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좀비 □
"앉게."
서춘일 교수는 교수실 중앙의 소파를 가리켰다.
다른 교수들은 교수실에 이젤도 있고, 캔버스도 있고, 도록들도 많이 쌓여 있다.
바쁘고 부지런한 미대교수에게 자연스러운 풍경.
사무실 자리도 비좁아서 대부분 소파 대신 교실 의자를 가져다 뒀다.
하지만 서춘일 교수의 교수실은 무척 넓고 깨끗했다.
그래서 소파까지.
'이 교수님은 수업뿐만 아니라 그림도 열심히 그리지는 않으시는 구나.'
너무 깨끗한 작업실에 나는 속으로 살짝 웃었다.
그래도 연륜이 있으시니까.
난 살짝 기대를 하며 본론을 꺼냈다.
"오늘 제게 어떤 일이 있었냐면은······"
"잠깐 기다리게."
"네?"
"뭐가 그리 성급한가? 차 한 잔 마시자고 온 게 아닌가? 아직 찻물 올리지도 않았는데."
그리고 서춘일 교수는 직접 전기 포트에 물을 담아서 코드 위에 얹었다.
보글보글.
천천히 물이 뜨거워지는 소리.
물은 느리게 끓었다.
서춘일 교수는 신기한 장난감을 보는 아이처럼 물이 끓는 전기포트를 관찰했다.
그리고 자기와 내 앞에 찻잔을 하나씩 놓았다.
모양도 다른 머그컵 두 개.
잔받침도 없었다.
"예전엔 나도 간편하니까 종이컵을 많이 썼거든. 그런데 죽을 날이 다가오니까 무섭더라고. 환경을 오염시킨 죄로 지옥에 가지 않을까. 그래서 머그컵으로 바꿨다네. 심지어 물을 아끼려고 설거지도 잘 안 해. 안심하게. 손님 잔은 깨끗하게 씻으니까."
"아, 네."
미대생이라서 나 역시 별로 깔끔 떠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춘일 교수가 괜히 그런 말을 해서, 나는 흘끔흘끔 내 잔의 바닥을 쳐다봤다.
그리고 서춘일 교수는 현미녹차 티백을 뜯어서 하나씩 머그컵 안에 집어넣었다.
그 과정을 즐기는 것 같아서 '제가 하겠습니다.'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너무 티백인데······'
서춘일 교수는 마치 다도를 즐기는 노인처럼 진지했지만, 찻잔 속의 티백은 구수한 맛의 싸구려 현미녹차였다.
"머그컵이 좋은 점이 또 하나 있다네. 잔이 같이 데워져서 천천히 식거든. 차를 마시는 건, 뜨거워진 차를 식혀서 먹는 재미도 있단 말이야. 차가 식는 시간을 앞의 사람과 같이 기다리는 거지. 그런데 종이컵은 너무 빨리 뜨거워졌다가, 또 금방 식으니까."
"그렇군요."
쪼르륵.
서춘일 교수는 우아하게 두 잔의 머그컵 안에 물을 따랐다.
"자, 편히 들게."
서춘일 교수가 인자한 목소리로 내게 차를 권했다.
그런데 안 그래도 편히 마실 생각이었다.
진지하게 마시기엔 너무 흔한 현미녹차라서.
그리고 들리는 소리.
후루루룩.
온갖 폼은 다 잡아놓고 서춘일 교수는 숭늉을 마시듯 소리를 내며 마셨다.
그리고 드디어 시작된 상담.
"그래, 한 번 말해 보게. 무슨 일이 있었나."
"실은 6월 평가에 내고 싶은 작품들을 윤성례 교수님께······"
거기까지 말했을 때 서춘일 교수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아, 그 양반. 올해도 시작했군."
"예, 제가 시작을 끊었습니다."
"이거 참. 또 내가 바빠지겠군."
아마도 선배들도 비슷했던 모양이다.
윤성례 교수에게 당하면 서춘일 교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일반적인 순서인 것 같았다.
나는 오늘의 상담 내용을 서춘일 교수에게 설명했다.
"그런데 저도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차를 마시니까 저도 머릿속이 정리되었다고 할까요? 아마도 윤성례 교수님의 지적이 옳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유나를 너무 그리고 싶어서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계획에 포함시켰던 것이 잘못인 것 같습니다."
