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식사 시간은 매우 무거웠고,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알렉산더는 예의상으로 대접하는 거라는 뉘앙스를 가득 풍겼고, 드레이븐 일행도 이를 안다는 듯 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여인을 빼고.
“힝, 싫어.”
메리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투로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드레이븐과 랜스에게 떠밀려 금방 일어났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빨리 가라. 다신 보지 말고.”
“대장, 건강하쇼.”
“건강은 개뿔. 니들 보니까 수명이 50년은 준 것 같은데.”
“…건강하시고, 예전의 일은… 아닙니다.”
드레이븐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고개를 내젓고는 모습을 감췄다. 랜스 또한 안부 인사를 마지막으로 떠나려다가 석찬에게 다가와 슬쩍 말을 건넸다.
“어이 올킬러, 대련 즐거웠고, 그 꼬맹이 엘프에 관해서는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요.”
“맞다. 세계수 타기 참가한다고 했지. 어느 정도 남았는데?”
“오늘 하루 빠졌으니 6일 남았습니다.”
그 말에 랜스의 표정이 굳었다.
“6일이라… 빡세네. 내일 다시 올 테니 대장 안 보이게 어디 한적한 데서 기다리고 있어. 그 꼬맹이랑 같이.”
“알겠습니다.”
“오케이. 다시 한번 미안하다.”
“언제 가냐.”
“지금 갑니다, 가요!”
알렉산더의 매서운 눈빛에 자리를 떠나는 랜스. 마지막으로 베로니카가 메리를 한 손에 든 채 알렉산더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사라졌다.
“후에엥. 대장, 나중에 봐!”
“…….”
마지막까지 알렉산더의 미간을 좁히게 만드는 메리. 어쨌든 시끄러웠던 연회실이 조용해지고, 알렉산더는 미련이 남은 눈빛으로 옛 동료들이 떠나간 자리를 잠시 둘러보더니 방을 떠나갔다.
“…….”
금세 찾아온 적막 가운데, 알렉산더를 보좌하러 갔던 찰스가 한숨을 내쉬며 연회실로 돌아왔다.
“아, 아직 남아 있었나.”
“예.”
“예전에 쓰던 방은 계속 비어 있으니 거기서 자면 될 거야. 청소는 꾸준히 해놨으니 걱정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찰스.”
“뭔가?”
“예전에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아까도 느낀 거지만… 별로 사이가 나빠 보이진 않던데요”
알렉산더의 불같은 성격상 정말 사이가 틀어졌다면 수련실 문 앞에서 참는 것이 아니라 뒤도 보지 않고 공격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그리고 떠날 때 드레이븐의 표정이나 메리와 미쉘을 보면 그리움이 많이 묻어 있는 듯했다.
“그건… 하.”
찰스는 한숨과 함께 말을 머뭇거렸다.
“말씀하기 어려우시다면 굳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맙네. 이게 아무래도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때가 되면 영주님께서 설명해 주실 거네.”
“그렇다면 기다리죠, 뭐.”
“그래. 시간이 늦었는데 빨리 쉬게.”
“알겠습니다. 쉬세요.”
찰스와 헤어지고 난 후, 석찬은 1층에 오면 항상 머물렀던 방을 찾아갔다. 방은 깨끗했다. 항상 청소했다던 찰스의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편하다.’
10년 만에 맛보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침대의 감촉.
머리는 복잡했지만 워낙 겪은 일이 많아서일까? 석찬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석찬은 병실로 향했다. 빈 침상들 사이에 렐이 누워 있는 침대가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치료가 잘못된 것 같지는 않은데.’
겉으로 볼 때 렐은 멀쩡했다. 처음 일어났을 때의 자신이나 알렉산더처럼 붕대가 감겨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데 문제가 있는 걸까?’
그런데 문제가 있을 이유가 있던가?
‘설마 내가 모르는 뭔가 있었나?’
알렉산더와 싸울 때는 워낙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렐을 보살필 여력이 없었다. 몬스터에게 습격당했을 가능성은 극히 적었지만,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홀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을 때쯤.
