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그날 저녁.
석찬 일행은 외출 후 돌아온 에리카의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에리카의 아버지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후레이라고 합니다. 올킬러 님 팬이기도 하죠. 하하!”
게다가 생김새도 한 여인의 아버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젊어 보였다. 대한민국에서 편의점에 들어가 술을 사려고 하면 주민등록증 검사를 할 정도였다.
탑의 특성상 처음 들어올 때의 외모를 거의 유지한다지만, 영 익숙해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저보다 나이도 많으실 텐데, 말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하하! 오랜만의 손님께 그럴 순 없죠! 에리카! 만찬을 준비해라! 오늘은 파티다!”
후레이의 말에 그의 옆에 서 있던 여인이 두 눈에서 광선을 내뿜었다.
“파티? 지금 우리 여관 상황은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엄마! 손님 앞에서 그런 말은….”
에리카와 똑 빼닮은 외모를 짐작하긴 했지만, 역시 그녀가 에리카의 어머니인 것 같았다.
“이런, 죄송해요. 제가 실언했네요. 레아라고 합니다. 에리카 어미 되는 사람이고요. 요즘 돈이 없다 보니 성질이 사나워져 있었어요. 다시 한번 사과드려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짧은 인사를 마친 뒤 에리카의 부모님은 주방 안으로 들어가고, 홀로 남은 에리카가 석찬 일행을 자리로 안내했다.
“쉬고 계세요. 저녁거리를 내올게요.”
“응.”
조금 기다리자 후레이가 성대한 차림의 저녁상을 대령했다.
“이거… 양이 조금 많은 것 같은데요?”
“하하! 조금 넉넉히 했습니다.”
머리 위에 난 혹을 문지르며, 후레이가 씩 웃어 보였다.
“그보다 식기 전에 어서 드시죠.”
석찬은 음식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자칼 고기 스테이크, 오크 뒷다리 꼬치구이, 자이언트 피시 프라이 등등 각 층에서 공수할 수 있는 최상의 재료를 사용한 요리들이 어서 자신을 먹어달라는 듯 황홀한 냄새를 풍겨왔다.
“잘 먹겠습니다.”
생김새에서 알 수 있듯이, 요리의 맛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굽기, 불의 세기, 간, 재료의 신선도, 뭐 하나 빠짐없이 최상인 요리는 입에 넣는 것만으로도 자동으로 미소가 걸렸다.
“맛있어요….”
“존맛탱구리!”
이브와 진현도 허겁지겁 식사를 시작했다.
“후레이 씨도 같이 드시죠. 가족분이랑 같이.”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어차피 저희 셋이서 다 못 먹어요.”
“너무 민폐인데…”
몇 번의 거절 끝에, 후레이 일가는 결국 석찬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 거절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후레이는 편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음, 내 솜씨지만, 역시 최고야!”
자화자찬도 빼먹지 않으며 열심히 음식을 먹어치우던 후레이가 잠시 자리를 벗어나더니, 양손에 커다란 병을 하나씩 쥐고 나타났다.
“맛있는 음식에 술이 빠질 수 없죠. 한잔합시다!”
“아빠… 술은 좀.”
“또 술?”
두 여자의 반응은 조금 냉담했지만, 후레이는 결국 가져온 술을 따라 테이블 위에 있는 모든 이에게 건넸다.
“오랜만의 손님을 기념하며, 건배~!”
“건배!”
“건배.”
짠.
술이 한두 잔 들어가다 보니 취기도 슬슬 올라왔고, 여섯 사람 사이의 분위기도 친숙해졌다.
“마흔 살이시라고요?”
“응. 그렇게 안 보이지?”
우연치 않게 에리카의 나이를 알게 된 석찬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높게 쳐줘도 이십 대 초반의 얼굴로 마흔 살이라니.
‘탑이란 게 정말 엄청나긴 해.’
에리카의 부모와 에리카 그녀 전부 십 대 후반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40년, 100년 이상씩 산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석찬이. 우리 딸 어때? 예쁘지 않아?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걸로 아는데….”
“아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처먹으시지? 미안해. 이이가 술만 마시면 헛소리를 해서.”
“괜찮아요.”
어느새 말들도 편해지기 시작했다.
“하하! 올킬러가 우리 여관에 오다니! 사인이라도 받아서 대대로 가보로 물려줘야겠어.”
“그러실 필요까지야…”
“아니! 탑 최고의 루키가 여기 있다는 건 큰 축복이야! 분명 매상 증가에도 도움이….”
말을 잇던 후레이의 입을 레아가 가로막는다.
“거듭 미안하지만, 남편의 궤변은 무시해 줬으면 좋겠어.”
“네.”
“한 번만 더 이분들 피곤하게 하면 입을 꿰매버릴 줄 알아. 알았어?”
끄덕끄덕.
여러 우스꽝스러운 상황도 연출되며, 어느새 저녁 자리도 마무리되어 갔다.
“으어. 졸려.”
“에리카, 손님분들 좀 방에 안내해 드리거라.”
“네….”
“에리카. 저는 조금 쉬다가 올라갈게요.”
“아… 알았어.”
에리카도 조금 취해 비틀거리긴 했지만, 능숙한 발걸음으로 진현과 이브를 위층으로 데려갔다.
“나도 잘 거니까, 빨리 들어와.”
“그래, 자. 여보.”
레아마저 2층으로 사라지고, 어두운 1층에는 후레이와 석찬만이 남아 있었다.
텅 빈 접시와 잔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탁자 사이에서, 두 남자는 조금 더 대화를 이어나갔다.
