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눈 덮인 40층 마을에서 떠난 지도 일 년이 흘렀다.
“쿠루룩….”
49층의 히든 보스 몬스터를 막 해치운 석찬은 땀을 닦으며 거대한 시체를 바라보았다.
‘이번엔 조금 빡셌어.’
49층의 히든 보스 몬스터의 이름은 드레이크 킹.
전체적인 외형은 드래곤과 비슷하지만, 신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마법적인 능력도 드래곤에 비하면 굉장히 모자랐다.
그럼에도, 강마력과 부분 강신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냥하기 조금 버거운 감이 있었으니, 석찬은 다시금 수련의 중요성을 상기했다.
‘아직도 약해.’
남들이 들었으면 기겁할 이야기다.
50층에 입성하기 전, 49층에 도달한 인간들의 강함을 시험하는 존재가 바로 드레이크이다.
일반적인 드레이크만 해도 질긴 외피, 강력한 마법 공격, 그리고 자유로운 비행으로 파티를 맺어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들이었다.
드레이크 10마리를 잡는 데만 반년에서 일 년이 넘게 허비하는 사람들도 있는 마당에 석찬 일행은 드레이크의 상위 개체인 드레이크 킹을 단 세 명에서 잡았다. 그것도 전력의 상당 부분을 봉인하고 말이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 강함에 질투를 넘어 경외를 느낄 수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석찬은 이를 알지 못했다.
“엄청 크네요. 해체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조금 쉬고 할까요?”
“아니야, 미리 해두자. 진현인 거기 잡고. 이브는 저기 좀 고정해줘.”
드레이크 킹의 외피는 굉장히 질기고 단단했기에, 어지간한 칼은 해체를 돕기는커녕 방해만 될 뿐이었다.
푹.
칼 대신 손에 마력을 잔뜩 덧씌운 석찬은 외피부터 시작해 날개, 머리, 가슴 등 모든 부위를 적절하게 해체해서 아공간 주머니에 보관해 두었다.
“이참에 알렉산더 씨에게 선물이라도 하나 보내드릴까.”
해체된 사체를 팔면 무지막지한 돈을 벌겠지만,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 데다 나중에 장비로 만들려고 모아둔 재료를 제외하고도 귀중 부위가 상당히 남았다.
“뭐, 원하신다면요.”
“뭐 드릴 건데?”
“눈 어때? 드레이크 눈이 건강에 좋다고 하지 않았어?”
“네.”
“오, 사부도 좋아하시겠네.”
“오케이. 그럼, 1층 한번 들르자. 층 이동, 1층.”
시스템을 이용해 1층으로 이동하려는 석찬의 모습에 이브가 당황했다.
“지금 가요?”
“그럼 지금 가지, 언제 가. 먼저 갈게, 내려와!”
“뭐, 네… 가버렸네. 하, 저희도 가요.”
“옙. 1층 드가자!”
빠른 결정과 함께 진현과 이브는 영주성 앞에 도착했다.
거의 반년 만에 도착하는 영주성은 역시나 평소와 같았다.
“오, 아가씨. 돌아오셨습니까.”
어느샌가 나타난 찰스가 이브를 반겼다.
“집사 아저씨!”
“진현 군도 있었군요. 그런데….”
마찬가지로 진현도 환하게 반겨준 찰스는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을 찾았다.
“석찬 군은 어디 가셨나요?”
“어라… 먼저 내려간다고 했는데. 뭐지?”
“강석찬! 어딨어?”
아무리 불러 봐도, 석찬은 모습을 내비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뭐지?”
불안한 느낌이 들 때쯤.
팟.
“어? 먼저 왔네…?”
석찬이 귀환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와요? 우리보다 먼저 갔으면서.”
“그러게…나 말이다, 하하.”
석찬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으며 영주성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 계속 서 있어? 빨리 들어가서 인사드리자!”
“…….”
이브는 뭔가 있다고 느꼈지만 겨우 생각을 떨쳐냈다.
