 장미 기사단도 몹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X 됐다.’
‘하필이면 왜 그런 질문을 해가지고…….’
양쪽 모두 알고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 검은 바람이나 발레리아가 전혀 양보할 리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하하. 발레리아 애들 앞에서 거짓말하면 안 되지. 명색이 기사라는 사람이 말이야.”
“자네야 말로 벌써 노망이 오는 건 아니겠지? 누가 더 강할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뻔하잖아?”
검은 바람이 슬슬 태도를 손에 쥐었다.
발레리아 역시 한쪽에 있는 자신의 방패와 브로드 소드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일어섰다.
“한 판 붙어?”
“좋지.”
그와 동시에 투란 전사단과 장미 기사단의 단원들이 크게 외쳤다.
“대피! 전원 대피!”
“빨리 피해요.”
그리고 그들이 외치는 것과 동시에…….
콰아아앙!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의 가벼운(?) 대련이 시작되었다.
“뒤졌어.”
“오늘에야 말로 결판을 내자!”
“우워어어어어어!”
“아아아아아압!”
둘은 초능력까지 활용해서 본격적으로 붙기 시작했고 하룻밤이 지나도록 결판은 나지 않았다.
* * *
“잘하는 짓들이다.”
카일이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를 책망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주기에는 과실이 너무 뚜렷했다.
“파괴된 주거지가 다섯 개, 농지가 열 개가 박살 나고, 주민의 인명피해…는 다행이 없군.”
“죄송합니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주군.”
둘의 사과에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집과 농지 전부 고쳐 놔. 너희들이 직접.”
“예? 저희가요?”
“주, 주인님. 그건 좀…….”
“밑에 애들 시키지 말고 직접 해. 초능력 사용은 허가해 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더 반항하면 초능력도 사용 못하게 하고 집과 밭을 고쳐야 할 것 같았다.
며칠 후.
우스터 마을에서는 거대화한 검은 바람과 중력 조작으로 건축 자제를 나르는 발레리아를 볼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진귀한 광경을 보고 말했다.
“누가 최강인지는 정해졌네.”
“그러게 말이야. 역시 영주님이 최강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