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세계수 타기.
70층에서 79층 사이에서 열리는 탑 최대 규모의 이벤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거는 탑의 퀘스트를 무시하고 그저 세계수를 오르는 것만으로 층을 클리어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일까?
70층에 도착한 사람 중 대다수는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보다 훈련을 거듭해 세계수 타기를 준비하는 이들이 배는 많았다.
심지어 이벤트 도중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겪었음에도 다시 세계수를 오르려는 이들도 허다했다.
“죽을 수도 있다고요?”
“응. 들어보니까, 잘못 떨어지면 즉사할 수도 있대.”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요?”
세계수 타기에 대한 설명을 듣던 렐이 알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죽을 수도 있으면 그냥 사냥을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그러게나 말이다. 그래도 며칠 만에 층 하나는 가볍게 뚫을 수 있다니 시도도 안 하면 손해지.”
시간이 생명인 석찬의 입장에서 등반 시간을 단축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소중했다.
“설마, 하기 싫어? 세계수 타기.”
“아뇨? 나는 언제나 아저씨가 하라는 대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렐은 허리춤에 찬 검집에서 단검을 뽑아 빙글빙글 돌렸다.
“배운 거도 한번 써먹어 보고 싶고요.”
그녀의 표정이 먹잇감을 바로 앞에 둔 맹수처럼 돌변했다.
[좋은 눈빛이야. 그래, 그놈이 제대로 가르쳤네.]
‘맞죠.’
석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알렉산더와 찰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야 했다.
집무실로 가자 알렉산더와 찰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냐? 더 쉬지?”
“그러고 싶은데, 이벤트 시작까지 이제 고작 한 시간 남아서요. 올라가서 준비를 조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고.”
알렉산더는 보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대충 던지며 렐을 슬쩍 바라봤다.
“그 뺀질이 녀석이 가르친 거냐?”
“…네.”
알렉산더는 랜스가 렐을 가르치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뭐, 그래. 그놈이 그런 쪽은 잘하니까. 이왕 한 거 열심히 하고. 80층까지 한번 올라 봐라.”
“80층, 가능할까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하늘이 도우면 가능하겠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이런, 벌써 30분이나 지났다고?”
시계를 확인한 알렉산더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소리쳤다.
“미안하군.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가봐야겠네요. 더 늦기 전에.”
석찬이 슬슬 떠날 채비를 하자 알렉산더가 헛기침하며 찰스를 불렀다.
“크흠… 찰스, 그거 빨리 가져와.”
“예.”
“그거요?”
“그거, 인마.”
잠시 후, 찰스가 작은 상자를 하나 가져왔다.
“이건?”
“첫날에 살짝 내가 흥분해서 날뛴 것도 있고, 오랜만에 왔으니까 주는 선물이다. 라이너 네가 넣어둔 것도 있으니까 나중에 열어 봐.”
라이너,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그나저나 선물이라고 하니 궁금했다.
“뭐가 들어 있길래?”
“몰라. 받았으면 빨리 가라. 쉬려니까.”
“쉬기 전에 일을 먼저…”
“자네가 하도록 해, 찰스.”
“예?”
“오케이. 들었지? 나 쉴 테니까 빨리 가.”
찰스의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받으며 손을 휘젓는 알렉산더의 모습에 렐이 웃음을 터트렸다.
“파하! 아저씨, 대박. 나도 나중에 써먹어야지….”
“그래라, 꼬맹이. 이거 은근히 편하다니까?”
“애한테 좋은 거 가르치십니다. 아무튼, 건강하세요. 다음에 종종 찾아올 테니까.”
“다음에도 10년 만에 와봐. 그때는 이 정도로 안 끝나.”
“예.”
그 말을 마지막으로 떠나려던 석찬이 잠시 멈칫했다.
“왜, 또?”
“그건 뭐였습니까?”
“그거? 그게 뭔데?”
“그 붉은 기운 말이에요. 마력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것은 마력이라기보다는 살기에 가까운 힘. 하지만 살기만으로 마력에 준하는 힘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더욱 궁금했다. 알렉산더가 사용했던 그 힘이 뭔지에 관해.
