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91화 (191/203)

■ 191. 도시락 □

6월 평가가 5일 후로 다가왔다.

작업실엔 환하게 켜진 불이 꺼질 줄 모르고, 미대생들의 얼굴엔 다크 서클이 드리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크 서클의 대열에 유나도 합류했다.

나와 김태민은 일찌감치 판화로 대동단결해서 작품을 완성했다.

심지어 게으름뱅이 수진 선배조차 '그림에 지문 넣기' 작업으로 교수들의 칭찬 속에 작품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우리 중 최고의 똑순이인 한유나가 아직도 밤을 새고 있다니!

누구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왜지?

나는 작업실에서 유나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때, 잘 돼가?"

"빨리도 물어본다!"

유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김용철 작가의 작업실에 출근하느라 최근 유나에게 소홀했다.

그리고 또 때로는 미대생들이 서로의 작업에 대해 묻기가 다소 어려운 측면도 있었다.

나는 유나의 자리로 가서, 유나의 그림들을 살펴봤다.

유나는 입체나 다른 작업들은 하지 않고 오직 그림만 그렸는데, 그것은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시작할 때와 달리 지금 표정은 많이 풀이 죽어 있었다.

"잘 안 풀려? 어디가 맘에 안 드는지 물어봐도 돼?"

유나는 내게 보여주려고 자기가 그린 세 점의 그림을 벽에 기대어 세웠다.

셋 다 제주도의 풍경화.

유나의 집 근처였고, 그 중 하나는 나한테도 설명해준 장소였다.

하나같이 아름답고 잘 그린 그림.

그리고 셋 다 거의 완성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괜찮은데?'

잘 모르고 봤다면 이번에도 잘 그렸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나가 불만을 가진 상황을 벌써 알고 있으니까.

어디가 문제인지 유심히 살펴봤다.

"전에 내가 말한 적 있지? 그리려고 기억하고 있는 풍경을 실제로 확인해보면 조금씩 다르다고."

"응, 내가 기억 조작이라고 놀렸었지."

유나는 주먹으로 내 어깨를 톡 때렸다.

"그걸 이번에 내 작품의 주제로 하고 싶었거든. 그림과 사진을 함께 전시하는 거야. 기억하는 풍경을 그리고 그 옆에 실제의 사진을 거는 거지. 그 차이만큼이 바로 한유나가 아닐까 싶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핏 들으면 꽤 재미있는 발상.

"교수님들은 뭐래?"

"좋대. 강영 교수님도 그렇고, 윤성례 교수님도 그렇고, 다 괜찮대. 괜찮은 생각이래."

"그래? 그럼 그림은?"

"그림도 좋대. 다들 나보고 잘 그린대."

그것은 엄연한 사실.

"그런데 뭐가 불만이야?"

"나도 그걸 몰라. 그림을 고치고, 고치고 또 고쳐도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아. 길을 잃은 기분이야."

"길을 잃어서 마음이 답답한 게 아니라, 길을 찾는 중이라서 마음이 답답한 게 아닐까? 지금 너는 계속 정답에 가까워지는 중일 거야."

말장난 같은 내 위로에 유나는 힘없이 웃었다.

나는 유나에게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어서 유나의 작품을 뚫어져라 살펴봤다.

그리고 유나가 찍은 풍경 사진도 같이 살펴봤다.

"어때? 어떤 것 같아?"

유나가 걱정스레 물었다.

뭐든 혼자 알아서 잘하는 유나.

유나가 내게 의지하고 물어본다는 것은 정말 막막한 상태란 걸 뜻했다.

"음, 내 생각을 말해도 돼?"

"남자친구는 그러라고 사귀는 거야."

그렇군.

유나의 동의를 받은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음. 일단 나는 네가 평소에 그리던 방식을 생각해봤어. 달라진 건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아. 바로 이 풍경 사진들."

"응?"

유나는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자기가 찍은 풍경 사진을 바라봤다.

"교수들이 네 발상을 칭찬하고, 그림도 칭찬하는 것은 당연한 것 같아. 전부 사실이니까. 나도 발상 자체는 괜찮다고 생각해. 그런데 너 혼자 불만을 가지고 있지."

"그래서?"

