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여섯 번째가 새로운 캡슐을 꺼내들었다. 이전까지와 다른 붉은색 캡슐이었다.
캡슐을 꺼내들기 전까지만 해도 석찬은 별로 큰 위협을 느끼지 못했다.
이전까지 그가 보여줬던 키메라들이 전부 일반적으로 탐지가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지녔을 뿐, 다른 장점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번 것도 같을 줄 알았다.
‘보나마나.’
전보다 조금 더 강한 놈일 뿐, 약한 녀석이 등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런데 석찬의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 캡슐을 깨고 나타난 녀석은 굉장했다.
쿠구궁.
녀석이 나타남과 동시에 대지가 흔들린다.
쩌적- 쩌저적-
건물들 사이사이에 큼지막한 금이 생겨난다.
[오우야, 석찬아. 이번에는 조금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라우르의 물음에 석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구어어어!
키메라의 거대한 울음소리가 귓속까지 파고든다.
“크윽…”
석찬이 바닥에 주저앉았고, 이브의 보호막에 가려져 있던 사람들도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끄악!”
“어지러워….”
‘이게 무슨….’
석찬은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키메라를 바라봤다.
방금 전 울음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라도 하는 듯 거대한 몸뚱아리를 드러낸 녀석은 순수한 눈빛으로 석찬을 응시했다.
“구우우?”
작게 우는 것만으로도 몸에 긴장감이 감돈다.
‘저 녀석… 강해.’
그냥 강한 게 아니다. 지금껏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이런 느낌은… 샌드 웜 이후로는 처음인데?’
샌드 웜. 15층에서 만난, 석찬에게 있어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고, 까딱 잘못했다간 죽을 수도 있었던 최악의 몬스터.
지금 눈앞에 있는 키메라에게서는, 샌드 웜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위험함이 가득 느껴졌다.
“내 역작이다. 인간 100명분의 목숨이 들어간 녀석이지.”
여섯 번째의 말에, 분노보다도 긴장감이 먼저 깃든 이유다.
역작, 걸작이라고 말하던 녀석들을 소모품 취급하더니, 이게 녀석의 역작이라면 그럴 만했다.
“내가 왜 시답잖은 옛날이야기나 하고 있었겠나? 큭큭.”
여섯 번째가 신나서 말했다.
“이 녀석이 사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완성인 놈이었거든. 인간의 목숨을 여러 개 뭉치다 보니 애로 사항이 많았어.”
여섯 번째는 자신의 키보다 높은 곳에 있는 키메라의 무릎을 툭툭 치며 말했다.
“융합에 시간이 조금 필요했는데, 너랑 얘기하면서 시간을 꽤 벌은 탓이 컸지. 고맙다, 고마워. 크크크.”
“미친 놈.”
어쩐지, 쓸데없는 얘기까지 다 꺼내고 있더라니, 이런 노림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콱.
당장 여섯 번째를 쥐어패고 싶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옆의 녀석을 처치하는 것이 먼저였다.
‘다시 봐도 크네.’
10M는 되어 보인다. 고개를 전부 펴도 녀석의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다.
“잡설이 길어졌네. 그러면, 죽어.”
“구어어어!”
순간, 거대 키메라가 거대한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몸집이 거대한 만큼, 아무래도 스피드 면에서는 다른 녀석들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구어어!”
인간의 수십 배나 되는 보폭과 거대한 몸무게, 거기에서 나오는 파워는 어마어마했다.
콰광!
녀석이 주먹을 한 번 휘두르자,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꺄아아악!”
이제는 완전히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층 이동! 층 이동!”
마을을 아예 탈출하는 사람까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석찬 일행은 이번 탈주는 막지 않았다. 아니, 막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
모두 재앙과도 같은 위엄을 내뿜고 있는 거대 키메라를 상대할 방법을 궁리하기 바빴다.
“아저씨, 저거 어케 할 겨?”
“글쎄… 어떻게 해보면 되지 않을까나….”