“아, 이거.”
알렉산더가 손바닥을 쫙 폈다. 그 위로 일전에 보았던 붉은 힘이 보였다.
그저 힘을 발현했을 뿐인데, 찰스와 렐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히익…”
렐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기 일보 직전이었다.
석찬은 마력으로 그녀를 보호하며 알렉산더가 펼친 힘을 관찰했다. 악마 특유의 검은 마력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악마의 정반대. 신력과 가까운 힘이었다.
‘하지만, 붉은 신력이라니. 들어본 적 없어.’
[붉은 신력이라. 그런 건가. 그래서 그 녀석이….]
라우르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긴 했지만, 여전히 이해할 순 없었다.
“어쨌든, 새로운 힘을 찾으셨으니 다행입니다.”
“다행은 개뿔, 말년에 이런 거 얻어서 어디다 쓰라고?”
알렉산더가 붉은 신력을 거두며 툴툴거렸다.
“그럼, 진짜 가보겠습니다.”
“그려.”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석찬은 렐을 데리고 1층을 떠났고, 잠시 후, 웅장한 세계수의 전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째,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네.”
“그러게요…”
석찬과 렐은 일주일 전보다 확연히 많아진 사람들 틈 사이를 요리조리 헤매며 세계수 뿌리 여관으로 향했다.
1층으로 떠나기 전에 미리 돈을 지불해 놓았기에 들어가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20분 정도 남았으니까, 쉴 시간은 별로 없겠네. 짐만 풀고 필요한 거 챙겨서 1층으로 내려와.”
“네~.”
렐은 신이 나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갔고, 석찬은 옆방으로 들어가 필요한 것들을 챙겼다.
족히 한 달은 먹어도 괜찮을 식량, 여벌 옷, 무기, 방어구 등등 중요한 것부터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비상 의료 용품도 챙겼다.
‘힐이 있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렇게 준비한 것을 전부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석찬은 1층으로 향했다. 5분 정도 기다리니 렐도 내려왔고, 석찬은 그녀와 함께 세계수 중앙으로 향했다.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점점 많아져 갔다.
“지나가겠습니다.”
“어이, 거기! 밀지 마!”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세계수 중앙 광장 앞.
“윽.”
여러 사람과 부딪치다 보니 벌써부터 정신적 피로가 몰려오려고 했다.
‘어쩔 수 없네.’
무언가를 결심한 석찬이 렐을 확 안아 들었다.
“아저씨?”
“잘 잡아, 렐.”
석찬은 전력을 다해 마력을 회전했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날개가 한 쌍 생겨났다.
“뭐야?”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지만, 석찬은 개의치 않으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꺄아아!”
가슴팍에서 렐의 비명이 들려온다.
“우와, 아저씨? 이런 것도 할 줄 알았어요? 대박!”
그런데 어찌, 무서워서 나오는 것이 아닌, 즐거워서 나오는 비명 같았다. 마치 놀이동산에 놀러 온 어린애처럼 환호를 지르는 그녀를 보며, 석찬이 피식 웃었다.
“꽉 잡아.”
석찬은 그녀를 멘 채 빠르게 세계수 중앙으로 날아갔다.
방해하는 사람들이 한 명도 없어서 그런 것일까? 5분 동안 걸어온 거리의 10배를 고작 10초 만에 돌파한 석찬이 세계수 밑동 앞에 자리를 잡았다.
“재밌었다. 아저씨, 이거 나중에 또 해주면 안 돼요?”
짧은 비행이었지만, 렐은 정말로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래, 이벤트 끝나면 해줄게.”
“아싸!”
해맑은 그녀를 뒤로하며, 석찬은 시간을 확인했다.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1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조금 숨을 고르고 있으니 1분이란 시간은 금방 사라졌고, 세계수 앞에 거대한 메시지 창이 떴다.
[세계수 타기 이벤트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떴다!”
