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아침이 밝았다.
“으어….”
“일하기 싫다….”
간밤에 성대한 파티를 마친 사람들은 술로 몽롱해진 정신을 겨우 다잡으며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
이브 또한 어제 무리했는지 평소에는 보지 못할자연스러운 상태로 석찬을 맞이했다.
“잘 잤어?”
“머리가 조금 아픈데, 괜찮아요. 오빠는요?”
“나는 많이 안 마셔서 괜찮았어. 그런데, 진현이는 어디 갔어? 어제도 중간에 없어진 거 같은데.”
“그러게요.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확인을 못 했네요. 아마 자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가?”
“그보다 아무래도 저는 조금 더 자야겠어요….”
“힘들면… 그렇게 해.”
“조금 있다 봐요…”
이브는 반쯤 감긴 눈으로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침을 먹기에는 꽤나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석찬은 방에서 명상을 조금 하다가 점심시간에 맞춰 식사 장소로 향했다.
“왔냐.”
“왔어?”
이미 식사를 하고 있던 진현과 알렉산더가 석찬을 맞아주었다.
“둘 다, 생각 외로 멀쩡하네요. 이브는 죽어가던데.”
“그 아이가 술만 조금 강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말이야. 지금 자고 있나?”
“아까 자러 간다고 하고 안 온 거 보면, 그런 거 같네요.”
“에잉.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으려고 했는데.”
알렉산더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저으며 고기를 한 점 입에 집어 넣었다. 진현 옆에 앉은 석찬도 식사를 시작했다. 세 사람이 전부 식사를 끝마쳤을 때쯤, 알렉산더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50층 시험에는 언제 도전할 거냐?”
“아, 그거 말이죠.”
석찬은 G와의 대화 이후 정리한 생각을 그대로 이야기했다.
“원래는 그냥 바로 치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어느 정도 준비는 하고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조금 불안한 부분이 있어서.”
“뭐, 어차피 바로 치르려고 했어도 못 했을 거야.”
“응? 왜요?”
“그게 말이다.”
알렉산더 말에 의하면 50층 시험은 대한민국의 고시 시험처럼 일 년에 한 번밖에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제 육 개월 정도 남았군.”
“육 개월이라… 조금… 불안하네요.”
“불안해? 불안할 게 뭐가 있어. 네 녀석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역대 최강의 시험 응시자일 텐데.”
“하하….”
하지만 G의 경고를 들은 이상, 이를 마냥 웃어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뭐, 네 생각이 정녕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이참에 여기서 수련 좀 하면서 지내라.”
“저야 괜찮은데, 진현아. 넌 어때?”
“나도 괜찮아.”
“진현이는 어제 이야기가 끝났다. 다음 시험을 시작하기 전까지 수련하고 싶다더라.”
“그래요?”
어제 어디론가 사라지더라니, 미리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그래, 어제 진현이에게도 조금 말하긴 했지만, 너에게도 말해야겠구나.”
“뭐를요?”
“50층의 시험에 대해서 말이다.”
그 말에 석찬이 알렉산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50층 시험에 대한 이야기라니…’
[말할 수 있나? 말해도 못 들을 텐데.]
‘조용히 해봐요.’
짧은 기다림 끝에, 알렉산더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식사 시간이 끝난 뒤, 석찬은 방으로 돌아와 주저앉았다.
“하아…”
알렉산더에게 들은 이야기는 G에게 들은 이야기와 비슷했다. 강할수록 어려울 수 있는 시험이다.
조금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나나 진현이처럼 잠재력이 높을수록 어려울 수 있다 했어.’
도대체 어떤 시험이길래 두 강자가 이렇게 한 입을 모아 주의를 주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모르겠다. 수련이나 해야겠다.”
[그래, 그게 맞다. 수련하다 보면 잡생각도 다 날아갈 거다.]
“예.”
[이렇게 된거 새로운 기술도 알려주마.]
새로운 기술이라는 말에 석찬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진짜요?”