진현의 물음에, 그 천무진조차도 확답을 하지 못했다.
이브는 말없이 건물이 부서지며 일어난 화재를 제압했고, 엘리자베스도 빠져 있던 이전과는 다르게, 전투에 참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구어어!”
주먹에 묻은 건물 잔해를 털어내며 석찬을 향해 다시금 조준하는 거대 키메라. 가만히 있을 수 없던 석찬은 녀석의 다리를 공격해봤지만.
찡-
“크윽.”
어지간한 마력으로는 녀석의 내구도에 금 하나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석찬이 다시금 거리를 벌렸다.
“구어어.”
쿵- 쿵-
녀석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흔들리고, 이미 반파된 건물들이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단 마을 밖으로 나가야겠어.’
여기서 싸워봤자, 마을이 부서지는 속도를 가속할 뿐이었기에, 석찬은 일행에게 신호한 뒤, 가장 가까운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구어어!”
끈질기게 석찬만을 쫓아오는 거대 키메라. 성벽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거인을 보자마자 도망치기 바빴다.
‘훗!’
아슬아슬하게 거대 키메라의 추격을 회피한 석찬이 성벽을 넘어 마을 밖으로 몸을 던졌다.
쿠구궁!
이어서 성벽을 부수며 석찬을 향해 돌진하는 거대 키메라.
“끈질기네, 녀석.”
무너진 성벽에서 더 멀리 벗어난 석찬이 걸음을 멈추었다.
“구어?”
거대 키메라도 궁금했는지, 같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봤다.
“흠?”
거대 키메라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던 여섯 번째가 의문을 내비쳤다.
“왜 계속 도망가지 않는 거지? 설마, 너무 겁에 질려 도망치는 것도 까먹은 건가?”
이에 석찬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순간, 석찬의 몸에서 강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콰과광!
강마력 발현에 주변 땅이 타오르고, 갈라지기 시작했다.
“너… 그 힘은…”
그 기운은 여섯 번째조차 조금은 동요할 정도니. 석찬은 웃으며 말했다.
“이 힘을 마을 안에서 쓰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거든 여러모로. 그런데 네가 알아서 밖으로 와주니까, 고맙네.”
석찬의 눈에 거대 키메라의 몸 위로 밝은 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약점 파악으로 파악한 거대 키메라의 약점들이었다.
[뭔 놈의 약점이 저렇게 많대냐.]
‘저 정도면 적은 거 아니에요?’
[천무진이 녀석보다는 많잖냐.]
‘그건 그 사람이 적은 거고요.’
몸이 잘 단련된 천무진은 약점 파악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약점이 10개가 채 안 되었다.
[하긴 그 정도는 위쪽에서도 잘 안보이긴 하겠다.]
‘그런 사람이랑 비교하면 안 되죠.’
지금 육안으로 보이는 거대 키메라의 약점은 총 25개. 통상적으로 몬스터에게 약점이 50개 가량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절반이 채 안 되는 수였다.
게다가 몸도 거대했기에 약점과 약점 사이의 간격이 굉장히 넓었다.
‘조금 빡세겠는데?’
긴장한 석찬이 침을 삼켰고, 이에 라우르가 놀리듯 말했다.
[그래서, 안 써볼 거냐? 그거.]
‘그건 아니죠.’
석찬이 씩 웃으며 강마력을 두른 주먹을 들어올렸다.
“무슨 꿍꿍이냐?”
여섯 번째의 물음에 석찬은 알아서 찾아보라며 한 마디 한 뒤, 거대 키메라의 등 뒤로 이동했다.
‘우선 하나.’
석찬이 오른쪽 발 뒤꿈치를 세게 가격했다.
쿵!
묵직한 충격이 주먹을 통해 전해졌다.
‘큭, 엄청 단단하네.’
하지만 효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약점으로 된 부분인 만큼, 거대 키메라도 충격을 입은 듯 몸이 흔들렸다.
“칫, 공격해라!”