"왜 남들은 다 괜찮다고 하는데 너 혼자 불만이 있을까? 그건 아마 남들보다 네가 자기 작업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교수들이 학생들보다 미적인 안목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교수들은 정해진 시간만큼만 학생들의 작품에 대해 고민한다.

그들이 학생에 대해 아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그냥 흘려들어. 내가 원래 네 그림 팬이었잖아."

피식.

유나는 대답대신 웃었다.

"그래서?"

"네가 그림과 사진을 같이 걸겠다고 말했을 때, 기발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나는 벌써 네 그림을 너무 좋아하고, 네 그림이 충분히 완전하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사진을 같이 건다는 게 뭔가, 사족을 붙이는 것 같았어."

"내가 사진을 같이 걸겠다고 한 것은 내 기억이 현실을 벗어나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네 그림들만으로도 벌써 그 사실을 충분히 말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오히려 사진을 같이 걸어서, 네 자유로웠던 그림들이 구속당하지는 않았을까? 교수들은 네 원래의 가능성을 모르니까 지금의 그림도 칭찬하는 거고. 넌 원래의 네 그림을 아니까 불만이 생겼던 건 아닐까?"

유나는 나한테서 사진을 건네받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어쩌면 네가 맞을 지도 몰라.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런데 뭔가 공감이 가는 조언을 해 준 사람은 너 밖에 없었어. 잘했어, 남자친구."

칭찬도 이렇게 터프하게 하다니.

뿌듯하군.

"네가 한 말, 분명 가능성이 있어. 다시 그려야겠다."

"5일 밖에 안 남았는데? 그냥 사진만 치우고, 필요하다면 기존에 그렸던 그림들을 수정만 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야. 다시 그릴래. 사진으로 찍어두지 않은 새 장소를 정해서,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그릴 거야."

"5일 밖에 안 남았는데?"

"할 거야. 5일이면 할 수 있어."

그렇게 유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조언이 유나에게 돌파구를 만든 것 같아 기쁘긴 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5일 밖에 안 남은 상황에 새롭게 일을 만든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남자친구라는 게 참 애매해.'

유나가 힘내서 새로 도전하는 것은 응원해주고 싶은데, 또 너무 힘들게 고생하는 것은 싫었다.

아무튼.

그렇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야할 것이다.

* * *

유나는 밤샘 모드에 들어갔다.

다행히 작업실엔 밤샘 모드에 빠진 절박한 미대생들이 많아서 외롭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유나의 도시락을 책임진다!'

일단 밤샘 모드 미대생들은 캔커피를 물대신 흡입한다.

빈 속에 그러다간 속을 상하기 다반사.

다른 미대생들은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

하지만 회귀자의 여자 친구는 건강해야 한다!

'먼저 유나가 기분이 좋아지도록 달콤한 것을 먹인다!'

나는 빵집에 가서 식빵을 두껍게 썰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계란을 풀어서 체에 거르고 설탕을 듬뿍 넣고 식빵을 적셨다.

"첫 도시락은 프렌치토스트!"

프라이팬을 낮은 불로 예열하고, 두꺼운 식빵이 타지 않도록 천천히 구웠다.

구워진 식빵엔 계피 가루를 뿌리고, 생크림 스프레이도 한 병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보온병을 챙겨서 학교 앞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가득 담았다.

그리고 슈웅 작업실로!

"오올, 이주원."

내 프렌치토스트 도시락을 받은 유나는 활짝 웃었다.

보온병 뚜껑을 열자 진한 커피 냄새가 온 작업실에 퍼졌다.

"남자 친구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여기저기서 들리는 불만의 아우성.

"이런 걸 뭐 하러 가져와. 가서 쉬지."

유나는 말로는 사양하면서도 입으로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하지만 이제 시작인걸?

나는 집으로 슈웅 날아와서 다시 2단계 도시락을 준비했다.

"밤샘 미대생들은 치킨과 샌드위치로 식사를 때우지. 그것은 탄수화물과 나트륨의 범벅. 나는 부족한 식이섬유와 비타민을 채워준다!"

먼저 호박잎.

거친 줄기를 뜯어내고 끓는 물에 데쳤다.

그리고 머위도 데쳤고.

멸치와 양파를 넣고 강된장을 끓인 후, 쌀을 씻고, 소고기를 섞어 밥도 지었다.

