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드래곤이 마을을 향해 날아온다.
‘잠깐만, 잠깐만. 대체 뭐야, 이거.’
드래곤의 마력을 느끼는 석찬의 얼굴이 점차 찡그려졌다.
느끼기만 해도 온몸이 떨리는 압도적인 질을 지닌 마력이었다. 초록 등급에 나름 익숙해진 자신은커녕 파랑 등급의 이브조차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았다.
하지만 마력의 질이 문제가 아니었다.
진정한 문제는 바로 마력의 총량에 있었다.
‘무슨 마력량이….’
바다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방대한 양의 마력에 석찬이 침을 삼켰다.
[야, 석찬아. 이거 뭔가….]
‘좆된 것 같은데요.’
무슨 이유로 마을을 향해 날아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날뛰는 마력을 보아 필시 좋은 이유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만약 녀석이 여기 도착한다면….’
후레이에게서 들은 비극이 반복될 수도 있다.
“왜? 혹시 내가 귀찮게 한 건가?”
“아닙니다…. 술기운 때문에 잠시 바람 좀 쐬다 오겠습니다.”
“그래, 그래. 난 정리하고 있을게.”
여관 밖을 나온 석찬은 드래곤이 다가오는 쪽을 노려봤다.
‘안 그래도 어려운 곳에 더 이상 피해를 끼칠 수는 없다.’
본래 자신이 싼 똥은 자신이 치워야 하는 법.
‘조용히 해결해야겠군.’
[설마. 드래곤이랑 혼자 만나게?]
‘예.’
라우르가 미쳤냐는 듯이 말했다.
[야, 아무리 드래곤이 몇십 살밖에 안 된다고 해도, 드래곤은 드래곤이야. 너도 들었잖아? 녀석은 층 전체에 저주를 뿌릴 수 있어. 너랑 급이 다르다고!]
‘만약 드래곤이 정말 화난 거라면,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싸우는 건 더 불리해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대화로 녀석을 회유할 수 있을지.’
[미친놈. 드래곤이 대화가 통하는 상대 같냐?]
‘뭐라도 해봐야죠.’
[하, 그래. 너 알아서 해라. 대신, 이거 하나만 알아둬라.]
‘뭔가요?’
[만약 전투가 일어나고 너에게 위험한 순간이 찾아온다면, 난 망설임 없이 강신을 사용할 거다.]
강신.
투신 라우르가 직접 화신 강석찬의 몸에 빙의하는, 과거 알렉산더와의 싸움에서 한 번 발동했던 최종 비기.
물론 발동 직후 페널티가 장난 아니지만, 석찬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전적으로 당신에게 맡기죠.’
[그래, 알겠으면 가자. 이러다 녀석이 마을까지 들어오겠다.]
‘그러게요. 서두르죠.’
마을 입구로 향한 석찬을 경비병이 막아섰다.
“지금은 밤인데 어딜 나가려고. 죽고 싶어?”
“급한 일입니다.”
석찬은 허리춤에 달려 있는 명패를 떼어 경비병에게 던져준 뒤, 마을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이, 어이! 뭐야?”
의아한 표정으로 손에 잡힌 명패를 확인한 경비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으음? 백금색?”
백금색 명패와 마을 밖을 한두 번 번갈아 본 경비병은 이내 사색이 되어 어딘가로 달려갔다.
* * *
석찬은 정말 오랜만에 전력을 다해 달렸다.
팍! 팍!
발걸음이 떨어질 때마다 눈이 폭발하며 주변으로 비산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드래곤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 곧이다….’
잠시 후, 드래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놈인가….’
탁!
공중으로 점프한 석찬과 드래곤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인간?”
하늘을 날 수 없었던 석찬은 이내 바닥으로 추락했고, 드래곤 또한 그를 향해 다가갔다.
“정말 인간이군.”
‘와우….’
가까이서 본 드래곤은 거대했다.
십 미터는 될 법한 길이에 기다란 꼬리, 제 몸뚱이보다 더 큰 날개는 보는 것만으로도 웅장함에 압도되었다.
