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40층.
1층, 10층, 20층, 30층에 이어 다섯 번째로 보는 거대 마을이다.
40층의 지형은 여태까지 봐왔던 곳들과 많이 다르지 않았다.
‘와.’
다른 점이라고 하면, 바로 기후에 있었다.
똑.
석찬의 손바닥 위로 작은 얼음 결정이 떨어졌다.
‘눈이라니.’
새하얀 함박눈이 잔뜩 내리고 있는 40층 마을 벽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진현이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으악, 쓰레기.”
군대를 다녀온 지 몇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진현은 여전히 눈만 보면 쓰레기라고 불렀다.
‘최전방에서 눈 치우느라 고생했다고 했지, 분명.’
“명패.”
두꺼운 털가죽을 둘둘 둘러싼 경비가 명패를 요구했다.
“여기요.”
30층에서 갱신한 명패를 내밀자, 경비는 명패 갱신소를 가르쳐 주었다.
뽀득, 뽀드득.
바닥에 쌓인 눈을 밟을 때마다 발자국이 그대로 남는다.
“우와.”
그 모습에 이브가 신기한 듯 계속해서 발자국을 남겼다.
“눈 처음 봐?”
“네. 신기해요. 하늘에서 얼음이 내린다니….”
기본적으로 탑의 기후는 잘 변하지 않는다. 가장 큰 기후 변화가 비나 바람 정도다.
탑에 들어오기 전, 한국에서 눈이란 눈은 실컷 봤던 석찬이나 진현과는 달리 이브는 탑에서 나고 자랐고, 1층에서 나가본 적이 없기에 눈을 볼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우와!”
이브는 어린 아이 같은 눈으로 눈을 가지고 여러 실험을 시작했다.
불에 녹인다거나, 뭉쳐서 던진다거나, 대부분이 어렸을 적 한 번씩은 해봤던 것들이었다.
‘하긴, 처음 보면 저럴 수 있지. 그나저나….’
질색하며 구석에 서 있는 진현을 보니, 오랜만에 장난기가 발동됐다.
꽈득. 꽈드득.
눈을 잘 압축해서 뭉친 후, 마력을 가득 담는다.
우웅.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눈덩이가 완성되었다.
‘가볍게 한 발.’
쐐액-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날아간 눈덩이가 진현의 배에 적중했다.
쾅!
“쿠엫!!”
포탄이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눈덩이가 산산조각 났다.
진현 또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야, 이… 미친놈아….”
“아프냐?”
“당연한… 거, 아니냐?”
오랜만에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상쾌해졌다.
“청춘이네, 새끼.”
그 말에 진현이 이를 뿌득 갈았다.
“청춘은 개뿔, 아프면 환자지. 개새꺄!”
진현이 닥치는 대로 눈을 퍼 던지기 시작했다.
타다다닥!
“호오.”
눈덩이를 전부 걷어낸 석찬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래, 함 가보자.”
뿌드득. 뿌득.
마력을 이용해 뭉친 수십 개의 눈덩이가 진현을 조준했다.
“어… 어. 새꺄. 마력은 반칙이지!”
“눈싸움에 반칙이 어디 있어?”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눈덩이들이 일제히 진현을 향해 쏘아졌다.
“우와악!”
두두두!
본전도 못 건진 진현이 바닥에 처박혔다.
살짝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모습에 이브도 작게 웃었다.
“어이, 거기! 지금 길거리에서 뭐 하시는 겁니까!”
“아.”
경비병의 일갈에 그제야 자신들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본 석찬 일행이 짧게 사과하고 명패 갱신소로 향했다.
길을 걷던 와중 칼바람이 석찬 일행을 훑고 지나갔다.
“으악, 바람!”
“생각보다… 춥네요.”
“옷 두껍게 입고 다녀야겠네. 목도리나 모자도 사야겠고.”
좀 전보다 더 짙게 내리는 함박눈 때문인지, 머리에도 눈이 쌓여갔다.
“그냥 이동식 보호막으로….”
“아니에요, 이브 씨. 그런 건 낭만이.”
“낭만은 무슨 낭만. 이브, 그런데 굳이 이런 데 보호막 쓸 거까지는 없잖아?”
때마침 눈앞에 일상복 판매점이 들어왔다.