두 번째 메뉴는 쌈밥 도시락.

쓱싹쓱싹 소고기 밥을 참기름에 비빈 후.

강된장을 한 숟가락 얹고, 호박잎과 머위로 한입 크기 쌈을 쌌다.

"좀비 미대생들이 뺏어 먹을 게 분명하니까, 유나에게 제대로 먹이려면 많이 만들어야 해."

그리고 그림 그리면서 먹을 수 있도록 체리와 방울토마토도 차게 해서 따로 담았다.

"몸에 좋은 것만 너무 먹이면 재미없는 남자 친구로 보일 테니까!"

몸에 살짝 안 좋은 것도 준비했다.

감자와 달걀, 마카로니를 삶고, 사과와 딸기, 건포도도 넣고 마요네즈를 듬뿍 짰다.

옛날식 분식집 샐러드.

'아니, 이건 사라다라고 불러야 하지.'

느끼하지 않도록 설탕도 한 스푼, 요거트도 한 스푼 넣었다.

더 분식집 느낌이 나도록 햄도 잘게 다져 넣었다.

그렇게 슈웅, 두 번째 도시락 배달.

"아, 이주원. 진짜 웃겨."

유나는 내 도시락을 받고 깔깔 거리며 웃었다.

날파리 같은 괘씸한 미대생들이 몰려들어 '한입만'을 시전 했지만, 그럴 줄 알고 넉넉히 준비했다.

일종의 인해전술.

아니 식해전술이라 해야 할까?

"아, 진짜 한철이는 뭐하는 거야!"

오랜만에 등장한 윤상미가 약 오른 표정을 지었다.

"한철 오빠는 회사라도 다니죠. 우리 형원 오빠는 집에서 놀면서 귀여운 여자 친구 도시락도 안 챙기고!"

이정원까지 분노를 표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형원 선배와 한철이에게 항의 전화를 받았다.

"야, 너 때매 이제까지 쌓은 점수 다 까먹었잖아! 그런 계획이 있으면 미리 말을 해주던가!"

죄송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부러워할수록 유나가 더 기뻐할 텐데 내가 왜 정보를 흘립니까?

"어떡하지? 난 요리 못하는데. 일식집에서 초밥 도시락이나 포장해 갈까?"

"형, 그럼 안 돼요. 여자는 비싼 도시락보다 정성이 깃든 도시락을 원해요. 힘든 평가를 앞두고 남친이 챙겨주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은 거죠."

"그, 그렇군! 역시 이주원! 고맙다. 좀 서툴러도 내가 직접 도시락을 준비해야겠다!"

형원이 형.

미안해요.

형이 서툰 도시락을 준비할수록 내가 더 돋보이겠죠.

소개까지 해줬으면 됐지, 그 이상 저한테 뭘 더 바라십니까?

커플의 세계는 냉정한 법.

유나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라면 형원 선배 정도는 얼마든지 팔아넘길 수 있었다.

이것이 4년차 커플의 생존법!

"어제가 밍밍한 건강식이었으니, 오늘은 자극적인 김치볶음밥으로 달린다! 노른자는 반숙, 흰자는 바사삭, 계란 프라이도 얹어주자!"

그리고 다음날은 도가니탕 포장!

그리고 다음 날은!

이제 슬슬 내조 이주원 선생의 발동이 걸리려는 찰나, 유나는 4일째에 그림을 완성했다.

'왜 아쉽지?'

아무튼.

6월 평가의 하루 전날.

유나는 그림을 완성했다.

"야, 이주원 따라와 봐."

"응?"

그리고 유나는 나를 미대 건물 휴게실로 불러냈다.

유나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나를 꼭 안아줬다.

"주원아, 고마워. 덕분에 즐겁게 그렸어."

"그림은 다 그린 거야?"

"응."

"맘에 들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전보다는 훨씬 마음에 들어. 이번엔 이걸로 평가 받을래."

"다행이네. 잘했어."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도중에 포기했을 거야. 진짜 고마워, 주원아."

"아니야.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

난 유나의 등을 쓰다듬어줬다.

"아, 며칠 동안 밤 샜더니 머리 아파 죽겠다. 나 들어가서 잘래."

"그래, 내가 집에 바래다줄게."

그렇게 우리는 손을 꼭 잡고 학교 건물을 빠져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