여섯 번째의 명령에 가만히 있던 거대 키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어어!”
녀석의 주먹이 석찬을 향해 내리꽂힌다. 그런데.
‘더 빨라?’
마을에서보다 두 배는 더 빠른 것 같은 거대 키메라의 주먹이 바닥을 갈랐다.
탁.
저 멀리 풀밭으로 이동한 석찬이 피부로 전해지는 따끔한 충격에 긴장했다.
‘확실해. 더 빠르고, 더 강력하다.’
“구어어어!”
울음소리도 한 층 더 우렁차다.
“힘을 숨긴 게 네 녀석뿐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크크.”
여섯 번째의 말에 한층 더 긴장감이 상승했다.
“가라. 내 새끼! 감히 우리 주인의 밑에 들어오는 영광을 거절한 저 녀석을 죽여라!”
“구어어!”
거대 키메라가 한층 더 강해진 스피드와 함께 석찬에게 돌격한다. 몸집 자체부터가 이미 재앙인 녀석이 스피드까지 갖추니 상대하기가 더욱 까다로워졌다.
쾅! 쾅!
공격을 피하긴 해도, 그 여파에 대미지를 입을 정도니, 말 다했다.
핏!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스피드가 더 빨라지기 시작했고, 이에 석찬의 몸에 상처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쳇.”
볼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석찬은 혀를 찼다.
‘이래서야…’
‘진화한’ 일점폭파술을 사용할 수가 없다.
쾅!
일반적인 일점폭파술을 사용해 보았지만, 대미지를 줄 수 있을지언정, ‘치명적인’ 대미지를 입히는 것은 불가능했다.
‘젠장.’
파괴를 사용하면 간단히 녀석을 처리할 수 있겠지만, 파괴를 사용하려면 신력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었고, 그럴 시간을 여섯 번째가 허락할 리가 없었다.
쾅! 쾅!
그때 잡념에 빠져 있느라 못 본 거대 키메라의 주먹이 석찬을 향해 날아왔다.
‘이건… 못 피해!’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석찬이 모든 마력을 방어에 집중하며 타격 부위에 가드를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콰앙!
거대한 충격과 함께, 석찬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쾅, 쾅, 쾅, 쾅!
나무를 몇 개나 뚫은 석찬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추락했다.
“컥!”
방어에 전념했음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이었다.
‘서리 거인 갑옷이었으면….’
새로운 레전더리 방어구 세트가 아니었다면, HP가 0이 됐을 것이 분명했다.
[괜찮냐? 일어날 수 있겠어?]
‘아직 괜찮아요.’
거대 키메라가 보이지 않는 동안 빨리 회복을 해야했다.
우우웅-
연속해서 회복 마법을 퍼붓는 와중, 거대 키메라의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듣기만 해도 노이로제가 걸릴 것만 같은 발소리에, 석찬이 긴장하며 이어질 전투를 준비했다.
하지만.
“어?”
잠시 후 나타난 예상 외의 인물에, 석찬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탓.
석찬 앞에 가뿐히 착지한 장발의 미남자, 천무진이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거대한 키메라… 강한 녀석이더군.”
“강하지… 근데 네가 왜 여깄어?”
“왜 있냐니, 당연한 걸 묻는군.”
천무진이 이마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난 네 녀석의 동료다. 동료가 죽는 걸 지켜볼 수는 없지.”
“맞아요.”
어느새 다가온 이브가 석찬을 향해 치료 마법을 부어주었다.
‘이건….’
석찬이 다룰 줄 아는 초보 치료 마법이 아닌, ‘진짜’ 치료 마법이었다.
“왜 다 혼자 싸우려고 하는 거예요?”
“옳소, 옳소. 우리를 잊으면 안 되지.”
진현이 새로운 장비를 장착한 채, 나무 너머로 얼굴을 드러낸 거대 키메라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다 같이 잡아보자고.”
그 말에 석찬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번에는 같이.”
“구어어!”
“저 빌어먹을 녀석을 잡아보자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