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흠. 인간의 모습은 처음인데 나름 편하구나.”
눈앞의 남자, 아니 드래곤이 오만한 투로 말했다.
‘먼저 공격….’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인간화한 드래곤의 속도는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푹!
눈을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석찬의 앞에 도달한 드래곤은 가볍게 석찬의 배를 찌르며 지나갔고.
촤아악-
붉은 피가 비산했다.
“커억….”
끔찍한 고통과 함께 석찬의 눈이 다시금 검게 돌아왔다.
‘무슨 일이….’
생각을 끝마칠 틈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
털썩.
힘없이 바닥에 엎어진 석찬. 그의 몸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왔다.
석찬 앞에 선 드래곤이 무신경한 표정으로 손날을 겨누었다. 손날이 조준하고 있는 곳은 바로 석찬의 심장. 그대로 심장을 찌르려던 드래곤이 순간 멈칫했다.
“흠… 잠시만….”
아직도 몸에 남아 있는 통증을 느끼며 드래곤이 고뇌했다.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드래곤인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 생각해보니 처음에도 자신을 먼저 찾아오지 아니했던가?
필시 예사 인간은 아니라는 것.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워.’
게다가 마지막 발악 때 보였던 기이한 모습.
‘궁금하군.’
오랜만에 용의 호기심이 내면을 자극했다. 결정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화아악-
다시 본래 모습으로 변한 드래곤이 석찬을 등에 둘러멘 뒤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드래곤은 순식간에 자신의 레어로 돌아갔고, 거칠게 부는 눈보라에 싸움의 흔적은 금방 지워졌다.
* * *
“헉!”
눈을 뜬 석찬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굴로 추정되는 곳에는 몬스터의 것으로 뼈가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었다.
‘여긴… 잠깐, 그보다.’
석찬은 무의식적으로 정신을 잃기 전 공격받았던 배를 짚어보았다.
‘어라…?’
어찌된 영문인지, 상처는커녕 매끌매끌한 새살만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여긴 또 어디고?’
주변을 탐색하려고 마력을 뿌리려는 순간.
“일어나셨습니까.”
“누구냐!”
갑자기 들린 말소리에 석찬이 주먹을 날렸다.
펑!
주먹에 맞은 무언가가 산산조각 나며 잔해물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해치웠나?’
그러나 잔해물은 다시 한 군데로 모여들더니 하나의 형상을 이뤘다.
“환영 인사가 다소 격하시군요.”
형상을 이룬 무언가는 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칠흑 같은 흑발에 붉은 적안. 날카로운 턱선과 오뚝한 코. 몸매 또한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온, 엄청난 미녀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헤벌레하며 방심했을 수도 있지만, 석찬은 경계를 놓지 않았다.
‘이런 곳에 사람이 있을 리가 없어.’
경계의 기색에 여인이 양손을 들었다.
“저에게는 당신을 해칠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주인님의 명령을 따를 뿐이죠.”
“주인님?”
“따라오시죠. 주인님께서 당신이 일어나면 곧장 데려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님이 도대체 누구… 저기… 잠깐만!”
여인은 석찬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젠장….”
이곳이 어딘지 알 도리가 없는 석찬은 결국 여인을 따라갔다.
몇 분 동안 동굴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끝에, 석찬은 한 문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긴….”
“들어가세요.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함정은 아니겠지?”
“주인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걱정 마시고 들어가시죠. 주인님은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으실 겁니다.”
“…….”
떨떠름하긴 했지만, 석찬에게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석찬은 무의식적으로 감탄을 내비쳤다.
“와아….”
방 안의 풍경은 엄청났다.
과거 엘도라도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황금으로 도배된 벽과 가구들. 한 쪽에는 진귀한 금속과 보석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다른 쪽에는 보구나 포션들이 갖춰져 있었다.
언뜻 봐도 알렉산더나 엘리자베스의 보물 창고보다 수배는 좋아 보였다. 그야말로 부의 끝판왕급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
그런 방 한가운데에는 황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옥좌가 있었고, 위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석찬도 잘 아는 남자였다.