‘중요한 일이면 얘기해주시겠지.’
“같이 가요.”
“빨리 가자!”
“흠….”
찰스 또한 이상한 점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이내 석찬 일행을 따라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 * *
“와하하! 드레이크 킹의 눈? 진짜 나 주는 거냐?”
“물론이죠.”
“고맙다!”
드레이크 킹의 두 눈을 받은 알렉산더는 아이처럼 기뻐하며 석찬 일행을 껴안았다.
“아빠, 수염!”
“사부, 아파요!”
“사내 녀석이 뭐 이거 가지고 아프다고 그래! 하하! 어쨌든 오늘은 너희들의 49층 돌파 기념으로 파티다! 다 모여! 오늘은 일 하지 마! 너희도 와서 놀아!”
“주인님이 최고다!”
“아가씨, 감사합니다!”
“워후!”
메이드와 집사 들도 일제히 환호를 외치며 파티를 준비했다.
잠시 후, 성대한 만찬 자리가 마련되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놀고 먹기 시작했다.
“맛있구만!”
“한 잔 더!”
다른 사람들이 즐겁게 먹고 마실 때 한 사람만은 그러지 못했다.
“…….”
석찬은 사람이 없는 구석에서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조금 전 1층으로 이동 중에 일어났던 일을 떠올렸다.
* * *
“여긴….”
몇 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특별 상점에 입장했을 때 왔던 방과 비슷한 어둑어둑하고 칙칙한 방이었다.
‘라우르, 들려요?’
[그래.]
다행히 라우르와의 연결은 끊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익숙하면서도, 또 보고싶지는 않은 남자가 석찬을 향해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석찬 님.”
“당신은….”
두 번의 만남 때와 같이 모든 색을 검정으로 통일한 복장의 안내자 G가 석찬 앞에 나타났다.
[뭐냐 쟨, 안내자냐?]
‘예.’
저번 만남들에서 라우르는 두 차례 다 다른 장소에 있었기에 G를 본 적이 없었다.
[강하네.]
‘라우르가 인정할 정도로요?’
[그래. 저 녀석. 저 정도 힘이면 100층은 가볍게 통과하겠는데?]
‘뭐라고요?’
다소 충격적인 말에 석찬의 눈이 좁혀졌다.
[저 정도면 웬만한 천사들보다 강할….]
“거기 귀신 분은 조금 조용히 해주시겠습니까?”
“??”
[???]
“석찬 님 뒤에 붙어 있는 초록 눈 귀신님께 드리는 말씀 맞습니다.”
명백히 라우르를 겨냥한 말에 석찬과 라우르가 동시에 침을 삼켰다. 라우르의 존재를 눈치챈 자는 알렉산더에 이어 G가 두 번째다.
포이그, 엘리자베스, 우베, 탈리야 등 그간 아무리 강한 존재들과 마주쳤어도, 아무도 라우르를 인지하지 못하던 것을 G는 단숨에 알아챘다.
게다가 알렉산더와는 다르게 라우르와 나누는 대화마저 들을 정도니.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슥-
석찬은 무의식적으로 가드를 올렸다.
“너무 그리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뒤쪽에 계신 분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존재에 대한 맹세라도 할까요?”
존재에 대한 맹세. 이를 어기면 말 그대로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탑 안에서 가장 안전한 서약 중 하나였다.
혹시 모르니 석찬은 G에게 존재에 대한 맹세를 부탁했다.
“뭐, 알겠습니다. 나 안내자 G는 강석찬의 주신, 전 투신 라우르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을 존재에 걸고 맹세한다.”
존재에 대한 맹세가 끝나자, 존재에 대한 맹세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의미의 붉은 빛이 G의 이마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나저나.
‘G. 라우르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
라우르가 투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니. G는 보면 볼수록 위험한 사람인 것 같았다. 애초에 사람도 아니긴 하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너무 알면 다쳐요. 그래도 너무 근심하진 마세요. 탑을 오르다면 언젠간 저에 대해서도, 그리고 석찬님이라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모든 것?”
