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나름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는 듯, 40층 마을은 평소와 같았다.
사람은 여전히 없었고 거주민은 하루 일과 중 하나인 쌓인 눈을 치우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석찬 일행이 지나갈 때마다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저거 봐봐.”
“마력 구속구? 설마….”
‘아.’
사람들의 속삼임에 석찬은 그제야 마력 구속구가 ‘노예’를 나타내는 상징 중 하나인 것을 떠올렸다.
“가릴 옷이라도 하나 사자.”
지금 탈리야의 옷은 키메라 제작자인 훈타에게 납치당했을 때 상태였다. 격렬한 전투로 찢어지고 더럽혀진 옷도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난 상관없다. 그냥 가자.”
옷에 대한 자각이 별로 없고, 드래곤이라는 종족의 특성상 추위나 더위를 전혀 타지 않기에 탈리야는 사람의 시선을 무시하며 여관으로 향하려고 했다.
하지만 탈리야를 제외한 석찬 일행에게는 사람들의 시선이 확실히 부담스러웠다.
“내가 상관있어서 그래. 빨리 옷 사러 가자.”
석찬은 아는 가게들 중 가장 괜찮았던 곳으로 향했다.
“아이구 손님! 또 오셨습니까!”
석찬이 40층 마을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방문했던 가게였다.
이 가게가 모든 집을 통틀어 옷의 질이 가장 좋았고, 사장님 또한 친절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어라, 그 아이는?”
사장은 탈리야를 보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사정이 있어서 말입니다. 잠시 제가 맡고 있습니다.”
“뭐, 손님 사정을 물을 수는 없으니 말이죠. 그나저나 이 아이, 굉장하군요.”
사장은 탈리야의 몸 이곳저곳을 살펴본 뒤 감탄을 내비쳤다.
“완벽한 원석이에요! 이런 원석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직접 옷을 골라줘도 되겠습니까?”
“뭐,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손님?”
손을 싹싹 비비며 웃음을 지어 보이는 사장을, 탈리야는 부담스럽게 쳐다보면서 석찬에게 어떻게 해보라는 무언의 압박을 넣었다.
하지만 석찬은 고개를 저으며 사장에게 탈리야를 보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손 떼라!”
“아이고! 치수를 재는 것뿐입니다요!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조금 소란스러운 일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잠시 후 나타난 탈리야의 모습은 굉장했다.
머리, 눈색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는 푸른색 드레스는 마치 <겨X왕국>에 나오는 ‘X사’의 드레스를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드레스 위에 걸쳐진 하얀색 코트도 은빛이 은은하게 도는 것이 딱 봐도 고급이었다.
또한 팔목에 채워진 마력 구속구도 흰 털뭉치 같은 걸로 가려둔 것이 사장의 센스를 증명했다.
“괜찮…나?”
‘괜찮냐고?’
괜찮은 정도가 아니었다.
“개쩝니다.”
진현이 멍한 눈으로 쌍따봉을 날렸다.
“너무 이쁘다!”
이브도 두 눈을 밝히며 탈리야의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오랜만에 힘 좀 썼습죠! 하하!”
만족스러운 반응에 사장이 뿌듯해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최고네요. 얼마인가요. 다 사겠습니다.”
“돈은 무슨, 됐습니다. 저런 원석을 다루게 해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닙니다. 지불하겠습니다.”
“아유, 괜찮습니다. 손님이 저번에 많이 팔아주신 덕분에 여유 자금도 꽤 있습니다요!”
계속되는 사장의 거절에 결국 석찬은 무료로 옷을 받은 채 밖을 나섰다.
“우와아…”
옷만 갈아입은 것뿐인데, 사람들의 시선은 이전과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예쁘다….”
“옷 대박, 얼굴도 대박.”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여관에 도착한 석찬 일행은 그제야 한숨 돌렸다.
“와. 힘들다.”
“그러게요.”
“세 분 다, 수고하셨어요.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탈리야의 납치 사실을 알고 있던 에리카가 네 사람 분의 음료를 준비해 가져다 주었다.