차가운 인상을 주는 청발에 청안.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 그래, 드래곤이 인간형으로 폴리모프한 모습이 딱 저랬다.
“날 데려온 게 설마 당신인가? 드래곤.”
“그래.”
녀석의 푸른 동공이 세로로 찢어졌다.
확실히 드래곤이 맞다. 그 말은 여기가 드래곤 레어라는 뜻.
‘드래곤 레어라니.’
이미 들어와 있는데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더불어서… 네 녀석의 상처도 친히 치료해줬지. 고맙지 않나?”
“병 주고 약 준 꼴이면서 고맙긴 무슨.”
“인간… 아직도 시건방지구나.”
드래곤의 으르렁거림에 석찬이 배를 막으며 뒷걸음질 쳤다.
“말을 조심하도록 해라.”
“그래. 그래서 그런데.”
“뭐냐.”
“날 이곳에 부른 이유가 뭐지?”
가장 궁금한 점이었다.
문제가 생겨서 싸운 상대를 본거지에 데려와 치료해 주다니. 속마음이 참으로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 물음에 드래곤이 무심하게 답했다.
“뭐, 그냥. 심심해서?”
“응?”
순간 석찬은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심심하다는 것이 이유라니.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 몸을 너희 인간들의 잣대로 판단하지 마라.”
“생각도 읽는 건가?”
“네 녀석 얼굴만 봐도 다 알 수 있다.”
[맞아. 이 얼굴에 다 써 있어.]
‘라우르, 어디 있다가 이제 나온 거예요?’
[뭐, 여기 온 이후 네가 계속 쓰러져 있어서 말이지. 나와도 대답해줄 사람이 없는데 굳이 나올 필요가 있나.]
‘라우르는 알겠어요? 저 드래곤의 생각에 대해서?’
석찬의 물음에 라우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드래곤 속마음이야. 쟤네들은 말이야. 변덕이 참 심해.]
어느 정도냐고?
세상을 멸망할 듯이 브레스를 뿜어 대다가도, 금세 흥미를 잃고 레어로 돌아가 수십 년씩 잠을 자는 게 바로 드래곤이다.
‘조금 심한 것 같은데?’
[진짜다. 저놈이 아무리 어린 새끼라고 해도 드래곤의 본성이 어디 가진 않아.]
‘진짜 모르겠네.’
“뭐, 단지 심심해서 널 데려온 것은 아냐. 다른 이유를 말하기 전에 우선.”
드래곤이 씩 웃었다.
“한번 다시 싸워볼까?”
“응?”
그 말과 함께 드래곤이 달려들었다.
워낙 갑작스러운 공격에 피할 틈조차 없던 석찬은 양팔을 들어 가드를 만들었다.
콰직!
“큭!”
가드를 뚫고 들어오는 충격에 석찬이 뒤로 쭉 밀려났다.
“그게 다가 아닐 텐데… 어서 그걸 보이거라!”
드래곤의 맹공에 석찬의 머릿속은 고민으로 가득했다.
‘그거라면 설마 그 기술을 말하는 건가?’
[그런 것 같은데?]
‘써도 돼요?’
[안 쓰면 너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전의 싸움으로 완전히 검증되지 않았으니, 한번 다시 해봐.]
‘감사합니다. 그럼 어제처럼… 눈으로! 부탁드립니다! 우왁!’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며, 구석으로 몰린 석찬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도망칠 곳도 없구나. 빨리 그걸 보여주는 게….”
말을 잇던 드래곤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석찬의 눈은 이미 변해 있었다. 날카로운 녹안이 드래곤을 노려봤다.
부분 강신. 말 그대로 부분만 강신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부분 강신은 부분적으로 신의 힘을 빌려오기 때문에 부담이 그만큼 줄어드는 장점이 있다. 대신에 부담을 최소화하려면 한 부분밖에 빌려오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이전과 차원이 다른 전투력을 보이기에는 충분했다.