“뒤에 분은 까먹으셨겠지만 말이죠. 하하!”
[저 개자식이?]
“아무튼 걱정 마세요. 당신이 라우르의 화신이 되었다는 점은 정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존재에 대한 맹세도 하지 않았습니까? 표정 풀고 다른 이야기를 해봅시다, 우리.”
유쾌한 G의 모습에 석찬은 의심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차분히 궁금한 것에 대해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여긴 어딥니까.”
“뭐, 당신 같은 ‘이레귤러’들을 만날 때 사용하는 비밀 공간입니다. 이게 정말 편해요. 다른 놈들 눈에 보이지 않고 오로지 진실된 마음으로 이레귤러와 대화할 수 있는…”
“잡설은 그만하고, 저를 부른 이유가 뭡니까.”
“…성격이 급하시군요. 뭐, 나쁘진 않네요. 제가 당신을 부른 이유는 바로 다음 시험 때문입니다.”
“다음 시험…? 설마 50층의 시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석찬의 질문에 G가 제법이라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50층의 시험에 대해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 하긴. 자세히는 말하지 못해도 알렉산더나 라우르께서 언질 정도는 줬을 수 있겠군요.”
“뭐… 그렇죠.”
“그래서 이번 50층의 시험 말입니다. 아무리 석찬 님이더라도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진지한 G의 얼굴에 석찬 또한 조금 긴장한 채 G의 말을 들었다.
“조심해야 한다니… 도대체 뭐가 어떻길래.”
“제가 자세한 걸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번 시험. 당신은 남들보다 유독 더 힘들고 고된 길을 걷게 될 겁니다. 이전에 겪으셨던 것처럼 천사들의 수작질이 들어온다는 말이지요.”
꿀꺽.
거듭되는 안내자의 경고에 침이 넘어갔다.
“하지만 전, 석찬 님이 시험에 통과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실로 대단한 인간이니까요.”
“…….”
G는 품에서 시계를 꺼내며 말을 이었다.
“슬슬… 시간이 다 된 것 같네요. 너무 오래 있으면 다른 녀석들이 의심할 수도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네요. 다른 분들도 기다리시는 것 같고.”
다른 분. 분명 이브와 진현을 가리키는 말이리라.
“네. 뭐가 되었든, 정보를 주신 점에 대해서는 감사드립니다.”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건 모두 제가 원해서 하는 행동이니.”
“그나저나 저번에도 물은 거지만, 저를 도와주시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뒤를 돈 채 서 있던 G가 고개를 슥 돌리며 말했다.
“말했지 않습니까. 당신 같은 인간들이 참으로 불쌍하다고요. 다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럼 이만. 시험 열심히 준비하시길.”
씩 웃으며, G는 그렇게 사라졌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석찬은 G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며 찬물만 들이켰다.
‘G, 정체가 뭘까요.’
[일단 날 알아본 거면 절대 평범한 안내자는 아니야. 그리고 아까 그 공간. 어중간한 녀석은 진입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뭐야, 그 새끼 진짜.]
“후… 복잡하네.”
여러 의미가 담긴 한숨과 함께, 밤은 흘러갔다.
* * *
“…….”
고뇌하는 석찬을 바라보며, G는 의미심장한 표현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흥분해서 조금 많은 사실을 알려드린 모양이군요.”
G가 입고 있던 옷을 풀어헤쳤다. 그의 등 뒤에 남은 8개의 흉터 자국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무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상처를 바라보며, G의 얼굴에 여러가지 감정이 비쳤다.
옷을 다시 챙겨 입은 G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잘 확인한 뒤 수정구 속 석찬을 향해 작게 읊조렸다.
“저는 언제나 당신의 편입니다, 석찬 님.”
당신은 이 썩어 빠진 탑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쥐고 있는 인간이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