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노력천재 미대생-190화 (190/203)

■ 190. 논란 종결 □

"저는 에칭을 찍었습니다."

에칭은 약품을 바른 금속판위에 날카로운 도구로 그림을 그려서 염산으로 녹여 새기는 기법.

펜 드로잉처럼 정교하고 세밀한 그림이 나온다.

그리고 목판에 비해 손이 덜 아프다.

김태민이 자기 판화 중 두 점을 앞에 걸며 말했다.

김태민 앞서 다른 조수들도 자기 작품을 발표했다.

일단 다들 대학원 졸업생이라 그런지 작품의 수준이 높고, 내재된 이야기도 깊었다.

무척 흥미롭고 수준 높은 크리틱.

김용철 작가는 아프리카 물소처럼 들이받지는 않았고, 조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드디어 김태민의 차례가 온 것이다.

김태민은 에칭기법으로 수진 선배와 고양이를 원없이 찍었다.

그리고 그 중 두 점만 꺼낸 것이었다.

"저는 펜 드로잉은 몇 번 해 본 적은 있습니다. 그런데 드로잉을 판화로 옮기면, 음······"

김태민이 느릿느릿 자기 작품을 설명했다.

"그냥 종이에 곧바로 펜으로 그려도 되는데 왜 굳이 판화로 찍었냐면. 동판에 그려서 찍으면, 종이에 직접 그리는 것보다 중간에 절차가 한 번 더 생깁니다. 그 절차에 시간이 달라붙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판화로 찍으면 갓 완성된 작품도 3년이나 5년 쯤 지나서 다시 보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그게 좋았습니다."

아무래도 판화는 면에 잉크를 발라서 찍으니까, 그만큼 종이가 눌리고 주위에 잉크 입자도 묻게 된다.

그걸 김태민은 시간이 달라붙는다고 표현한 것이었다.

판화는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작품의 분위기를 깊어진다.

약간 닳고 마모된 느낌.

그런 느낌은 때로는 우연이고, 때로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심을 수도 있었다.

특히 김태민의 펜 드로잉은 날카롭고, 즉흥적인 느낌이 강했는데, 판화로 찍으면 절묘하게 그 단점만 보완되었다.

지난 번 고양이 책을 그릴 때도, 김태민의 드로잉에 강영 교수부터 다른 학생들까지 모두 감탄했었다.

그런데 에칭으로 찍어내자,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작품이 나온 것이다.

조용한 감탄이 조수들 사이에서 퍼져 나왔다.

"저요! 제가 판화 전문이니까 저부터 말할게요."

최미향이 못 참겠다는 듯 손을 들었다.

"저는 대학생 때부터 판화 공방에서 아르바이트 했고요. 대학원 마치고는 직접 공방을 차렸습니다. 제가 판화를 가르친 것만 해도 7,8년은 넘을 겁니다. 그래서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내가 이제까지 가르친 모든 제자들 중에 태민이가 단연, 압도적으로 무조건 최고예요. 저는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마치 자기 작품인양, 최미향이 흥분해서 외쳤다.

그런데 충분히 이해가 갔다.

김태민의 작품은 옆에 있는 나도 흥분될 정도였다.

'봤냐, 이게 내 친구다.' 이러면서.

다른 조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김태민의 판화를 꼼꼼히 살펴봤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감탄들.

박정용은 전에 이렇게 말했었다.

[ 여기는 작가님 작업실이니까, 태민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

아마 말은 안했더라도, 다른 조수들도 비슷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김태민의 판화 두 점으로 이제 그런 불평은 완전히 1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을 것이다.

만약 김태민의 판화를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은 미술가로서 안목이 부족한 사람일 것이다.

김용철 작가도 김태민의 판화를 꼼꼼히 살펴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네 작품을 이렇게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구나. 드로잉이 많이 달라졌구나."

아마 많이 순화된 표현일 것이다.

'드로잉이 정말 훌륭하구나' 라고 말하기가 좀 어색해서 '달라졌구나'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용철 작가의 말이 극찬이란 것은 김태민을 포함해 작업실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아닌가, 태민이는 모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카리스마의 김용철도 오늘은 아들바보 팔불출이 되어서 귀에 걸리는 입을 애써 참고 있었다.

"그래, 태민아. 에칭 잘 봤다. 앞으로도 종종 작업실에 와서 도와다오."

"음. 시간이 되면요. 그리고 월급을 주시면요."

그냥 알겠다고 하면 될 것을, 김태민은 굳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김태민의 발표도 끝나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평소였다면, 김태민의 작품을 봤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그래, 태민아. 오늘도 네가 이겼다. 1패를 추가하지. 하지만 다음엔······]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나도 조금 자신 있었다.

나도 여러 장의 목판을 찍었는데, 그 중 하나만 가져와서 앞에 걸었다.