현재 석찬이 부분 강신을 사용한 곳은 바로 눈. 투신의 눈으로 보는 전장은 색달랐다.
마력의 흐름이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상대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예측되는 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었다.
“그래, 그거다!”
더욱 맹공을 퍼붓는 드래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다르게 석찬은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드래곤이 힘 조절을 한 덕도 있지만, 라우르의 눈을 장착한 석찬의 움직임이 확연히 달라졌다.
“그래, 난 그 눈을 원했다. 어디 한번 날 더 즐겁게 만들어 보거라!”
“큭!”
드래곤의 주먹을 흘려내며, 석찬이 녀석의 옆구리를 밀쳤다.
투쾅!
“캬학!”
겉으로는 단순히 밀친 것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마력을 터트렸기에 꽤나 큰 데미지를 입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하! 재밌구나!”
드래곤은 멀쩡하게, 아니 오히려 더욱 강하게 석찬을 압박해왔다.
‘힘을 제어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이건 조금 너무하잖아!’
차원이 다른 강함에 석찬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두 군데를 써야 하나?’
[뭐, 가능하긴 한데… 감당할 수 있겠어? 물론 강신보단 낫겠지만, 그래도 장난 아니게 아플걸?]
‘상관없습니다.’
그깟 부담쯤이야, 견디면 그만이다.
[이번엔 어디로 할래?]
‘팔로 부탁드립니다.’
[팔이라… 오른팔, 왼팔, 아니면 양쪽 다?]
‘양쪽 다!’
‘오케이. 건투를 빈다.’
라우르의 몸이 스며든 순간, 팔의 핏줄이 요동쳤다.
“무엇이냐, 인간.”
드래곤 또한 변화를 눈치챘는지 공격을 멈추고 석찬을 살폈다.
쾅!
시험 삼아 내리친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마력도 없는 상태에서 말이다.
“호… 갑자기 그렇게 강해지다니 신기하….”
쾅!
바닥 조각이 총알보다 빠른 속도로 드래곤의 볼을 훑고 지나갔다.
주륵-
녀석의 볼에서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인간과 다름없는 붉은 피였다.
“뭐야, 너도 피를 흘릴 줄 아는구나?”
피를 본 드래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인간… 지금 무슨 짓을….”
“재미있다며. 원래 싸움은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
주먹 위로 강마력이 덮어 씌워진다.
‘큭.’
부분 강신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팔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역시 아직 두 군데는 조금 무린가.’
최대한 빨리 끝낸다.
“크르릉… 죽어라, 인간!”
드래곤의 울음소리와 함께 싸움이 재개되었다.
쾅! 쾅!
쿠르릉!
그들이 주먹을 맞부딪칠 때마다 벽이 박살 나고 천장에 금이 갔으며, 보물들이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주변 상황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싸움에 집중했다.
쿠구구… 콰광!
동굴 천장을 뚫고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계속해서 공방을 이어 갔다.
“네 집 다 무너진다. 괜찮겠냐?”
“집이라. 그건 네 녀석의 목숨으로 갚아라, 인간!”
‘젠장… 팔이….’
한계에 다다른 것인지 팔이 빠질 것처럼 아파왔다.
‘한 방을 노려야 해.’
석찬은 드래곤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며 힘을 모았다. 한 점으로 응축된 마력이 유형화되어 피어올랐다.
“그것이 네 전부냐, 인간.”
강마력, 약간의 신력 그리고 신의 근력이 들어 있는 주먹이다.
“그래, 내 전부다. 그러니, 남기지 말고 모조리 받아 처먹어라!”
“오냐! 들어와라!”
곧 두 사람의 주먹이 격돌했고.
콰과광!
거대한 폭음과 함께 산이 무너져 내렸다.
쿠르릉!
이내 무너진 산 위로 두 남자가 떨어졌다 석찬과 드래곤, 두 사람 다 힘을 다한 터라 충격을 완화할 방도가 없었다.
쿵-
그대로 바닥에 처박힌 두 사람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하루를 더 누워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