나는 서춘일 교수에게 한유나가 내 여자 친구라는 것도 설명했다.
으음.
서춘일 교수는 잠시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자네들 몇 년 사귀었지?"
"네? 4년입니다."
"대단하군. 학교에 있어보니까 보통 CC들은 길어야 1, 2년이던데. 거기다 중간에 군대까지 있고. 자네 정말 대단하군. 비결이 뭔가? 대체 어떻게 기다리게 한 거지?"
"제가 공익이었습니다."
아······
서춘일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실은 나도 이제 은퇴하면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하거든. 그러니까 집사람한테 잘 보여야 한단 말이야. 그래서 비결이 궁금했다네. 그런데 공익이었군."
서춘일 교수는 살짝 실망한 표정이었다.
오늘 내가 참 여러 교수를 실망시키는 구나.
후루룩.
서춘일 교수는 한 번 더 차를 들이키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한 번 정리해보지. 자네는 여자 친구를 너무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앞뒤 가리지 않고 여자 친구를 그리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윤성례 교수가 굳이 그걸 그려야겠냐고 따졌다. 그 말인가?"
"네. 정확합니다."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인가? 어떻게 문제가 될 수 있지?"
"네?"
서춘일 교수가 너무 당당하게 되물어서 나는 잠깐 혼란에 빠졌다.
"자네 말 속에 답이 있지 않나. 여자 친구를 너무 그리고 싶어서 무작정 계획에 포함시켰다고."
"네, 그랬습니다."
"너무 그리고 싶으면 그리면 되지 않나?"
"네?"
"보통 우리가 서양화과에 다니는 이유는, 그리고 싶은 걸 그리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리고 싶으면 그리는 거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뭐 하러 신경 쓰나?"
아······
어찌 보면 합당한 말.
하지만 졸전을 앞두고 교수의 취향을 거스르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거기에 윤성례 교수처럼 파워가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더.
"하지만 윤성례 교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데······"
"똑똑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답답하군. 윤성례 교수가 졸업하나? 자네 졸전이지 않나? 자네가 그리고 싶으면 그려야지."
"그, 그렇군요. 그렇지만 교수님 조언을 어겼다가 음······"
말을 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
그냥 유나를 그리면 되는 구나.
한 번 밖에 없는 졸전.
윤성례 교수한테 욕을 좀 먹긴 하겠지만, 그게 뭐 대수라고.
대신 교수의 뜻을 거스르고 고집을 부리려면 정말 제대로 그려야 할 것이다.
'그래, 어차피 최선을 다 할 생각이었는데 뭐.'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서춘일 교수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싶을 때, 실컷 그려두게. 나중에 나만큼 오랫동안 집사람과 살다보면······"
서춘일 교수는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저는 몇 십 년이 지나도 계속 유나를 그리고 싶어 할 자신이 있습니다."
"흐흐흐흐."
인자하던 서춘일 교수가 잠깐 나를 비웃었다.
어쨌거나.
괜찮은 조언이었다.
"조언 감사합니다. 덕분에 조금 방향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뭐가 그렇게 급한가?"
"네?"
"차는 다 마시고 가게. 여러 사람들과 만나다보면 다 마시지도 않을 거면서, 그냥 허전하니까 차를 대령하거든. 그런데 그게 다 따지고 보면 환경오염이야. 이왕 차를 꺼냈으니 다 마시고 일어나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구수한 현미녹차를 줬으면서 서춘일 교수는 온갖 폼은 다 잡았다.
그리고 내게 한마디 물었다.
"윤성례 교수의 평가가 부정적인 게 신경 쓰이나?"
"네, 아무래도 저보다 훨씬 안목이 깊으신 분이니까요."
"그렇긴 해. 그래도 전략적으로 접근해야지."
"네?"
"윤성례 정도의 위치에 오르면 주위에 재능 있는 예술가도 많고, 아첨하고 받들어주는 사람들도 많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김용철 작가만 해도 이윤재와 잠깐 마주한 동안에 온갖 찬사를 다 들었다.