아······

이번에도 어김없이 조수들 사이에서 작은 감탄이 번져 나왔다.

내가 그린 것은 몇 년 전의 풍경.

나와 유나가 만난 첫 해.

우리가 스무 살 때, 유나가 아직 작은 자취방에 살 때였다.

'그땐 참 착했는데, 요즘 조금 사나워졌어.'

아닌가.

그때도 사나웠는데, 콩깍지가 쓰이기 시작할 무렵이라 나만 몰랐던 것인가.

아무튼.

내가 그린 장면은 유나의 자취방이었다.

오후엔 햇볕도 잘 들지 않는 좁은 자취방.

유나는 가끔 나를 불러서 밥을 차려주곤 했었다.

내가 집에 들어가면, 유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주위의 햇볕을 다 끌어 모아 손님을 맞았다.

그리고 A4용지 두 장만한 작은 밥상.

반찬 겨우 두세 개를 올리면 밥상이 가득 찼다.

거기에 1인용 밥솥을 박박 긁어서 고봉밥을 담고는 내게 밥을 먹였다.

내가 밥 먹는 동안 유나는 자기 무릎을 안고 옆에 앉아서 흐뭇하게 지켜보곤 했다.

'내 생에 최고의 밥상이었어. 어머니껜 죄송하지만······'

그것도 심지어 두 번의 생을 걸쳐 최고의 밥상이었다.

내가 허겁지겁 밥을 먹으면 유나가 웃으며 말하곤 했다.

"천천히 먹어, 바보야. 안 뺏어 먹으니까."

아, 그때도 나를 바보라고 불렀구나.

나중에 결혼하면 애들 앞에서는 참으라고 해야겠다.

'단둘이 있을 때만 바보라고 부르라고 부탁해야지.'

그렇게 회귀자의 상상은 오늘도 먼 미래까지 달렸다.

아무튼.

오후의 햇빛을 배경으로 밥상 옆에 있는 유나를 새겼다.

아기자기하게 반찬도 새겨 넣고, 유나의 자취방도 전부 새겨 넣었다.

절대 잊지 않고 싶은 순간들.

판화로 남겨둬야지.

"저요!"

이번에도 최미향이 번쩍 손을 들었다.

"주원이는 혼자 알아서 잘해서 내 제자라고 부르긴 좀 그렇지만, 그래도 주원이 작품도 마찬가지예요.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정말 아름답고, 예쁜 작품이에요. 그리고 저는 벌써 한 장 얻었어요."

판화는 여러 장이 나오니까, 같은 작업실을 쓰면 작가들끼리 작품을 나눠 갖곤 했다.

그런데 이번 기간 내내 최미향이 집요하게 내 작품들을 반강제로 얻어갔다.

물론 싫은 건 아니고.

그게 내 작품이 전문 판화가한테도 통한다는 증거니까.

"누나는 제 선생님 맞아요. 누나가 귀찮아하지 않고, 세세히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면 절대 판화를 못했을 겁니다."

"저도요. 누나 정말 고마워요."

앉아있던 김태민까지 끼어들자 최미향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임영태가 번쩍 손을 들었다.

"나도 한 장 얻을 수 있을까요?"

"나도요!"

"나도!"

조수들이 모두 손을 들었다.

심지어 박정용까지.

그리고 김용철 작가까지 손을 들었다.

"나도."

이것으로 낙하산 논란 종결.

나 이주원.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 김용철에게 작품을 선물한 사람이다.

아자뵤!

내 맘속에서 의미가 불분명한 환호가 마구 터져 나왔다.

아마 대한민국 미대생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 중 하나가 아닐까?

김용철 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고생 많았다. 목판은 참 특이한 작업이야. 판화를 새기면 일단 손이 아프지. 작가의 고통이 그대로 작품의 맛으로 치환되는 것 같아. 그래, 작품을 해보니까 어땠나? 자세히 이야기해보게."

"네."

나는 내 판화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 판화 속 사람은 제 여자친구입니다. 전 그동안 여러 번 여자친구를 그리려고 했는데 계속 실패했습니다. 심지어 먹지를 두고, 똑같이 그려도 이상하게 실제의 느낌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판화는 애초에 똑같이 새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눈, 코, 입을 간단하게 기호처럼 새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간단하게 그렸을 때 유나의 느낌이 더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김용철 작가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김용철 작가는 그 이유를 아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기가 말하지 않고 내게 물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를 알고 있나?"

"공기였던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느낌을 완성하는 것은 이목구비가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공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공기를 그려야 하는데, 전 여자친구의 얼굴에 반해서, 최대한 예쁘게 그리려고만 했습니다. 그래서 여자친구의 느낌을 그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판화는 얼굴부터 배경까지 전부 똑같이 공을 들여 찍어야 하니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유나 주위의 공기를 찍어냈던 것입니다."

"그렇군. 자네는 결국 자네 나름대로 해법을 찾았군."

