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라맥 □
4일간 거의 밤을 샌 유나.
그래도 6월 평가 하루 전에 작품을 완성해서 다행이었다.
난 유나가 들어가 자도록 바래다 준 후, 회사에 출근해 일을 했다.
모처럼 해가 지기 전에 출근했더니, 무척 여유로웠다.
'폭풍 전의 고요랄까.'
내일이 6월 평가인데, 하루가 이렇게 잔잔해도 되는 것일까.
뭐, 가끔은 느긋한 날도 있어야지.
그리고 저녁 8시에 퇴근해 집에 도착했다.
나는 [노력상점]을 가지고 있어서 거의 새벽 3시 전에는 잠들지 않는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다시 또 새벽일과를 시작해야지.'
그렇게 라면 물을 올리고, 미뤄둔 부엌 정리를 하는데.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유나가 서 있었다.
"잠은 좀 잤어? 머리는 이제 안 아파?"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부엌을 쳐다보곤 웃어댔다.
"뭐야, 바보야. 나한테는 온갖 도시락을 다 챙겨주더니 자기는 라면 끓여 먹는 거야?"
사는 게 다 그렇지.
그냥 생각 없이 끓인 라면인데, 어쩌면 유나에게 동정 점수를 딸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물 더 넣고 내 라면도 같이 끓이자."
"떡이랑 달걀도 넣을까?"
"응."
"밥 먹으러 온 거야?"
"그게, 자다가 유미가 와서 깼거든. 내가 최근 작업실에서 계속 밤 샜잖아. 그래서 유미가 나한테 묻더라고. 내일 작품은 다 그렸냐고."
"그래서?"
나는 라면 두 개와 한 움큼 떡을 넣으며 유나에게 물었다.
"다 그렸다고 대답하려다 문득 생각이 스쳤지. 아직 덜 그렸다고 말하면 오늘도 나는 당당하게 하룻밤 더, 외박을 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학교 가는 척하고 여기로 왔지."
아, 대단하다!
우리 유나가 이런 기특한 생각을 다 하다니.
역시 유나!
유나는 공정하다.
지난 며칠간 최선을 다해 도시락 내조를 했더니, 드디어 보상을 주려고 결심했구나.
하지만 너무 좋아하는 티는 내지 말자!
오늘은 따뜻한 남자 컨셉으로 달린다.
노련한 중년 회귀자는 입꼬리를 철저히 단속하며 끓고 있는 라면에 계란 두 개도 넣었다.
냉장고를 열었더니 포항에서 올라온 엄마표 김치와 제주도에서 올라온 유나네 김치가 둘 다 있었다.
'식탁에서 제주도 김치를 마주하면 유나가 부모님을 떠올리고, 갑자기 건전하고 모범적인 딸이 되고 싶어질지도 몰라.'
나는 포항에서 올라온 엄마표 김치를 꺼냈다.
김치 선정에도 중년 회귀자의 치밀함이 묻어났다.
이런 작은 사소함이 오늘의 이주원을 승자로 만든 것이다.
"라면에 한 잔 할래?"
"응."
산뜻하게 대답하며 식탁에 앉는 유나.
나는 습관적으로 캔맥주 두 개를 꺼냈다.
"라면에 맥주야?"
"아, 소주 줄까?"
"아니, 맥주 마실래. 그냥 줘."
라면에 맥주.
라맥.
전생에 나는 오랜 시간을 혼자 살았다.
그리고 퇴근하고 매일 먹던 음식이 바로 라맥이었다.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데 혼자 소주를 마시기엔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고된 일과를 마치고, 술 없이 잠들기도 힘들었고.
그래서 마시던 게 캔맥주.
안주로는 항상 라면을 끓였다.
다른 안주는 만들기도 귀찮고, 돈도 많이 들었으니까.
라면이 제일 부담이 없었다.
짭짤한 면발이 맥주와 제법 잘 어울렸다.
그렇게 먹으면 배도 부르고, 알딸딸하게 잠도 잘 오고.
살이 찌는 게 문제겠지만, 어차피 나를 봐줄 사람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오늘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맥주를 꺼낸 것이었다.
회귀한 지 꽤 됐지만, 가끔 이렇게 전생의 습관이 나올 때가 있었다.
그런데 유나가 맥주를 먹겠다고 하자, 약간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내 오래된 취미를 공유해 주는 느낌?'
유나는 작은 국그릇에 면발만 건져서 내게 하나를 주곤, 자기도 한 그릇 챙겼다.
그리고 한 젓가락 라면을 먹더니 시원하게 맥주도 들이켰다.
