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좀비 2 □
유나의 윤상례 교수 상담은 무난하게 넘어갔다.
상담 내내 냉소적이고 비웃는 태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정도면······'
그만하면 남들에 비해서는 훨씬 양호한 것이다.
"우이씨, 두고 보자."
물론 유나는 이를 갈았다.
유나 역시 김태민처럼 이제껏 과제로 무시당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열 받은 듯.
그리고 수진 선배는 뜻밖에 칭찬을 받았다.
수진 선배는 영화 각본처럼 그림에 지문을 적는 작업을 하겠다고 보고했다.
"흥미롭군. 대신 적어 넣는 글귀가 괜찮아야겠지. 단어 하나, 말투 하나로 다 망칠 수도 있으니까. 많이 고민하도록."
수진 선배를 통해서 윤성례 교수가 무작정 비난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론 더 많은 학생들이 좌절했다.
어쨌거나 영화와 졸전을 병행하느라 수진 선배도 많이 바쁠 텐데, 고비를 무사히 넘겨 다행이었다.
* * *
4학년이 되면 졸전을 준비하느라 힘든 것이다.
수업 자체는 널널해진다.
보통 4학년이 되기 전에는 학기당 3~4개의 실기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수업 당 3~4개의 과제를 했다.
하지만 4학년은 한 학기동안 6월 졸전 평가에 내기 위한 작품만 만들면 그만이다.
그러니 일단 과제의 양은 확실히 줄긴 했다.
오늘은 강영 교수의 수업이 있는 날.
"벌써 4월이다. 6월 초에 평가니까 이제 한 달 반 남은 거다. 모두 잘하고 있겠지?"
강영 교수가 활기차게 물었지만, 대답하는 소리는 없었다.
"그래, 나도 이해한다. 그래서 이번엔 너희들을 배려해서 몸풀기 용으로 쉬운 과제를 하나 내볼까 생각 중이다."
학생들을 배려하고 싶으면 과제를 내지 말아야지!
으아아아아!
강영 교수의 과제 발언에 학생들은 일제히 야유를 보냈다.
조금 전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극과 극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아랑곳 않는 강영 교수.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지만, 실상은 이준성이나 윤성례 못지않은 나쁜 교수였다.
역시 세상에 좋은 교수는 없는 것이다.
"자, 자. 내 말을 들어봐. 너무 졸전 작품에만 몰입하면 오히려 작품이 안 나올 수도 있으니까. 가끔 기분 전환용으로 주의를 돌려보는 것도 좋을 거야."
우우!
"그리고 이제 너희들도 졸업이잖아. 졸업하고 나면 과제를 할 일도 없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할 일도 없잖아.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우우우우!
우리도 이제 4학년.
무조건 복종하던 1학년과 달리, 교수에게 적극적으로 항의한다.
하지만 신참 교수 강영은 굳건했다.
"자, 너희들이 앞으로 어떤 예술가가 될지,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과제를 준비했다. 이번엔 각자 좋아하는 예술가의 삶을 조사하고 발표하도록 한다. 단!"
시큰둥.
지난 몇 년간 교수들이 말할 때마다 너무 호응해줬다.
이제는 당당하게 싫은 과제는 시큰둥으로 대응한다.
그나저나 예술가 조사, 발표라니 너무 평범한데?
지난 4년간 줄기차게 했던 과제다.
예전에 했던 과제 대강 가져와서 발표하면 되겠는데?
"단! 반드시 사실에 입각할 필요는 없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훌륭한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고 인격까지 훌륭하진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좋은 예술가일수록 더 이기적이고 더 비열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유명인들은 마치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세상에 파헤쳐진다. 그렇게 하면 세상 누구라도 시시하고 위선적일 것이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다."
확실히 그런 측면이 있었다.
유명한 화가들 중 상당수가 사생활에 문제가 있었다.
물론 문제가 있다는 말이 나쁜 뜻은 아니고, 현대 한국인의 윤리관에 부합되지 않을 수도 있단 뜻이다.
강영 교수가 말을 이어갔다.
"훌륭한 작품을 만들었던 예술가들을 그 사람의 사생활이나 혹은 몇 번의 그릇된 선택으로 좋아하지 않게 되는 것은 꽤 슬픈 일이다. 그래서 이번엔 너희들 마음대로 지어내는 거다. 너희들이 선택한 예술가의 인생 일부를 바꿔도 되고, 전부 고쳐도 된다. 아니면 아예 세상에 없던 사람을 창조해도 된다. 화가 A를 만들고 고흐의 그림을 A가 그린 것이라고 우겨도 된다. 그렇게 이번에는 너희들이 완전히 좋아할 수 있는 예술가 한 명을 가져와서 발표하는 거다."
아하.
하지만 시큰둥.
아무리 기발한 과제라도 과제가 없는 것보다는 못하다.
그래도 교수가 시키니까 해야지.
학생이 별 수 있나.
그렇게 또 한 번의 과제가 내려졌다.