번쩍.
렐의 눈이 떠졌다.
“렐?”
눈을 뜬 그녀는 눈동자를 빠르게 둘러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레 석찬에게 물었다.
“아저씨? 여기 어디예요? 난 왜 이러고 있고?”
“그사이에 일이 조금 많았어. 그보다, 몸은 괜찮아?”
“조금 뻐근한 거 말고는 괜찮은데, 왜요?”
“아니, 그냥 걱정이 되어서.”
“걱정할 거까지야. 그나저나 여기 진짜 어디예요?”
“영주성이니까 안심해.”
“아, 휴… 다행이다.”
영주성에 관해 미리 설명을 들었던 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아저씨가 저 구해주신 거예요?”
“응? 구해주다니?”
[누가 누굴 구해줘?]
라우르 또한 의문을 감추지 않았다.
“그 이상한 사람들한테서 저 구해준 거 아니에요?”
“이상한 사람들?”
“왜 그 머리색 이상한 아저씨 아줌마들. 아저씨랑 싸운 아저씨 데려가는 거 쫓아가려다가 잡힌 거거든요.”
“아.”
그제야 석찬은 렐이 쓰러졌던 것과 이곳에 누워 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랜스 일행을 오해해서 미행하려고 했던 거군.’
하지만 탑의 최강자들인 랜스 일행이 렐의 미행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고, 그대로 붙잡힌 것이리라.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야. 아닐 거야.”
“엥? 아니면 아닌 거지, 아닐 거야가 뭐예요?”
“있어, 그런 게.”
“응?”
알렉산더와 랜스 일행의 일을 모르는 렐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어쨌든 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정말 1층에 온 목적을 수행해야 할 차례였다.
“렐, 잘 들어. 지금부터 우린 네 스승이 될 사람한테 갈 거야.”
“스승?”
“있어, 이상한 아저씨.”
그리고 잠시 후.
“어, 어제 봤던 이상한 아저씨다.”
“초반부터 굉장히 언짢구만.”
약속한 대로 한적한 곳에서 나타난 랜스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저씨 머리색 이쁘다. 염색한 거예요?”
“염색? 이런 거?”
랜스가 마력을 이용해 머리색을 자유자재로 바꿔 보이자, 렐이 눈을 빛내며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이것도 할 수 있어요? 그럼 이거는?”
어제 일도 있고 해서 조금은 긴장할 줄 알았건만.
[긴장은 개뿔.]
원래 엘프란 종족은 친화력이 뛰어난 걸까? 70층 찻집에서 만난 엘프 여인도 그렇고 모르는 사람에게 적대심이란 것이 없나 보다.
“…나중에 알려줄 테니까, 잠깐만. 야, 얘 원래 이렇게 말이 많냐? 어떻게 좀 해봐.”
렐의 질문 공세에 못 이긴 랜스가 석찬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도 몰랐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을 많이 할 줄은.
“렐, 이쯤 하자.”
“네… 아쉽다.”
그대로 다행히 브레이크는 존재하는지 말 한마디에 바로 질문을 멈추는 그녀.
“잘했어. 자 그럼 소개해줄게. 이분은…”
“됐다. 내가 하지. 이 몸의 이름은 랜스 톳퍼. 앞으로 6일… 맞나?”
“네.”
“그래, 앞으로 6일간 네 녀석을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줄 스승이다.”
“오, 아저씨가 제 스승님이에요?”
“그래.”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시간이 없다고 하니… 빨리 시작하도록 하지. 괜찮나?”
“전 괜찮은데, 괜찮겠어. 렐? 바로 시작해도.”
“전 오케이!”
“네, 그럼 바로 시작하시죠.”
“오케이. 기대하라고.”
그렇게, 랜스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우선적으로 한 것은 바로 렐의 현재 신체 상태를 알아보는 일. 이것을 진행하기 위해, 석찬은 두 사람과 함께 70층으로 올라왔다.
층간 페널티가 없어지자, 렐의 기운이 한층 더 강해졌고, 랜스는 차근차근 렐의 신체 능력을 측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힘은 요정도… 오, 유연성은 생각 이상인데? 아주 좋아.”