“드디어 시작하는 건가?”
메시지를 본 사람들이 기대감에 차 떠들어댔다.
“젠장… 또 시작이군.”
“이번에는 꼭 75층을…”
그에 비해, 기쁨이나 호기심보다는 중압감이나 각오를 보이는 이들도 존재했다. 이미 수차례 세계수 타기를 경험한 자들인 듯했다.
[퀘스트 창을 확인해주세요.]
잠시 후, 사람들 앞에 메시지 창이 출력되었다.
[이벤트 퀘스트 - 세계수 타기]
[세계수 등반]
[보상 : 층 해금]
[페널티 : 추방]
굉장히 심플한 퀘스트 창이었다.
“아저씨. 지금부터 오르면 되는 거예요?”
퀘스트 창을 본 렐이 열의를 불태우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하지만 석찬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이야.”
“왜요? 시작한 거 아니에요?”
“보통 이런 이벤트 퀘스트를 하면 안내자가 오거든. 아직 안 나타난 걸 보면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야.”
30층에서 이벤트 퀘스트를 겪어보았고, 여러 이벤트 퀘스트 내용을 들었던 석찬은 자연스레 안내자가 나타나길 기다렸고,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그의 예상대로 안내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석찬도 잘 아는 안내자 G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G입니다!”
언제나처럼 활기찬 모습으로 나타난 G는 석찬을 향해 작게 윙크를 날렸다.
“자 모두 퀘스트 창을 받아보셨을 겁니다. 이번 이벤트는 정말 간단합니다. 말 그대로 세계수를 타고 정상에 오르시면 끝! 이미 해보신 분들도 계시죠?”
G는 특유의 유쾌한 톤으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금 달라진 점이 하나 존재합니다!”
“달라진 점?”
“이번 이벤트부터는 참여 횟수가 오로지 1회로 한정됩니다. 즉, 이번에 이벤트를 참가하신 분들은 다음부터는 세계수 타기에 참여하실 수 없습니다!”
“뭐?”
당연하지만, 그 말에 사람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세계수 타기만 집중하고 사냥을 안 하시는 분들이 속출해서요. 어쩔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반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강한 살기를 뿜어내는 G. 덕분에 그의 말에 더 이상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난이도도 너무 쉽다고 생각해 이번 이벤트부터 난이도를 상향 조정했습니다. 이것으로 안내는 끝, 모두 즐겨주시길!”
그 말을 마지막으로, G는 모습을 감췄다. 멍한 표정의 사람들 앞에서 몇몇 사람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도 움직이자.”
“네~.”
석찬과 렐도 선두에 서서 세계수에 오를 채비를 했다.
[마력 날개는 사용 금지입니다.]
일전에 들었던 것처럼 비행 수단은 봉인된 상태였기에, 다시 사람들 사이로 끼어들어 세계수 아래로 달려가려는 찰나였다.
쿠구궁.
갑자기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쿠궁.
이내 땅에서 나무로 이루어진 거대한 팔이 하나 튀어나왔다.
“막아!”
사람들은 충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며, 꿈틀거리는 팔을 바라봤다.
“구어…”
잠시 후, 팔부터 시작해 거대한 나무 거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라?”
“저런 게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사람들은 당황했다.
“뭐야, 저거.”
“허어…”
이벤트를 여러 번 겪어봤던 이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세계수 타기에서 몬스터를 마주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
“구어어…”
나무 거인에게서 느껴지는 강대한 기운에 사람들은 섣불리 움직이기보다 녀석의 동향을 살펴볼 계획이었다. 그러던 그때.
피융.
한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나무 거인에게 날아갔다.
쾅!
나무 거인의 가슴팍에 꽂힌 화살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뭐야?”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향했다.
“휘유, 안 죽었네?”
그곳에는 한 엘프 소녀가 있었다. 아직 앳된 티를 다 벗지 못한 소녀는 활시위에 다시금 화살을 장전했다.
“한 방 더!”
렐의 손에서 주황빛의 화살이 쏘아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