40층의 자세한 상황이라든지, 나타나는 몬스터나 지형지물 같은 정보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석찬이 자네도 슬슬 올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새 달이 하늘 가운데 높이 떠있었다.
“잠시만요, 아직 궁금한 게 하나 더 남아서.”
“뭔가?”
“40층에 눈이 내리는 이유가 뭔가요?”
“응?”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원래 이렇게 눈이 내리던 곳이 아니었죠?”
석찬의 말에 후레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눈이 내리는 데 이유가 있겠나. 다른 곳이 항상 맑거나 우중충한 것처럼, 여기도 항상 눈이 내리는 거지.”
하지만, 석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요. 분명 이유가 있잖아요. 제 말이 틀렸나요?”
이어지는 말에 취기로 살짝 풀려 있던 후레이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후레이의 머뭇거림에 석찬은 확신을 얻고 재차 질문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
후레이는 말이 없었다.
몇 분간의 침묵이 이어진 후,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아까 40층에 몇 년째 거주하고 있는지 말했었나?”
“네. 60년 가까이 여기 사셨다고.”
“그래, 한 60년쯤 되었지. 오래도 됐어.”
60년. 지구식으로 따지면 강산이 여섯 번은 바뀔 세월이다.
“네가 예상했던 것처럼, 40층이 옛날부터 눈이 내리던 곳은 아니었어.”
오히려 50층의 시험을 보기 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머물러 저층대의 마을 중에서는 가장 활발하고 활기찬 분위기였다고 한다.
“당장 내가 40층에 살기로 한 이유도 50층 시험에서 몇 번이고 떨어지다 아내랑 눈이 맞아버린 경우니까 말이야.”
옛 추억을 회상하며 후레이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처음 20년은 말이야. 참 행복했어. 운영하던 여관도 잘돼서 돈도 꽤나 벌렸고, 신혼 생활도 즐거웠으니 말이야.”
‘20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는 다른 곳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는 건가.’
“혹시 용이라고 아나?”
“용이요? 혹시 드래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 드래곤.”
“설마….”
“그래. 누가 알았겠어. 40층에서 드래곤이 태어날 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드래곤이라니.
드래곤이 어떤 생명체인가?
녀석은 보통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 세계관 최강자급 포스를 지닌 몬스터였다. 그 위용만큼이나 엄청난 힘을 가졌다고 묘사되었으며, 탑의 문헌을 살펴본 결과 실제로도 그랬다.
“드래곤이 이렇게 저층에 생겨났다고요?”
정보 통제로 많은 지식을 얻을 수는 없었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드래곤은 절대 50층 밑에서 나올 몬스터가 아니다.
“아무도 영문을 몰랐지. 그래도 처음에는 괜찮았어. 갓 태어난 드래곤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상태였으니까 말이야.”
심지어 드래곤은 가끔 마을에 도움을 주기까지 했단다.
선에 가까운 녀석의 성격 덕분에 10년 정도는 평화가 유지되었다고 한다.
“에리카는 말이지. 녀석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어.”
“예?”
“드래곤의 도움 중에는 갓 태어난 인간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도 있었는데, 운 좋게도 에리카를 낳았을 때 축복을 받을 기회가 있었던 거지.”
신기했다. 드래곤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아기라니.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어. 이 행복이, 단 한 순간에 사라질 거라고는 말이야.”
“한순간에요?”
행복에 젖어 있던 후레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여느 때처럼 밝은 오후, 사건이 터졌다.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이 작당하고 드래곤 레어에 쳐들어간 거야.”
그 말에 석찬이 두 눈을 찡그렸다.
“미친 거 아니에요?”
“당연히 미쳤지. 결과는 안 봐도 알겠지?”
열 명 정도 파티를 꾸려서 드래곤 레어로 출발한 사람들은 다시는 마을로 돌아올 수 없었다. 게다가 드래곤의 노여움을 사버렸다.
“드래곤은… 우리에게 주었던 축복을 다 거둬가고 사람들을 학살한 것도 모자라, 층 전체에 저주를 걸었어.”
“설마 그게….”
“그래. 이곳에 사시사철 눈이 오는 이유가 바로 드래곤의 저주 때문이다.”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드래곤의 저주라니.
“그 이후 사람들은 정보를 은폐하기 시작했다.”
위기감을 느낀 마을 사람들은 드래곤의 존재를 감추려 들었다.
드래곤에 대해 다른 이들에게 떠벌린 이들은 40층에서 고용한 베테랑 암부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했으니, 사람들은 수십 년간 드래곤에 대해 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40층이 황량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계속되는 폭설과 드래곤의 저주 때문인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기 시작했고, 가장 찬란했던 마을은 단숨에 가장 초라한 마을로 변모했다.
“그때 에리카는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라. 자신이 드래곤에게 축복을 받았다는 것도, 그걸 다시 빼앗긴 것도….”
그렇게 이야기는 끝났다.
‘드래곤이라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고등 존재의 등장에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그때 석찬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지나갔다.
‘잠시만. 그럼 설마… 아까 탐지에 실패한 곳이.’
[드래곤 레어일 수도 있겠는데?]
‘라우르. 드래곤이 자기 영역 침범하는 거 무지 싫어하죠?’
[말이라고 하냐? 방금 얘기를 듣고도 그 질문이 나와?]
느낌이 싸했다.
‘이거 아무래도… 좆된 거 같은 느낌이….’
[음. 석찬아. 한번 감지 좀 해봐라. 나도 조금 느낌이….]
황급히 탐지를 해보니, 거대한 마력 덩어리가 마을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설마….’
그리고 언제나처럼, 안 좋은 느낌은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저 멀리, 휘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거대한 날갯짓과 함께 드래곤이 마을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