이번엔 교수의 의도대로 설렁설렁 조사하고 설렁설렁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막상 해보니까 또 교수 말대로 재미있기도 했다.
요즈음 학교와 회사, 김용철 작가의 작업실만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모처럼 인터넷을 뒤지고, 노트북을 두드리니까 내가 대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두 번 째 대학생활.
'이 생활도 이제 7, 8 개월 후면 끝나는 구나.'
4월이 되고 생활이 많이 바뀌었다.
나야 노력상점도 있고, 중년남자의 노련함도 있다.
그래서 꾸준히 준비해왔기에 잘 적응했다.
유나는······
원래 꼼꼼하고 완벽한 성격.
그런데 윤성례 교수에게 무시당하곤 더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이제 장난칠 때 조금 조심해야 한다.
'조금 더 스릴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김태민.
드디어 대망의 교생실습을 시작했다.
다행히 남자 중학교였는데,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자기 집에서 가까워서 선택했겠지.'
김태민은 별 생각 없었겠지만, 사춘기 학생들 여러 명을 구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수진 선배는 영화 제작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아직 촬영이 들어가려면 한참 남았지만, 수진 선배는 연기 교정도 받고 영화사 출근도 부지런히 했다.
미리미리 졸전 작품도 만들면서 누구보다 바쁘게 지냈다.
'다들 이렇게 정말 어른이 되어가는 구나.'
느슨하게 지내오던 김태민과 수진 선배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면 느낌이 무척 새로웠다.
아무튼. 어쨌거나.
시간은 빠르게 흘러 드디어 강영 교수의 수업이 돌아왔다.
'거짓으로 작가 조사하기'.
혹은 '예술가의 삶 마음대로 편집하기.'
드디어 그 과제의 발표 날이 된 것이다.
마음 편히 하는 과제라고 시간도 많이 주지 않았었다.
* * *
"자, 누구부터 할래?"
내가 아마 사업가가 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회귀자의 책무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더라면 미대교수도 정말 괜찮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 미대교수가 제일 편한 직업 같아.'
그냥 좀 특이한 과제 하나 내주고, '누구부터 발표할래?' 이 말만 던지면 된다.
어쨌거나 몇몇이 발표를 했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서 프리젠테이션을 시작했다.
후우.
예전에 첫 과제를 발표할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내가 한국대 서양화과에 온 것도 꿈만 같은데, 학교생활도 꿈처럼 지나갔구나.
나는 강의실 앞줄에 앉아있는 유나와 한 번 눈을 맞췄다.
그리고 발표를 시작했다.
"제가 조사한 화가는 보나르입니다."
피에르 보나르.
프랑스 출신 화가.
사실 유나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이기도 했다.
나는 원래 보나르를 그냥 근사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보나르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름다운 색.
대상을 기억했다가 나중에 그리는 방식.
자신의 일상의 풍경을 그리는 모습들은 유나에게 영향도 많이 줬다.
특히 보나르는 일평생 아내를 돌보며 아내를 모델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순백의 동화 같은 사랑은 아니었다.
보나르의 아내 마르트는 결벽증과 강박증을 가진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보나르는 마르트와 동거하는 도중에 다른 젊은 여자와 약혼하고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보나르는 자신이 돌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마르트를 버릴 수 없었다.
결국 약혼녀와 헤어지고 마르트와 결혼했다.
그리고 보나르에게 버림받은 약혼녀는 자살해버린다.
그러니까 보나르가 그린 빛과 색으로 가득 찬 환상 같은 풍경은 사실 고통과 슬픔도 함께 담긴 역설적인 그림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더 아름다운 가봐."
유나는 보나르의 그림을 보며 내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피에르 보나르의 그림을 슬라이드로 넘기며 내가 조사한 가짜 삶을 발표했다.
"보나르는 변호사로 안정된 삶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2살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파리의 샴페인을 홍보하는 상업적인 포스터를 석판화로 그렸는데요. 지금 그 포스터는 로트렉의 포스터들과 함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포스터로 꼽히고 있습니다."
찰칵.
"보나르는 장례식용 꽃을 파는 가게에서 처음으로 마르트를 만납니다. 당시 마르트는 벌써 건강하지 않은, 창백한 여성이었습니다. 보나르는 병든 마르트에게서 오히려 신비로운 매력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믿지 못하는 마르트는 보나르를 처음 만난 날,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거짓으로 말해줍니다. 그리고 보나르는 나중에 삼십년이 지나서 혼인신고를 할 때야 비로소, 마르트의 본명을 알게 됩니다."
찰칵.
내가 자기의 최애 화가를 발표하자 유나가 빙긋 웃었다.
뭐, 이제는 내 최애 화가이기도 하니까.