역시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렐의 유연성은 랜스에게도 꽤나 큰 칭찬을 받았다.
잠시 후 땀을 뻘뻘 흘리는 렐에게 시원한 물을 건네주며, 석찬은 랜스의 평가를 같이 들었다.
“자세한 스탯은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꽤나 준수한데, 제대로 힘을 못 쓰는 것 같은 느낌이야.”
“아, 그건 아마 시스템을 얼마 전에 받아서 그럴 거예요.”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설마 그거냐? 천계 뭐시기.”
“뭔지 아세요?”
“내가 탑에서 보낸 세월이 얼만데, 당연히 알지. 어쨌든 알겠어. 하, 조금 빡세겠는데?”
“괜찮으신가요?”
“괜찮고 자시고, 해야 하는 거니까. 하, 이겼어야 하는 건데.”
렐을 가르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대련에서 진 랜스가 이행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잠시만요.”
생각해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대련 결과는 무승부 아니었나요?”
그렇다. 마지막 합은 베로니카로 인해 막히고 대련은 흐지부지 끝난 상황으로 승과 패가 없는 싸움이었다.
“내가 70층짜리 꼬맹이랑 비긴 것부터가 진 거다. 알겠냐.”
“…알겠습니다. 그럼, 화이팅하십쇼.”
“오냐… 하, 꼬맹이. 그만 쉬고 와봐.”
“윽, 조금만 더 쉬면…”
“엄살 피우지 말고! 워밍업 한 거 가지고 그렇게 골골대면 어떡해? 지금부터 본 수업 시작해야 되는데.”
“힉.”
지금까지가 준비고 이제 시작이라는 말에 렐이 공포에 젖은 눈으로 석찬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석찬은 애써 모르는 체하며 뒤를 돌아봤다.
“아저씨? 살려주세요!”
렐의 구슬픈 비명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그렇게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새 세계수 타기 이벤트가 시작하기까지 약 5시간 전.
“끝. 이것으로 넌 자유다!”
짧았던 랜스와의 특훈이 끝나고, 녹초가 된 렐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드디어 끝이다!!”
승리의 포효를 뿜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6일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나름대로 갖춰진 무장과 시야가 가려지지 않도록 단정하게 묶은 머리. 그리고 허리에 찬 여섯 개의 작은 검집과 등에 멘 활과 화살통까지.
풋내기 소녀에서 전사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그녀의 모습에 석찬이 혀를 내둘렀다.
“수고하셨어요. 랜스.”
“오냐. 내가 진짜 고생 많이 했다.”
랜스는 자신의 청발을 훑으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우선 70층 베테랑 사냥꾼 수준으로 끌어올려 놨다. 상황과 때에 따라서는 베테랑 사냥꾼 이상의 힘을 낼 수도 있을 거다.”
베테랑 사냥꾼. 석찬의 힘에 비하면 한참 아래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층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무력을 가진 자들.
아무리 천계의 축복으로 좋은 스펙의 몸을 가지게 됐어도, 한 번도 힘을 제대로 써본 적 없는 렐이 도달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는 경지였다.
그러나 랜스는 렐을 그 경지까지 당당하게 올려다 놓았다.
“대단하시네요.”
“대단하긴 뭘. 대장보다는 덜하지. 그리고 기본적인 베이스가 없던 것도 아니고.”
전투에 아예 문외한이었던 렐이지만, 활만큼은 엘프 특유의 높은 숙련도와 잠재력이 맞물려 처음 배우는 것인데도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게다가 지금은 더욱 성장한 상태고.’
전부는 아니지만, 석찬은 렐의 훈련을 대부분 지켜보고 있었고, 때문에 자신했다.
‘이번 이벤트.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이벤트, 잘해라. 어렵지 않을 거다.”
“예, 감사합니다.”
“난 이만 가본다. 나중에 또 보자.”
“예.”
랜스와의 마지막은 짧게 마무리했다. 그가 떠나고 5시간 뒤, 드디어 세계수 타기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