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최강 크로스 □
"아, 맞다. 너희들 조소과 개강파티 올 거지? 꼭 가야해. 다른 과 부전공도 전부 오기로 했어."
덩치가 쩌렁쩌렁 좁은 강의실에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수진 선배가 산뜻하게 답했다.
"내일이라고 했죠? 남친한테 물어보고요."
"뭐야? 연하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남친한테 다 허락받아야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요. 집이 같은 방향이라 남친이 태워 주거든요."
"에이. 집은 택시 타면 되지. 아니면 차 있는 놈들이 대리 불러서 다 데려다 준다고. 우리 조소과는 의리가 있거든."
원래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 수진 선배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슬쩍.
옆의 김태민을 쳐다보니 이마에 힘줄이 서는 것 같았다.
순둥이 김태민이 이 정도면 정말 열 받은 것이다.
"유나, 너는? 너도 올 거지?"
"전 알바 때문에요."
"에이, 매일 하는 개강 파티도 아니고. 조소과는 서양화과랑 달라. 개강 파티는 필참이야."
"그런데 제가 알바를 빠지면 남친이 혼자서 일을 다 해야 하거든요."
유나는 마치 자기가 평범한 알바를 하는 것처럼 소박하게 대답했다.
"얘도 남친 타령이네. 그런데 너희들 잘 생각해. CC는 그게 문제야. 특히 여학생들은 남친한테 올인하면 나중에 동기도 없고, 추억도 없어.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러다 헤어지면 결국 아무것도 안 남는 거야. 하지만 선후배는 평생 가지. CC도 좋지만, 학교생활은 균형을 잘 찾아야 해."
"하긴 그렇겠네요."
유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 표정은······'
나야 유나의 지금 표정이나 말투가 상대를 아예 깨끗이 무시해버릴 때 습관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덩치는 자기가 마치 멋진 조언을 건넨 선배마냥 뿌듯해 했다.
빠지직.
이제 내 머리에도 힘줄이 섰다.
마치 걱정해주듯 말하는 이야기.
언뜻 맞는 말 같기도 한데, 열 받는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내가 함부로 나서면 유나가 더 난처해질 것 같았다.
'하긴 유나도 힘들긴 하겠다.'
덩치의 말대로 조소과는 확실히 서양화과랑 많이 달랐다.
서양화과는 철저한 개인플레이.
하지만 조소과는 어느 정도 팀플레이가 필수였다.
용접부터 석고, 약품 다루기 등등.
실무적인 다양한 기술들은 거의 선배한테 배운다.
교수들이 세세하게 모든 학생을 붙잡고 가르쳐주진 않는다.
특히 그런 기술들은 위험한 것도 있어서 정신 바짝 차리고, 선배한테 잘 배워야 한다.
'그리고 부피가 큰 작업도 많으니까.'
인체 석고 뜨기, 작품 옮기기 등은 절대 혼자서는 할 수 없다.
게다가 졸업 후에도 규모가 있는 작업은 선후배가 동원 되는 것이 예사.
그래서 조소과는 살짝 군기도 있고, 선후배 관계도 돈독하다.
'유나랑 수진 선배도 제대로 조소과 수업을 따라가려면······'
두 사람이 조소과 모임에 참여하고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도 꼭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려면 저 덩치와 멸치에게도 적당히 맞춰주긴 해야겠지.
서양화과 수업도 도와줘야 할 테고.
'다만 그렇게 머리로는 생각하는데······'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저 놈들······
[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지만, 남친이랑 헤어지면 ]
우리의 이별을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덜컹.
그때 문이 열리고, 이준성 교수가 들어왔다.
"우하하하하. 반갑다, 이 놈들아. 이번 수업은 특히 아는 얼굴들이 많구나."
오랜만에 듣는 걸걸한 목소리.
"혹시 너희들 변태냐? 욕먹는 걸 즐기는 거냐? 아니면 졸업할 때까지 나를 피해 다니는 것을 포기한 거냐? 각오는 됐겠지? 한 번 보자. 모르는 놈도 많구나. 하지만 나는 모르는 놈들에게도 공평히 욕을 선사하지. 우하하하."
소문에 따르면 강영한테 조교수 선발에서 밀리고 꽤 좌절했다던데.
직접 보니 좌절의 슬픔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너희들도 3학년이 되었구나. 내년이면 졸전이겠지. 입시 미술에 찌들었던 한심한 1학년들을 기저귀 갈아주며 가르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정말 빠르구나."
이준성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며 혼자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어이, 당신이 무슨 우리 기저귀를 갈아 줘. 그냥 욕 밖에 안했잖아.'