호로록. 키야.
"과제 끝나면 역시 맥주지! 과제 끝내고 먹는 맥주가 제일 맛있어!"
평가 5일을 남겨두고 새로 그림을 시작했으니, 지난 며칠 간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지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급하게 새로 그린대서 걱정했는데, 자신 있나 봐?"
"자신까지는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담았으니까, 깨져도 별 수 없겠다 싶어."
그게 자신감이지.
우린 면발도 먹고, 떡도 건져 먹으며 맥주를 마셨다.
전생에서는 정말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먹었던 라맥.
하지만 유나와 함께 먹으니 천상의 맛이 났다.
전생의 안 좋은 기억 하나를 또 지우는 기분.
어쩌면 이번 생은 지난 생의 나를 하나씩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닐까.
나는 부엌의 전기 등불을 끄고, 향초를 피웠다.
촛불이 흔들리고, 달콤한 꽃향기가 피어났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면발을 다 건져 먹고는 냉장고에 남아있던 분식집 사라다도 꺼냈다.
어두운 집안.
유나의 조용한 목소리가 무척 듣기 좋았다.
* * *
부엌을 대강 정리하는 동안, 유나가 먼저 씻었다.
그리고 나도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유나는 침대에서 벌써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뭐야, 잔뜩 기대하게 만들고는.
하긴 4일이나 밤을 새우다시피 했으니, 잠깐 낮잠 잔 것으론 부족했을 것이다.
더운 여름 밤.
유나에게 얇은 타올 담요를 덮어주고, 선풍기도 약하게 틀어서 편하게 자도록 온도도 맞췄다.
"주원아."
유나가 졸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어? 자는 거 아니었어?"
"이리 와. 옆에 와서 같이 누워."
내가 뭐 힘이 있나.
시키는 대로 해야지.
나는 유나 옆에 앉아서, 유나가 내게 기대도록 했다.
"그런데, 주원아. 내가 뭐 그렸는 지 알아?"
"뭘 그렸는데?"
"중학생 때, 미술학원 다니던 길을 그렸어."
유나의 그림을 보긴 했다.
너무 번화가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적당한 거리.
늦은 오후 바다 근처 마을의 회색 풍경.
유나의 색감에 무척 잘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있잖아. 어렸을 때, 그림을 그리는 게 힘들 때도 많았거든. 그런데 내가 그리겠다고 한 거라서 어디 가서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었어. 그럴 때마다 내가 혼자인 기분이 들었어."
"나한테는 뭐든 말해도 괜찮아."
"응."
유나가 가볍게 내 허리를 안았다.
"있잖아. 수업 마치면 곧바로 미술학원으로 갔었거든. 그럼 가는 길에 친구들이 모여서 노는 게 보였는데, 정말 부러웠어. 그림을 그리는 게 뭐라고, 나는 친구들과 맘껏 놀지도 못할까."
"외로웠겠다."
"어렸을 때도, 화가로 살아가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건 알았거든. 그래서 무서울 때도 많았어. 나는 과연 화가가 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상상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더 열심히 그렸어."
"잘 해냈잖아."
"응. 아직까진. 그런데 주원아."
"그래."
"네가 없었으면 힘들었을 거야. 네가 있어서 내가 어렸을 때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어. 이젠 혼자인 기분도 들지 않아. 모두 네 덕분이야. 고마워, 주원아."
나는 대답대신 유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음.
뭐라고 말해야 유나가 제일 감동을 받을까?
유나가 지금 내게 준 행복을 두 배로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동안 내게 기댄 유나가 너무 조용했다.
'이런, 이번엔 진짜 잠들었군.'
쩝.
'라면 먹고 바로 자면 얼굴 붓는다면서 유나를 흔들어 깨우자.'
내 안에서 악마 이주원이 유혹했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침대에서 살짝 빠져나와 침대 옆 소파의 스탠드를 켰다.
그리고 스케치북을 꺼내 잠든 유나를 스케치했다.
'오랜만에 소묘.'
사각사각.
연필 소묘를 그리다보면 마음이 진정되고, 머리가 맑아진다.
예전엔 유나의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릴 땐 항상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이젠 유나를 그리는 일이 당연한 내 권리처럼 여겨진다.
'유나도 이젠 동의할 걸.'
판화로 몇 번 성공적으로 유나를 찍었더니 이제 자신감도 붙었다.
'평생 이렇게 유나를 그리면서 살 수 있다면.'
유명한 화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대단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고 믿지도 않는다.
다만 내 일상을 바라보고 소중한 사람들을 그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너무 행복하고 또 충분할 것 같았다.