그리고 김용철 작가는 조수들을 향해 장난스레 말했다.

"이건 단지 그림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야. 여자를 볼 땐 얼굴이 아니라, 마음씨를 봐야해. 그러니까 솔로인 사람들은 모두 명심해!"

그리고 일제히 터지는 웃음.

역시 월급을 주는 사람이 하는 농담이 어디서나 제일 강력하다.

"아무튼 주원아. 잘했다. 어려운 철학적 이야기를 할 것도 없이 보자마자 흐뭇해지는 작품이었다. 나도 대학생 시절에 씨씨였지. 여자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흠흠."

김용철 작가는 옆에 김태민이 있다는 것이 뒤늦게 생각났는지, 헛기침으로 마무리했다.

김용철 작가의 사모님이자, 김태민의 어머니도 한국대 서양화과 출신이었다.

아무튼.

"자, 오늘 크리틱은 여기까지다. 모두들 수고했다. 그런데 지난 번 회식 때 내가 했던 말을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오늘 크리틱은 내 아들놈이랑, 아들 친구까지 있어서 내가 공정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러니 싱가폴 전시에 관한 내기는 다음으로 미루자. 대신 오늘은 내가 회를 쏘지."

회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무튼 조수들의 환호와 함께, 오늘의 크리틱은 마무리되었다.

* * *

그리고 계약했던 5월 말이 되었다.

임영태의 말대로, 원하는 조수는 계속 남을 수 있었다.

최미향은 계속 남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작업실에 가져왔던 내 짐들을 챙겼다.

김용철 작가의 '거닐다' 판화 작업도 거의 마무리 되었다.

새벽 시간이지만, 오늘도 김용철 작가의 작업실은 환하게 불을 켜두고 모두 분주히 움직였다.

"주원아."

"네, 작가님."

김용철 작가가 다가와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꼭 짐을 챙겨야 하니?"

"네?"

"굳이 내 조수로 일하지 않더라도 그냥 여기서 작업해도 괜찮아. 공간도 넓고, 유능한 친구들도 많아서 도움 받기도 좋을 거야. 물론 나도 있고.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처음부터 그랬어."

김용철 작가의 작업실을 같이 쓸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

게다가 시설도 하나같이 최신.

하지만 나는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그리고 유나 눈치도 봐야 한다.

계속 새벽까지 김용철 작가 작업실에 다니다간 앞으로 영영 밥을 못 얻어먹을 수도 있다.

"감사합니다. 이제 졸전준비 때문에 바쁠 것 같아서요. 하지만 작업실을 떠나도 자주 찾아오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게. 커피나 한 잔 할까?"

"넵."

그리고 김용철 작가의 사무실에서 따뜻한 커피를 건네받았다.

"나랑 작업해도 별거 없을 거라고 했었지. 어땠나?"

일부러 튀려고 했던 말인데, 마음에 담아두고 계셨구나.

그런데 별게 너무 많았다.

김용철 작가는 너무 열정적이고 멋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용철 작가는 아첨을 싫어한다.

그러니 머리를 잘 써서 대답해야 한다.

"저도 공정히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의 아버지고, 또 너무 닮고 싶은 분이라서요. 이 작업실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솔직히 말하면 사심이 있었다네. 자네 포트폴리오가 훌륭하긴 했어. 그것만으로 충분했지. 그런데 거기에 더해서 자네를 뽑으면, 태민이랑 이야기할 거리가 많아질 거라고 생각했거든."

김용철 작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솔직하게 털어놨다.

"내가 너무 밖으로만 돌아서, 태민이 어렸을 때 많이 소홀했다네. 그게 늘 미안했어. 그래서 자네를 뽑아두면 적어도 태민이랑 이야기는 좀 더 하겠구나 싶었지. 그런데 자네 출근 첫날에 태민이가 나타나서 자기도 일을 하겠다고 했지. 겉으론 난감한척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좋았다네. 작전 대성공이었던 거야."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뿌듯한데요?"

"아마 그림 그리는 아들을 둔 모든 화가 아버지의 꿈일 거야. 같은 작업실에서 아들을 조수로 쓸 수 있다는 것 말이야. 남들에겐 사소해보일지 몰라도, 자네가 내 꿈 하나를 이뤄준 거야."

내게도 무척 다행스럽고 고마운 기간이었다.

나는 근사한 아버지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네 약속 했네. 자주 찾아오게. 다음에는 여자친구도 한 번 데려오고. 그리고 판화 한 장 내놓고 가는 거 잊지 말게."

"네, 약속하겠습니다."

"3달 동안 고생 많았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태민이 잘 부탁하네."

"부탁이라뇨. 혼자서도 뭐든 잘하는데요. 그리고 제게도 소중한 친구라서, 저도 많이 의지하고 있습니다."

김용철 작가가 웃으며 한 번 더 내 어깨를 두드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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