[ 어이, 거기 아기들. 일어나, 걸으란 말이다! 기저귀 갈아입는다! 실시! ]
이준성은 욕을 했고, 기저귀는 우리 스스로 갈아입었다.
아무튼.
"사실 나도 3학년 수업이 더 편하다. 이제는 일일이 설명 안 해줘도 말이 통하니까. 그리고 욕을 하는 맛도 더 좋지. 3학년 쯤 되면 어설프게 작가 흉내를 내거든? 그런 놈들을 밟아주면 더 짜릿하단 말이다."
변태는 우리가 아니라 이준성인 것이 확실했다.
"똑같이 한심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3학년 2학기는 의미가 있다. 졸전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학기지. 이번 학기가 끝나면 이제 너희들은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말이다."
콰앙!
나왔다.
이준성 특기, 교탁 두드리기.
"이번 학기는 너희들이 직접 과제를 낸다. 그리고 직접 평가를 내린다!"
무슨 꿍꿍이냐, 이준성.
그럼 당신은 가만히 앉아서 욕만 하겠다고?
"4학년의 연습이라고 생각해라. 너희들이 직접 하고 싶었던 작업. 너희들한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작업을 강의실 전체에 과제로 내는 것이다. 그럼 다른 놈들은 어떻게 풀어 가는지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겠지. 그리고 다른 놈의 작업을 평가하다보면 교수의 시선에서 작업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4학년의 졸전 준비에도 도움이 되겠지."
으음.
듣고 보니 일리 있는 이야기.
확실히 이준성은 욕만 적당히 자제하면 괜찮은 교수였다.
"자, 한 번 보자. 모두 열두 놈이군. 한 학기에 열 두 개의 과제는 너무 많지. 좋다. 이렇게 하자. 지금 당장 두 놈씩 팀을 짜라. 이번 학기는 6개의 팀, 6개의 과제로 달린다. 마침 적당하군. 팀을 짠다. 헤쳐 모여, 실시!"
한 학기 내내 2인 1조 팀플레이?
그렇다면 당연히 내 팀은 유나지.
나는 조금 떨어져 앉은 유나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
덥석.
누군가 내 손목을 잡았다.
김태민이었다.
"응?"
그리고 김태민이 비장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랑 팀을 짜자."
그리고 눈빛으로 전해지는 김태민 내면의 목소리.
[ 저놈들 짓밟아 버리자. ]
거절할 수 없는 제안.
끄덕.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도 눈빛으로 대답해줬다.
[ 전부 갈아버리자. ]
재능의 김태민.
노련함의 이주원.
김태민과 내가 팀을 이룬다면 우린 두려울 게 없다.
한국대 서양화과 역사상 최강의 조합.
서양화과의 폭주 도살자.
크리틱의 인간 믹서기.
우리를 가로 막는 놈들은 형체도 없이 짓이겨버릴 것이다.
김태민, 이주원 최강 크로스!
자리에서 일어나던 내가 다시 앉는 걸 보고 유나가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그러자 덩치가 유나에게 말했다.
"유나야, 수진아. 너희들은 조 어떻게 짜?"
"저야 당연히 수진 언니랑 한 편이죠."
"아, 우영이랑 한 팀 먹기 싫은데. 하는 수 없네."
그렇게 한유나, 이수진 팀 탄생!
조소과 덩치, 멸치 팀도 탄생!
그때 옆에서 이정원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앙! 오빠가 셋이나 있었는데, 하필 대성 오빠랑 한 조라니!"
"내, 내가 뭐 어때서!"
잠시 후.
"역시 3학년은 빠릿빠릿하군. 조는 이제 다 짰지?"
이준성은 6조의 명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반장!"
"넵!"
김대성이 아무 의논도 없이, 그냥 반장으로 지목 당했다.
"네가 반장이니까, 다음 주, 첫 과제를 생각해 와라."
"넵, 알겠습니다."
대답만은 언제나 시원시원한 김대성.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다!"
* * *
그날 밤.
요즘은 쇼핑몰 일이 일찍 끝난다.
그리고 원 디자인 일에서는 내가 손을 뗀 지가 꽤 되었다.
나는 한 달에 한두 번 원디자인 사무실에 출근해서 서명만 하는 게 전부다.
그래도 한 달에 1~2천씩 원디자인에서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온다.
심지어 그 월급도 원디자인 예산과 직원 복지를 후하게 치르고도 남는 돈이었다.
게다가 그 1~2천도 하이 유나에서 내가 버는 돈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조용했다.