“고마워요.”
“탈~리야! 안 무서웠어?”
아직 탈리야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에리카는 탈리야의 몸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면서도, 그녀를 마치 조카처럼 대해주었다.
“나는 괜찮다. 떨어져라.”
“힝, 너무해. 나 진짜 걱정 많이 했단 말이야.”
“걱정은 고맙다. 근데 난 괜찮다.”
“그래, 괜찮으면 다행이고. 먹고 싶은 거 말해. 아빠가 다 해준대!”
“그래? 그렇다면… 이거랑, 요거랑….”
탈리야는 전에 먹어본 음식들 중 괜찮았던 것들을 몇 개 주문했고, 열 개 정도의 음식을 주문받은 에리카는 오케이 사인과 함께 주방으로 사라졌다.
“후아.”
또 한번 한숨 돌린 석찬 일행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음료를 들이켰다.
‘꽤 많은 일이 있었네.’
다시 생각해보니 훈타와의 싸움은 꽤나 큰 사건이었다. 사람을 재료로 사용한 키메라 제작자와의 전투. 만약 이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면 그 파란이 장난 아닐 것은 지나가던 어린 아이도 안다.
하지만 싸운 공간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탓에 진실을 알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 아쉽긴 하네.’
그래도 탈리야의 구출이라는 목적은 달성했기에 후회는 없었다.
‘그나저나….’
훈타의 말에서 이상한 것들이 몇 있었다.
‘일곱 번째, 그리고 위쪽.’
분명 자신이 일곱 번째 키메라 제작자라고 소개했던 훈타. 그 말인즉슨 키메라 제작자가 최소 여섯 명은 더 있다는 말.
‘말 그대로 최소지, 더 있을 수도 있는 거고.’
게다가 위쪽이라는 말로 유추해 보건데 상층의 개입 또한 있는 모양이다.
‘뭔가 복잡한 일에 휘말린 느낌이….’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주문하신 음식! 나왔습니다, 손님!”
유쾌한 에리카의 목소리와 함께 주문한 음식들이 상 앞에 펼쳐졌다.
“거, 마흔이나 먹고 칠칠맞지 못하게 말투가 그게 뭡니까, 누님.”
“닥쳐라, 김진현. 죽고 싶은 게냐. 넌 먹지 마라.”
“싫은 뎁쇼. 야무지게 먹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는 진현도 나이가 서른을 넘었으면서 유치한 말투로 에리카를 놀려댔다.
“표정이 심각하던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예요?”
걱정 어린 이브의 물음에 석찬이 표정을 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일단 먹자. 식으면 맛없어.”
“오케이, 먹어보자고!”
“넌 먹지 말라니까, 김진현!”
“음! 맛있다!”
“오랜만에 파티인가!”
어느새 다가온 후레이와 레아도 술통을 꺼내 들며 자리에 합석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석찬은 근심을 덜며 지금의 행복을 잔뜩 만끽했다.
* * *
한 달이 흘렀다. 그동안 적지 않은 일이 있었다. 우선 40층의 경제가 되살아났다. 그 중심에는 아이러니하게도 40층 경제를 완전히 무너뜨렸던 탈리야가 있었다.
“여기야? 그 엄청나게 예쁜 여자애가 있다는 곳이?”
납치 사건이 있은 후, 엄청난 미모로 소문난 탈리야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에리카의 저녁’으로 찾아왔다.
“진짜다.”
“엄청 예뻐.”
탈리야가 볼 일이 있어 1층에 내려올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를 내지르며 그녀를 연호했다.
‘불편해.’
한편으로 자신을 연호하는 사람들을 보며, 과거 마을 사람을 도왔을 때 행복했던 기억이 조금은 되살아났기에, 싫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40층의 한 여관에 절세미인이 머물고 있다는 소식이 퍼졌고, 상층의 사람들도 절세미인을 구경하기 위해 일부러 40층 마을로 내려오는 일까지 생겼다.