“오.”
딸랑딸랑-
상큼한 종소리와 함께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환한 웃음과 함께 석찬 일행을 맞이했다.
“어,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편하게 둘러보시면서, 필요하시면 불러주세요!”
“네.”
탑이라고 일상복이 후진 건 아니다. 전투복에 비해 수요가 떨어질지언정, 지구의 옷과 비교해도 퀄리티 면에서는 전혀 손색이 없었다.
오히려, 수많은 행성의 사람들이 지식을 십분 발휘해 퀄리티가 상당히 좋았다.
또한, 가게의 인테리어도 굉장했다.
그런저런 나무로 지어진 게 전부인 다른 층들의 가게와는 달리, 붉은색으로 칠해 따스함을 느끼게 해주는 벽, 신전에서나 볼 것 같은 디자인의 기둥, 사이사이 꽂혀 있는 멋들어진 촛대 등 꾸미는 데 신경 쓴 것이 느껴졌다.
“좋네. 조금 있다 명패 갱신하고 한번 둘러보자.”
“네.”
그 말에, 사장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안 사시는 건가요?”
“저희가 지금 막 40층에 도착해서요. 명패 갱신만 하고 바로 오겠습니다.”
그 말에 사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의심스럽다는 눈빛을 거두지는 못했다.
“꼭, 꼭입니다.”
“예.”
명패 갱신소에 도착한 석찬 일행은 순서를 기다릴 겸 대기석에 앉아 주변을 구경했다.
“아기자기하네요.”
“그러게. 잘 꾸며놨네.”
지금까지 들러왔던 명패 갱신소들은 전부 허름한 건물이 대부분이었다.
‘처음 한 번만 들르는 곳을 굳이 꾸며둘 필요는 없으니까.’
실제로 처음 마을에 도착해 명패를 갱신하는 것 외로는 명패 갱신소에 올 일이 없다.
그렇기에, 여러 장식들로 꾸며둔 40층의 명패 갱신소는 더욱 신기하게 다가왔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한 안내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신기하죠? 갱신소를 이렇게 꾸며둔 것에 대해서.”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짧은 단발의 여인이었다.
“어, 조금은요?”
마치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여직원이 설명을 시작했다.
“보셨다시피, 이곳은 사시사철 눈으로 덮여 있어요. 게다가 눈이 오는 빈도수도 높고요. 아까 함박눈 보셨죠? 비슷한 규모의 눈이 일주일에 네다섯 번씩 오고 심할 때는 허리 높이까지 쌓이는 눈이 내리기도 해요.”
허리까지 쌓이는 눈이라니, 도저히 상상이 안 갔다.
“엄청나네요.”
“흐익? 허리까지 온다고? 그럼 치우는 데는… 얼마나 걸리는 거야?”
진현은 PTSD가 제대로 온 것 같았다.
“괜찮아요. 스킬을 사용하면 치우는 데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죠.”
“그런데, 눈이랑 갱신소를 꾸며놓은 것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당연히 상관이 있죠. 사냥꾼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버는지 모르시는 건 아시죠?”
“당연히 알죠.”
“오시는 길에 상점 같은 데는 둘러보셨고요?”
“네. 옷들도 아주 예쁘고 안도 잘 꾸며 놨더라고요.”
사냥꾼을 업으로 삼아 탑을 오르며 사체 값으로 돈을 벌어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한 층에 정착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마을에 옷가게나 포션 가게 같은 곳을 차려 장사를 하거나 몬스터 사체 거래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는 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어느 정도 여직원의 말에 대해 알 것 같았다.
“아.”
기본적으로 탑은 층의 이동이 자유롭다. 이를 이용해 상층까지 올랐던 사람들도 편하게 아래층의 마을로 내려와 머물거나 사체를 거래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게 주인들은 같은 마을의 사람들보다는 다른 층에서 넘어온 사람들로부터 얻는 수익의 비중이 지극히 높았다.
그리고 이곳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말 그대로다.
40층의 마을에는 사람이 별로 돌아다니지 않았다. 같은 층의 사람들은 물론, 타층의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분명 가게 안도 한적하고 사장님 반응도 이상했지.’