수진 선배가 쇼핑몰 일을 줄이니 김태민도 자연스레 출근하지 않게 되었다.
'이 녀석, 처음부터 수진 선배가 목적이었을까?'
순진한 김태민도 결국 알고 보면 남자였던 것이다.
유현이는 한창 대학에서 재미있게 놀 때라 가끔 주말에나 찾아온다.
키도 크고, 서글서글하게 잘생겨서 인기도 많은 모양이다.
아무튼.
그래서 혼자 남은 나는 스케치북을 꺼냈다.
'시간의 시각화' 과제를 위해서였다.
나는 항상 유화를 그리기 전에 스케치북에 먼저 그려본다.
'시간을 표현하라고······'
원래 과제가 주어지면 항상 늦게까지 치열하게 고민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게 결정했다.
수업시간에 본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었다.
'자화상을 그리자.'
지금의 젊은 내 모습이 아니라, 회귀하기 전 중년의 내 모습.
이제까지는 적당히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지난 생의 나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살짝 얼굴만 그려보자.
지금의 내게 시간이 더해진 나이든 모습.
사각사각.
딱히 사진도 필요 없었다.
'하긴 사진도 없지.'
매일 면도하며 보던 지친 내 얼굴.
'어느 샌가 하얀 수염이 자라고 있었지.'
퇴근하고 세수를 해도 낮 동안 묻은 피로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얼굴이 쳐지고, 주름이 깊어졌다.
사각사각.
그림을 그리다 보니 점점 더 기억이 선명해지고, 욕심이 났다.
그래서 기억 속 얼굴을 더 세밀하게 묘사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띵동.
응?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빌라의 문을 열었다.
유나였다.
하긴 이 시간에 연락도 없이 집에 올 사람은 유나 밖에 없지.
유나는 손에 접시를 들고 있었다.
"유미랑 심심해서 해물파전 만들었어. 만드는 김에 네 것도 만들었어. 식기 전에 먹어."
"어서 들어와."
유나는 나를 따라 들어와서 거실 탁자에 파전 접시를 내려놓았다.
"막걸리는 없고, 소주랑 맥주 밖에 없는데, 한 잔 할래?"
"유미가 기다리고 있어서 안 돼. 그리고 나 내일 아침 수업이야."
내가 부엌에서 젓가락을 챙기는 동안, 유나는 내 스케치북을 봤다.
"그림 그리고 있었던 거야?"
"강영 교수 과제. 시간에 관한 작품을 만들어 오래."
"자화상이야?"
"응. 아마 한 30년 후의 내 모습?"
유나는 한참 내 그림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내 얼굴과 번갈아가며 살펴봤다.
"왜 이렇게 우울하게 그렸어? 너무 피곤하고 불쌍해 보인다."
"그래?"
확실히 내 실력이 늘긴 했나 보다.
그런데 이 자화상은 내 지난 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린 것일 뿐이었다.
유나에게 그렇게 보였다니.
슬프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응?"
"네가 이렇게 외롭고 불쌍하게 지내도록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그 말은?"
"아니, 꼭 그런 뜻은 아니고."
나는 막 파전을 먹으려고 거실 탁자 앞에 앉은 참이었다.
'하지만 뜻밖에 갑자기 분위기가 좋군.'
나는 유나의 손을 붙잡고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유나를 내 다리 위에 앉혔다.
"실은 나 지금도 좀 피곤하고 외로운 것 같아. 네가 날 위해 뭔가를 해주면 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 같아."
"그래? 내가 뭘 해주면 되는데?"
유나가 살짝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난 유나의 귓가에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를 한 번만 오빠라고 불러 봐."
촤아악!
공기를 가르는 소리!
하지만 이미 사귄 지 3년.
한유나의 공격 패턴은 나의 예상 범위 안에 있다.
타악!
나는 공중에서 유나의 주먹을 붙잡았다.
공격이 봉쇄되자 유나는 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 품에서 일어나 외쳤다.
"우이씨. 이주원, 웃기지마! 내가 널 오빠라고 부르는 일은 평생 절대 없을 거다!"
오빠라고 한 번 불러주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거칠게 반응하다니.
하지만 유나의 성격을 고려해볼 때,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안 되면 말고 식으로 한 번 찔러본 것일 뿐.
"파전 다 먹고 설거지해서 접시 반납해!"
콰앙.
유나는 문을 닫고 가버렸다.
앙칼지군.
하지만 상대가 강하게 저항하면 굴복시키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
'한유나. 절대라는 말은 결코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가르쳐주지.'
후후후.
나는 질겅질겅 파전을 씹으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파전은 바삭바삭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