그러는 와중 마을도 조금씩 재평가를 받으면서 경제가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뛰어난 음식 맛과 미녀 종업원으로 유명해진 에리카의 저녁은 40층에 왔으면 필수적으로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되어 있었다.
“와하하! 손님이 풍년일세!”
마찬가지로 탈리야의 미모를 더욱 빛나게 해주었던 옷 가게, ‘구아즈아’ 또한 40층의 명품 브랜드가 되어 사장은 그토록 원하던 막대한 양의 돈을 벌 수 있었다.
그 외로도 여러 가게들이 부흥하기 시작했고, 40층의 눈이 좋아 이주하는 사람들까지 생겼다. 이 모든 것이 한 달 만에 일어났으니, 정말 굉장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한 달 동안 방에 틀어박혀 수련에 매진하던 석찬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네.”
41층으로 가기 위한 조건은 이미 만족한 상태. 게다가 수련으로 할 수 있는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 남은 건 돌파뿐이었다.
‘돌파는 위에서 차근차근 하고… 슬슬 작별 인사를 해둬야겠어.’
석찬 일행의 특성상 한 번 탑을 오르면 멈추지 않고 몇 층 정도 쭉 오르는 터라, 이번에 헤어지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이들과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결정을 내린 석찬이 그날 저녁, 영업이 종료된 후 가진 식사 자리에서 에리카 일가에 작별 인사를 건넸다.
“곧 떠날 것 같습니다.”
“떠나다니, 위로?”
“예.”
“그래, 뭐. 떠나는 건 자네 마음이지.”
후레이는 아쉬운 모습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석찬의 결정을 응원했다.
“위로 가면 갈수록 어려울 거야. 하지만 난 자네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물론 난 50층에서 좌절하고 꺾였지만, 자네는 거기서 멈출 그릇이 아니잖아?”
“맞죠. 전 반드시 100층까지 오를 겁니다.”
“100층이라. 자네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어. 난 언제나 자네를 응원하네.”
“감사합니다.”
후레이는 진현과 이브에게도 진심을 담아 조언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무슨, 늙은이의 주정이라 생각해도 된다네. 하하!”
그 말을 끝으로 후레이는 술에 잔뜩 취해 아내에게 붙들려 어두운 복도 속으로 사라졌다. 에리카도 내일 영업을 준비해야 된다며 자러 갔다.
많고 많던 사람들 중에 네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석찬이 탈리야에게 질문을 던졌다.
“탈리야는 어떻게 할 거야?”
“나? 글쎄다. 마음 같아서는 따라가고 싶은데. 여기 있을 수밖에 없는 몸이라서 말이다.”
드래곤은 균형 때문에 타 층으로 이동할 수 없는 제약이 붙어 있다. 게다가 마력이 봉인된 현 시점에서 층 이동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한동안은 이 여관에 계속 신세질 생각이다. 물론 돈도 지불할 거고.”
드래곤 레어에서 보물을 조금 챙겨온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탈리야는 앞으로 몇 년간 돈이 없어서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뭐, 내가 예전에 저지른 일도 있어서 말이지. 마을 인간들에게 미안해서 못 떠나겠는 것도 있다.”
[와, 대박. 미안하댄다.]
드래곤의 입에서 좀처럼 나오기 힘든 말에 라우르가 연신 놀라움을 나타냈다.
[아직 애기는 애기인가 보다. 저런 말 하는 거 보면. 고룡 새끼들은 곧 죽어도 절대 안 할 말을….]
“그래도 하나 약속해주길 바란다, 석찬.”
“뭔데?”
“이거.”
탈리야가 마력 구속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으니 이건 꼭 풀어줬으면 좋겠어.”
“물론이지.”
“그래, 그럼 됐어. 언제 출발할 거냐?”
“내일 바로?”
“빨리 가네. 잘 가라. 난 가서 잔다.”
“그래….”
계단 위로 올라가는 탈리야의 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다음 날, 예정대로 석찬은 41층으로 올랐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