라우르의 새로운 기술이라니. 전에 ‘파괴’라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지만, 극악의 난이도와 숙련도 부족으로 실전에서 사용을 봉인당해, 사실상 쓸모가 없는 기술이었다.
[이번에 가르쳐줄 기술은 말이다… ‘일점폭파술’이라는 것이다.]
일점폭파술.
이름만 들어도 무슨 기술일지 조금은 예상이 갔다.
‘마력 폭발이랑 비슷한 건가요?’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일점폭파술’과 ‘마력 폭발’은 차원이 다르다는 걸 알아둬라.]
‘정확히 어떻게 다른데요?’
[일단 위력이지. 마력 폭발 한번 써볼 수 있어?]
그 말에 석찬이 당황하며 말했다.
‘방에서요?’
[방에서 하면… 부서질 테니. 조용한 데로 가자.]
‘예.’
그렇게 석찬과 라우르가 찾아온 곳은 고블린 킹의 궁전 앞이었다.
[또 여기냐.]
“사람도 없고, 마을이랑 멀어서 좋잖아요? 피해줄 일 없고.”
[좋아, 그럼 한번 마력 폭발을 써보거라.]
“옙.”
석찬의 주먹에 마력이 압축되기 시작했다.
‘적당히 모은 마력을, 한순간에….’
콰직!
주먹을 내지르며, 거대한 폭발이 눈앞에 있던 나무를 완전히 부숴버렸다.
[자, 이번에는 내가 알려준 대로 한번 해보거라. 일단….]
라우르는 천천히 일점폭파술의 묘리를 전수해 주었다.
두 시간 후, 이론을 깨달은 석찬이 일점폭파술을 사용해 보았다.
‘우선… 상대의 약점을 파악한다.’
원래 석찬은 인간의 약점은 지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급소나 혈맥이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라우르가 한 말은 달랐다.
[네 말대로 급소와 혈맥도 약점의 하나가 될 수 있어. 하지만 웬만한 강자들은 급소와 혈맥에 대한 보호가 항상 철저하게 되어 있지. 그러니 우리는 또 다른 급소를 노려야 한다.]
그 또 다른 급소란 바로 마력 회로였다. 사람들은 탑에 들어오고 바로 마력을 부여받는다.
마력이 부여되면 마력 회로 또한 자동적으로 생성된다고 한다.
[스킬이라고 해도 본질은 마력을 이용하는 것. 마력 운용자든 비운용자든 모두 마력 회로는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사람이 아닌 몬스터나 비생명체에게도 해당된다.
[마력은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힘. 집중하면 모든 것에서 마력 회로를 느낄 수 있어.]
눈앞의 나무에 집중하자, 희미한 실 같은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것이 나무의 마력 회로?’
워낙 희미해 보일락 말락 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거다.’
[그래, 그것이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나처럼 마력의 흐름도 두 눈으로 또렷이 볼 수 있을 거다.]
부분 강신으로 체험해 보았던 라우르의 눈. 그 신세계란 말도 못 할 정도로 엄청났고, 신비스러웠다.
그것을 자력으로 할 수 있다니. 가슴이 두근두근두했다.
[자, 다시 집중. 이제 뭘 하라고 했지?]
‘마력 회로 중에 가장 얇고 빈약한 급소를 찾는다.’
[그래. 어렵겠지만, 한번 해봐라.]
마력 회로 전체가 희미하게 보여 그중에서 더 희미한 실을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석찬은 남다른 재능과 집중으로 나무의 가장 약한 부분을 포착했다.
‘이곳이다!’
파악한 곳을 향해 석찬이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대량의 마력을 나무의 약점 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득-
상당량의 마력이 침투되자, 나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나무 속에 밀어 넣은 마력을 해방하자, 당연하게도 나무가 폭발했다.
콰앙!
확실히 위력으로나 규모로나 마력 폭발에 비해 몇 배는 거대하고 화려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파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숲 한 부분이 쑥대밭이 된 가운데, 석찬은 짧게 감탄을 내비쳤다.