게다가 푸른색의 몸뚱어리와 대조되는 새하얀 머리, 그리고 그 위에 난 검은 뿔은 고고한 용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인간이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알고 찾아온 거지?”
드래곤의 푸른 눈이 석찬을 째려봤다.
석찬은 우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강석찬이라고 합니다. 마력 감지에 거대한 무언가가 잡혀 호기심에 그만… 그게 드래곤님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호오, 그 말은 낮에 감히 이 몸을 훑고 간 마력이 네 녀석의 것이라는 건가?”
“예. 만약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고의는 없었습니다.”
석찬이 다시금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흠. 죄송하다라….”
드래곤의 말이 끊긴 와중, 석찬은 연신 침을 꼴깍 삼켰다.
‘제발….’
아무리 석찬이라도 드래곤을 상대하고 싶진 않았다.
잠시 후 드래곤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래 이 몸은 본인의 숙면을 방해한 놈을 찾아 ‘마을’이란 곳을 갈가리 찢어버릴 작정이었다. 허나 네 녀석이 이 몸 앞에 나타난 이상, 그럴 필요는 없겠구나.”
‘오우….’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일어날 뻔했다.
‘마을 밖에 나오기를 잘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녀석을 용서할 생각은 없다.”
드래곤의 푸른 눈이 짙게 빛난다.
“이 몸의 숙면을 방해한 죄, 죽음으로 갚아라.”
주변의 마력이 끓어올랐다.
“이런….”
[거봐. 내가 뭐랬냐?]
결국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석찬이 주먹을 쥐었다. 장비는 이미 채워진 상태였다.
“인간, 설마 나에게 반항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드래곤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그래, 반항하련다.”
“반항…하련다? 말이 짧구나, 인간.”
드래곤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내가 싸우겠다는 상대한테 존댓말 할 정도로 호구 같냐?”
어차피 대화는 물 건너갔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 싸움밖에 방법이 없다.
다행히 도발은 어느 정도 먹혀들었다. 분노한 드래곤이 말을 이었다.
“인간… 넌 또 하나의 죄를 지었다. 그 죄는 결코 가볍지 아니하니….”
‘지금이다!’
분노에 차 대사를 내뱉고 있는 지금이 기회다.
기습각을 잡은 석찬이 마력을 듬뿍 담은 주먹을 날렸다.
쾅!
석찬의 주먹이 무형의 무언가와 부딪쳤다.
쩌저적-
‘이건 설마….’
콰직!
“보호막인가… 쳇.”
바닥에 착지한 석찬이 입맛을 다셨다.
설마 보호막이 있었을 줄이야. 예상 밖이었다. 게다가.
“기습이라니 하찮군, 인간.”
더욱 분노한 드래곤의 몸 주변에서 마력이 피어올랐다.
마력의 선명도를 보니 화가 많이 난 듯하였다.
‘젠장.’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어디 한번, 받아보거라. 인간.”
드래곤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쿠오오-
그러자 마력이 한 점으로 집중되더니 하나의 구를 이루었다.
‘저건… 위험해!’
[피해! 빨리!]
석찬은 재빨리 왼편으로 몸을 날렸고.
쿠구궁!
곧 굉음과 함께 그가 있던 자리 위로 거대한 광선이 지나갔다.
‘이건….’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브레스인 건가?’
과연 엄청난 위력이었다.
일순간에 땅이 완전히 타버린 것은 물론, 주위의 눈도 전부 녹아 물까지 증발해 버렸다.
석찬이 헛웃음과 함께 말했다.
“엄청난데. 역시 드래곤의 비기야.”
하지만 드래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비기? 무슨 말이냐, 인간.”
“응?”
“설마, 방금 그걸 내 비기로 착각한 것인가? 그렇다면… 어리석다고 말해주고 싶군.”
순간 드래곤이 한층 더 강력해진 마력구를 생성해냈다.
“이런, 미친!”
[고개 숙여!]
콰과광!
더욱 강력한 위력의 마력이 석찬에게 쏘아졌다.
“우와악!”
머리 위로 뜨거운 마력의 광선이 스쳐 지나갔다.
그 열기가 어찌나 강한지 눈보라 추위가 금세 가시고 찜통 같은 더위가 느껴졌다.