사각사각.
방안이 그리 밝지 않았지만, 유나를 그리기엔 충분했다.
조용한 여름밤.
듣기 좋은 숨소리, 연필소리.
두 번의 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한 밤 중 하나였다.
[ 뚜우. ]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 뚜우우우.]
노력치가 충분히 쌓이고, 내 영혼이 행복에 충만했을 때 노력상점이 레벨업한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 뚜우우우. 노력상점이 레벨4로 성장합니다.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상품이 추가 됩니다. ]
두근두근.
이번에는 또 어떤 사기템들이 추가될 것인가!
[ 아기와 함께 숲속 산책(3코인) : 아기와 아버지의 마음을 동시에 진정시켜 줍니다. 아기의 아토피와 비염을 예방해줍니다. ]
[기저귀 상태 감지(3코인) : 아기가 느끼는 기저귀의 상태를 아버지가 실시간으로 동일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예측 불가능한 기저귀의 상태 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아기 마사지(3코인) : 아기의 기분을 풀어주고, 성장을 촉진합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손끝으로 전합니다. 아기를 목욕시킬 때 동시에 사용하면 효과적입니다. 마사지가 끝나면 아기는 깊은 꿀잠을 잡니다. ]
[ 우는 아기 달래기 (2코인) :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로 상대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줍니다. 아기 마사지와 함께 사용할 수 있으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성인에게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이럴 수가!
촤르르륵.
새 상품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레벨 4인만큼 상품의 수도 많았다.
"만세! 만세!"
나는 그저 만세를 부를 뿐!
나는 언제나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지만, 노력상점 레벨4와 함께라면 나중에 결혼해서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노력상점의 배려는 언제나 감동 그 자체였다.
* * *
간밤의 흥분을 뒤로하고, 오늘도 없이 결전의 아침이 밝았다.
미술대 강당.
교수들의 자리가 앞에 마련되고, 이젤부터 스크린 등등 학생들의 작업을 전시할 수 있는 장비들도 전부 세워졌다.
그리고 서양화과 4학년 졸업반도 모두 모였다.
드디어 열리는 6월 졸전 평가.
4학년이 아니더라도 참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강당 뒤에는 2, 3학년 학생들도 몇 명 앉아 있었다.
'그리고 저 몇 명이 오늘 있었던 일을 전 학년에 소문내겠지.'
그러니 사실상 오늘 깨지면 서양화과 전체 앞에서 깨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늘 참석한 교수는 모두 8명.
한국대 교수들 6명과 짬밥이 쌓인 강사 두 명.
이준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직 교수들은 오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모두 자리에 앉았다.
하나같이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리고 교수들이 하나씩 와서 자리를 채웠다.
조교들이 교수들이 편하게 학생들을 박살낼 수 있도록 차와 과자도 가져왔다.
강영 교수가 학생들 앞에 서서 해맑게 외쳤다.
"자, 1학기 졸전 평가를 시작하겠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오늘 평가를 통해 자신의 현 상황을 점검하고, 여름 방학동안 더 좋은 작품을 만들도록 모두 힘쓰자."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두근두근.
진행 순서는 출석부의 역순으로.
일단 우리보다 학번이 높은 김대성이 스타트를 끊었다.
우리의 대성 병지.
그리고 첫 먹잇감을 마주한 여덟 명의 하이에나.
과연 결과는!
두두두두.
김대성의 작품은 그냥 그랬다.
그리고 여덟 명의 교수는 신나게 작품을 비판했다.
스타트라 아직 예열이 되진 않았지만, 교수들의 에너지는 넘쳐났다.
하지만 뜻밖에 의외로 당당한 김대성.
"하지만 저는 교수님들과 다르게 생각합니다!"
그는 또박또박 교수들의 공격에 강하게 대답했다.
'저 인간······1학년 때부터 교수들한테 하도 당해서 작품이 발전하는 대신 멘탈이 강해지고 말았어!'
당당한 김대성의 태도에 교수들도 조금씩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모든 광경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이준성.
'설마 그 동안의 욕설과 폭언이 전부 오늘을 위한 큰 그림이었단 말인가요? 알고 봤더니 이준성은 참스승이었어!'
그렇게 뜻밖의 스타트를 끊었다.
예상외의 선전을 펼친 김대성.
거기다 교수들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효과도 가져왔다.
강영 교수가 땀을 닦으며 외쳤다.
"자, 다음!"
다음 차례는 우리보다 학번이 빠른 수진 선배였다.
이제야 드디어 1차 평가의 본게임이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