이제부터 내가 지어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보나르는 마르트에게 말합니다. 당신을 정말 사랑하지만, 가능하면 더 오래 사랑하고 싶소. 앞으로 신선한 야채와 우유, 생선을 더 많이 먹고 꾸준하게 운동해줄 수 있겠소? 텃밭도 가꾸고, 오리와 닭과 강아지도 기르고. 그렇게 해준다면 나는 평생 당신을 모델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겠소. 그리고 마르트는 그날 이후 꾸준히 운동을 시작합니다."
찰칵.
"그리고 화가로서 명성을 얻은 보나르는 잠깐 젊은 모델을 고용하기도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르네 몽샤티. 몽샤티는 중년의 매력적인 보나르에게 반하지만, 보나르는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내게 사적인 감정을 가진다면 더는 함께 일할 수 없소.' 다행히 르네는 금방 젊고 건강한 새 애인이 생기고, 그 남자와 결혼해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찰칵.
"이후 보나르는 건강을 되찾은 마르트를 그리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보나르의 그림은 덜 슬프고 덜 신비로워졌고, 조금 덜 유명해졌지만, 그는 아무 상관없었습니다. 그리고 보나르는 죽을 때까지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제 발표는 여기까지입니다."
발표를 마칠 때 쯤, 강영 교수가 왜 이런 과제를 시켰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내 발표처럼 유나가 행복한 보나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어쨌거나.
내 발표 내내 유나도 많이 웃었고, 나도 만족했다.
유나가 웃었으면 됐지.
그리고 다음은 김태민.
"저는 에드워드 호퍼를 조사했습니다. 에드워드 호퍼는 먼저 일러스트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일을 싫어했지만, 무명의 화가였던 호퍼는 다른 선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미술학교에서 만난 조세핀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찰칵.
김태민의 선택은 에드워드 호퍼였다.
"조세핀은 그녀 자신도 재능 있는 화가였지만, 남편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화가로서 먼저 주목받은 것은 조세핀이었지만, 큐레이터들에게 적극적으로 남편을 알리고, 또 남편이 그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열심히 내조했습니다. 호퍼 역시 아내의 헌신에 응답하듯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노년에 둘은 같은 병원에 입원해서 매일 서로를 찾아갈 만큼 변함없이 사랑했습니다."
찰칵.
"호퍼가 죽고, 조세핀은 2천점이 넘는 호퍼의 작품을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열 달 후에 그녀도 죽었습니다. 호퍼는 지금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이고, 또 가장 행복했던 미국인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김태민의 발표가 끝났다.
어라? 뭔가 좀 이상한데.
아니나 다를까.
강영 교수가 김태민에게 따졌다.
"그런데 어디를 바꾼 거지?"
긁적긁적.
김태민이 수줍게 대답했다.
"안 바꿨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가 너무 좋아서요."
피식.
강영 교수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가끔은 지어낸 이야기보다 현실이 더 아름답기도 하지."
김태민스런 발표였다.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김태민과 나.
서양화과의 훈남 2인조.
서양화과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
그리고 똑같이 여자 친구를 그리겠다고 했다가 윤성례 교수에게 까인 서양화과 사랑꾼의 양대 산맥.
이번에도 둘이 똑같이 화가의 사랑을 다룬 것이었다.
그래서 과연 우리 둘은 마녀 윤성례를 무찌르고 졸전에 여자 친구를 걸 수 있을 것인가?
"자, 다음은 누구지?"
"제가 하겠습니다!"
수진 선배가 모처럼 씩씩하게 나섰다.
그리고 시작된 발표.
"저는 화가가 아닌 영화배우 캐서린 햅번을 조사했습니다. 알고 보니 무척 근사한 분이라서요. 그래서 그 분의 삶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영화 같은 삶을 산 배우라서 실은 저도 사실만 가져왔습니다!"
"상관없어. 어차피 자기가 완벽하게 좋아하는 예술가를 만들면 되니까. 계속해 봐."
강영 교수의 응원에 수진 선배가 야무지게 발표를 이어갔다.
"캐서린 햅번은 여배우가 영화를 위한 예쁜 소품으로 쓰이던 시절, 당당하게 자신만의 연기를 찾아낸 최고의 배우였습니다."
수진 선배는 지금 미술과 영화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래서 더 여배우의 삶을 열심히 조사한 것 같았다.
영화배우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나와 김태민도 마찬가지.
우리는 집중해서 선배의 발표를 들었다.
"캐서린 햅번은 연기에서도 최고였지만, 영화 외의 삶에서도 파격적이고, 또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배울게 많고 또 닮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최고의 배우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면서도, 세상의 관습에는 얽매이지 않았는데요. 재벌과 사귀기도 했고, 남편이 있는 상황에서 다른 유부남과 무려 25년간이나 변치 않는 사랑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였다.
끄어어어어.
내 옆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엇. 태민아.'
캐서린 햅번을 닮고 싶다는 수진 선배.
그리고 선배가 들려주는 파격적인 사랑이야기.
윤성례 교수에게 받은 충격도 아직 벗어나지 못했는데.
김태민은 다시 충격을 받고 좀비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