처음에는 그저 물건도 안 사고 구경만 하는 진상을 아니꼬워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런 이유만으로 그런 눈빛을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오랜만에 온 손님이 아무것도 안 사니 아쉬웠고, 또 두려웠던 것이 아닐까.
“예상하셨다시피, 이곳에는 항상 많은 눈이 와서 사람들이 잘 돌아다니지 않아요. 퀘스트 때문에 사냥은 여기서 해도 날씨 좋은 30층 마을로 가서 거래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30층은 유난히 인구 밀도가 높았는데, 그 이유가 조금은 여기서 밝혀졌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최대한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어서 모두가 그렇게 자신의 가게를 꾸미는 거예요.”
“아.”
“물론, 효과는 미미하겠죠. 예쁘게 보이는 거랑 사람들이 찾는 거랑은 또 다른 거니까요.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할 정도로 40층의 상황은 좋지 않아요.”
“저런….”
이브의 시선에서 동정이 가득 느껴졌다.
“저희가 뭐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괜찮아요. 그래도 먹고사는데 심각한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라. 정 뭐하면 아래층 가서 사냥하기도 하고요. 제가 이래 봬도 20층에서는 2급 사냥꾼까지 찍었었답니다.”
“다음! 3번 손님!”
때마침, 카운터의 직원이 석찬 일행을 불렀고.
“이만 가 봐야겠네요. 여러 가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정 고마우시면 북쪽에 있는 ‘에리카의 저녁’에나 한번 들러주세요.”
“에리카의 저녁. 기억하겠습니다.”
“3번 손님! 어디 계시나요!”
카운터 직원의 외침에 석찬은 여직원을 향해 짧게 인사하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카운터 직원은 깡마른 체구의 남자였다. 그는 피곤에 찌든 눈으로 무성의하게 입을 열었다.
“명패 보여주세요.”
“여기요.”
석찬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찬란한 백금색 명패를 꺼내들었다.
“이건…?”
명패를 본 직원은 좀 전의 썩은 동태 눈깔은 어디가고 동그랗게 튀어나온 눈으로 명패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백금색 명패? 당신이 이걸 어떻게… 이건 위층의 거대 길드 고위급 간부들만 가지고 있다는… 설마 위조입니까?”
직원이 날카로운 눈으로 석찬을 노려봤다.
하지만 석찬은 태연히 대답했다.
“받았습니다. 30층에서.”
사실이다.
거대 길드의 고위 간부들만 쓴다는 백금색 명패. 이는 절대 평범한 사람이 소지할 수 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그간 석찬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두 사냥꾼 길드 지부 지부장과의 격돌. 결과적으로는 승리했지만, 그 과정에서 석찬은 몇 번이고 죽을 위기를 넘겼다.
이에 30층에 있을 적, 미쉘 그레이스가 다시 한번 석찬을 찾아왔다.
‘당신은….’
‘오랜만이야.’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미쉘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저한테는 무슨 볼일로?’
‘…저번의 사고에 대해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싶어서. 내가 정말 미안하다. 얘기해 놓는다고는 했는데, 또 그럴 줄은 상상도 못했어.’
‘미안하면 다인가요? 전 죽을 뻔했는데?’
‘받아.’
미쉘이 던진 것은 세 개의 백금색 명패와 보라색 액체가 담긴 작은 병 하나였다.
‘이건….’
‘너랑 네 친구들 세 사람을 위해 특별히 만든 명패야. 앞으로 명패를 갱신할 때마다 자동으로 베테랑 사냥꾼의 직위를 얻게 될 거야. 그리고 옆에 거는….’
‘엘릭서.’
‘어떻게 알았어? 맞아. 엘릭서야.’
엘릭서를 받았을 때, 석찬은 적잖지 않게 놀랐다. 엘릭서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고작 30층의 사람한테 이렇게 귀한 것을 준다고?
그런 그의 표정에 미쉘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내 성의라고 생각해줬음 좋겠어. 난 아직 널 포기 못 하겠거든.’
‘일단… 감사히 받겠습니다.’
‘잘 생각해봐 줘.’
미쉘이 석찬에게 가볍게 포옹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미안함의 표시야.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 처리해야 할 게 조금 많을 것 같거든.’
입은 미소 짓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대장 딸, 이브였던가? 그 아이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그게 미쉘과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리고 직원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놀라움에서 경악으로 변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