그러니 윤성례 교수는 더 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여간 해서는 윤성례 교수의 눈에 들기가 쉽지 않을 거야. 하지만 반대로 나간다면 어떨까? 윤성례 교수가 하지 말라는 걸 굳이 자네가 고집을 부린다면? 적어도 자네 이름을 기억은 하겠지. 윤성례 교수가 자네를 기억하는 것만으로 미대생으로는 대성공 아닌가?"
"그,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뭔가 응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살짝 싸움을 붙이는 것 같은······
그리고 또 생각해보면 옳은 말 같기도 했다.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지. 내가 젊었을 때 말이야. 나보다 한 십 몇 년 더 일찍 한국대 교수로 들어간 선배가 있었어."
서춘일 교수의 선배라면 지금은 꽤 원로일 것이다.
"지금 그 양반이 교수 은퇴하고, 자기 그림도 그리면서, 일주일에 두 번씩은 문화센터에서 그림 수업을 나간다네. 그러면 문화센터 할머니들이 쑥떡도 해주고, 사골 국물도 챙겨오고 그러거든. 그럼 그걸 나한테 자랑을 해. 자기가 이렇게 인기가 많다고."
"그, 그렇군요."
"뭐, 나도 은퇴하고 그런 자리를 알아봐야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 선배가 예전에 한국대 교수로 부임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야기야. 하루는 나한테 소주를 사주면서 이런 불평하는 거야. 자기 제자 중에 얼굴 시커먼 촌놈이 하나 있는데, 그림은 엉망으로 그리면서 고집은 억수로 세다고. 자기 주제도 모르고 왕처럼 까분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 놈 때문에 스트레스라고."
설마?
"그래. 맞아. 그 촌놈이 바로 김용철이야. 촌놈을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내 선배는 문화센터 할머니들이랑 놀면서 기뻐하고. 그 촌놈은 결국 진짜 왕이 되었지. 물론 문화센터 할머니들을 비하하는 건 아니야. 다들 좋은 분들이겠지. 요즘 진짜 쑥이 귀하거든. 사골도 직접 다리는 건 힘들다고. 내 말 알겠지?"
"네."
"교수는 믿고 의지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야. 맞서 싸워야 하는 존재지. 아, 물론 나 말고. 젊고 힘 좋은 강영이나 윤성례랑 싸우게. 아니면 아쉬운 대로 이준성이나. 난 이제 은퇴야."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차를 다 마셨다.
물론 윤성례 교수한테 개기고 유나를 그리는 일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방법을 찾아봐야지.
뭔가 큰 믿음은 안가지만, 그래도 내게는 무척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아니야. 차 한 잔 마시고 싶을 땐 언제든 찾아오게. 물론 너무 자주는 오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윤성례 교수의 의견에 따르는 것에 비해 일이 더 많아졌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마음은 오히려 후련했다.
나는 졸전에, 내게 할애된 공간에 꼭 유나를 걸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유나는 내게 평범한 여자 친구가 아니었다.
한 번의 삶을 실패하고 얻은 진정한 동반자였고, 두 번째 삶이 제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그때.
"끄어어어어."
어두운 미대 복도 끝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김태민이었다.
김태민이 넋이 나간 얼굴로 두 손을 앞으로 휘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멀쩡하던 김태민이 어째서 좀비가 된 것일까?
"태민아, 윤성례 교수님 상담 받은 거야?"
"끄어어어. (대충 방금 다녀왔다는 뜻.)"
"그리고 수진 누나를 그리겠다고 했고? 아마 고양이도 그리겠다고 했겠지?"
"으어어어. (대충 어떻게 알았냐는 뜻.)"
김태민은 괴로워하며 다시 한 번 손을 휘저었다.
음.
김태민이 조금 나사가 빠진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 동안 학교생활은 편하게 했다.
지난 4년간 학교 다니면서 그림 과제로 교수에게 까이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처음 까는 상대가 윤성례 교수였다니.'
너무 강적이었다.
덕분에 김태민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좀비가 된 것이다.
'다행이군. 실력 있는 김태민도 까였으니, 나도 너무 좌절하진 말자.'
김태민은 분명 내 절친이었지만, 솔직히 많이 위로가 되었다.
대신 빨리 정신 차리도록 뭐라도 먹여야겠다.
그리고 서춘일 교수의 상담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