“호오? 이번에는 정말 죽일 작정으로 쏘았건만 그것도 피하다니? 발 하나는 재빠르군.”
“하하….”
“하지만 그래봐야 재빠른 벌레에 불과하지.”
드래곤의 눈매가 더욱 매서워졌다.
‘이대로 공격만 당할 수는 없어.’
소모전으로 가면 무조건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잘 아는 석찬은 주먹을 고쳐 쥐었다.
‘보호막, 다시 생겼을 가능성이 클 거야. 그걸 뚫으면서 녀석의 공격을 피할 방법이….’
고민해 보았지만,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라우르가 입을 열었다.
[석찬아.]
‘예.’
[나한테 작전이 하나 있다.]
‘작전이요? 설마 강신?’
[아니, 그건 아직 때가 아니야. 솔직히 지금 말해주는 것도 너에게는 이르긴 하다만… 지금은 뭐 상황을 가릴 때가 아니라서 말이지. 우선 들어봐라.]
라우르가 무언가를 속삭였고, 석찬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니까 얘기하는 거 아니냐? 일단 한번 해보는 건 어떠냐.]
확실히 라우르가 설명한 작전이라면 드래곤에게 접근하는 것은 물론 제대로 된 공격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성공 확률이 몇 프로예요?’
[지금 네 몸 상태면 100%. 단 ‘한 부위’ 한정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네요. 당장 합시다.’
눈을 감은 석찬이 긴 숨을 내쉬었다.
“인간, 조금 전의 자신감은 어디 갔지?”
“…….”
“할 말이 없다면 그대로 죽어라.”
다시금 마력이 모여든다.
‘지금!’
퉁!
땅을 박차고 나간 석찬이 드래곤의 측면을 강타했다.
쾅!
그러자 보이지 않던 보호막이 깨지며 공격을 방어했다.
“거기냐, 이놈!”
콰아!
눈앞으로 쏘아지는 마력. 하지만 석찬의 표정은 여전히 평안했다.
번쩍.
눈을 뜨자, 원래의 검은 눈이 아닌 진한 녹안이 번뜩였다.
그리고….
후웅- 쾅!
마력 줄기를 흘려내며 드래곤의 허벅지를 강타하는 석찬의 주먹.
두두두!
개틀링 건처럼 이어지는 연타에 드래곤의 몸이 조금은 밀려났다.
“건방지군, 인간!”
드래곤의 앞발이 석찬을 향해 내려찍혔다.
핏!
하지만 석찬은 이번에도 공격을 흘러내며 드래곤의 거대한 몸뚱이에 연속해서 공격을 날려댔다.
“크흠….”
드래곤이 처음으로 표정을 찡그렸다.
“인간, 그 기이한 움직임. 그리고 그 눈은….?”
“어때? 이 정도면 조금은 상대할 맛이 나지 않아?”
“확실히… 그냥 죽을 것 같지는 않군.”
게다가 조금 전의 움직임. 앞서 두 번의 공격을 날렸을 때 가까스로 피한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여전히 종이 한 장 차이로 공격을 피하고 있지만, 이전처럼 우연에 불과하던 움직임과는 다르게 지금은 마치 공격을 한 수 앞에서 보고 있다는 듯, 한 박자 빠르게 피하며 공격은 공격대로 적중하고 있었다.
‘지금 몸으로는 쓸데없이 공격만 계속 허용해주겠어.’
“폴리모프.”
드래곤의 판단은 빨랐다.
점차 크기가 줄어든 드래곤의 몸이 마침내 인간 정도의 크기까지 줄어들었다.
“흠. 인간의 모습은 처음인데 나름 편하구나.”
짧은 하늘색 머리칼과 밝게 빛나는 푸른 눈, 그리고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조각 같은 미소년으로 여겼겠지만, 눈앞의 소년은 분명 드래곤이다.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돼.’
석찬의 녹안이 더욱 진하게 빛났다.
‘먼저 공격….’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핏!
눈앞의 드래곤이 사라지고.
‘뭐?’
촤악!
배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통증과 함께 석찬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