“이거 완전 파괴 같은데요?”
[무슨 소리야, 파괴가 훨씬 위지. 파괴랑 다르게 이거는 내 추종자들도 곧잘 썼으니까.]
파괴에 비하면 쉽고 강력한 기술이지만, 단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우선, 확정적으로 존재를 소멸하는 ‘파괴’와는 다르게 압도적인 강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또한, 불어넣는 마력에 추가 위력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상대방의 몸에 직접 손을 갖다 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약점을 이용하는 기술이기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치명타를 입힐 수 있다는 점이 또 좋았다.
[물론 지금은 마력 폭발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어. 마력도 많이 들고 약점 파악의 원리도 복잡하니까. 하지만, 네가 이 기술을 완벽하게 익힌다면, 마력 폭발 따윈 눈에도 들어오지 않을 거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지금은 시전까지 꽤 시간이 걸려서 충분한 연습을 들여야 할 것 같았다.
‘우선 약점을 파악하는 능력을 길러야 해.’
일점폭파술을 사용할 때뿐만 아니라, 싸움에서 약점 파악 능력을 유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으면 굉장한 도움이 될 것이다.
‘50층 시험을 보러 가기 전에… 일점폭파도 그거지만, 최소한 마력 회로를 빠르게 감지할 수 있도록 수련해야겠어.’
목표를 정한 석찬의 의지가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 시각, 영주성.
알렉산더는 오랜만에 지하 대련장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진현이 몸을 풀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어요?”
“그래.”
“조금은 무리한 부탁이었는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하나뿐인 제자 녀석 부탁인데 거절할 순 없지.”
어제 저녁, 진현은 알렉산더와 진중한 대화를 나눴다.
주된 내용은 하나였다.
‘강해지게 해주세요. 지금보다 더.’
그간의 싸움을 거치면서, 진현은 이전보다 더 강함에 집착하게 되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성장력과 전투 능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석찬. 그리고 알렉산더의 핏줄을 이어받고 마법면에서는 석찬은 물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함을 가지고 있는 이브.
그들과 같이 다니며 진현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봤다.
과연 나는 저들과 같이 다닐 능력이 있는 녀석일까?
사실 싸울 때마다 두 사람의 버스를 타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른 녀석들과 달리 나는 더 노력해야 한다.’
두 사람의 곁에 서기 위해서, 더 높은 곳을 올라가기 위해서, 종국에는 두 사람을 뛰어넘기 위해서.
진현의 눈에 담긴 집념과 욕망을 알아본 알렉산더는 흔쾌히 그의 요청을 수락했고, 오늘부터 과거 했던 지옥 훈련보다 더욱 지옥 같은 훈련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럼, 6개월 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부!”
“오냐, 안 봐줄 테니까. 각오해라.”
“예스!”
또한 이 불씨가 진현에게만 지펴진 것은 아니었다.
‘석찬 오빠와 계속 함께하려면, 더 노력해야 해.’
30층에서 우베와 붙었을 때, 자신의 역할은 석찬을 보조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우베의 강력함에 비하면 자신의 마법은 반딧불이에 불과했다.
게다가 40층에서 처음 석찬이 드래곤과 한 판 했다는 사실을 안 이브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그리고 석찬과 드래곤이 더블 K.O.를 했다고 했을 때는 놀라움보다는 두려움이 이브의 내면을 지배했다.
이대로라면 석찬 추가 저 멀리 가버릴 것 같다는 두려움, 또 무섭게 성장하며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진현을 보고 여긴 대단함이 이브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성장의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파랑 등급이 되었다고 놀고 있을 수는 없지.”
분명 언젠가는 따라잡힐 수준이다. 그렇다면 먼저 더 높은 곳에 올라가 기다리고 있겠다.
그렇게 다짐한 이브가 명상을 시작했다.
각자 다른 방법으로 강해지고 있는 가운데,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렇게, 반년이 흘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