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휴지 □
아직 학기 초.
그래도 3학년 작업실은 슬슬 바쁘다.
이제는 과제가 아니더라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들 그린다.
그래서 난 일부러 좀 늦은 시간에 작업실에 나가곤 했다.
'역시 작업실은 혼자 써야 제 맛이지.'
밤은 노력하는 화가의 시간.
오늘 실컷 그림 그려야지.
라디오도 마음대로 틀고.
스케치북을 꺼내 옆에 두고, 캔버스에 젯소를 발랐다.
젯소는 마르면 다시 바르고, 마르면 다시 바르고 몇 번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영문학과 과제도 같이 챙겨왔다.
'오랜만에 진짜 학생이 된 기분이군.'
직장인의 입장에서 보면 솔직히 공부는 재미있다.
그렇게 작업실 구석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드르륵.
작업실의 문이 열렸다.
'제길. 누구지?'
공용 작업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방해받는 기분이 들었다.
"대성이 형?"
고개를 들어보니 김대성이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랐다.
가진 것 없어도 항상 즐겁고.
남들을 당황시키면서도 언제나 당당하던 상남자 김대성.
하지만 오늘의 김대성은 마치 내 그림 속 이주원처럼 피곤하고 초췌해보였다.
"주원아······"
그리고 쉰 목소리로 힘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김대성이 너무 힘들어보여서, 방해받는 기분도 사라졌다.
"대성이 형. 이 시간에 여기 웬일이세요? 형은 B반 작업실 쓰잖아요."
"응. A반 작업실에 불이 켜져 있길래 혹시 넌가 싶어서 찾아왔어. 평소에 가장 늦게까지 작업실에 남아있는 사람이 바로 이주원, 너잖아."
일부러 나를 찾아왔다고?
이런 초췌한 얼굴로?
"형, 무슨 일 있어요?"
"그게······시간의 시각화 과제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고 김대성은 고개를 숙였다.
"형. 시간의 시각화는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요. 천천히 고민하면 되지, 왜 미리 걱정하세요. 이제 3학년인데, 우리가 과제 한 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내 위로에도 김대성의 표정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그, 그게 사실은 진만이랑 상미 때문이야."
진만이라면 임진만.
바로 조소과 덩치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상미라면 김대성과 학원 동기라는 N수생 후배.
그렇지 않아도 뭔가 수상한 분위기는 눈치 채고 있었다.
대체 그들과 김대성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제 그 비밀이 밝혀질 것인가?
"형, 일단 앉아요. 커피라도 한 잔 할래요?"
"아니, 커피는 괜찮아. 안 그래도 요즘 잠을 못 자는데 커피까지 마시면 난 죽을지도 몰라."
그 정도라고?
요새는 김대성과 나는 트러블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살짝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도 뭐 좀 마셔요."
나는 복도 건너편의 자판기에서 코코아를 뽑아 김대성에게 건넸다.
"역시 나를 챙겨주는 건 주원이 너 밖에 없구나."
으음...
괜히 챙겨줬나?
딱히 김대성의 특별한 1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형, 그냥 털어놔요. 말하고 나면 후련해질 거예요."
"그래. 안 그래도 상담 받고 싶어서 널 찾아온 거야. 그런데 꽤 긴 이야기야."
어차피 젯소는 천천히 마르고 밤은 길다.
나는 김대성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대성이 잔잔히 오래 전의 이야기를 읊었다.
"꽤 오래 전 이야기지. 내가 고등학생 시절로 거슬러가. 난 원래 평범한 모범생이었어. 전부 어중간했지. 그런데 고 1 개학하자마자, 미술선생님한테 칭찬을 받은 거야. 재능이 있다고."
으음.
사실 미대생들은 다 재능은 있다.
미대에서도 그림 잘 그리는 녀석, 못 그리는 녀석, 그렇게 실력으로 서열이 나뉜다.
하지만 그 서열 최하위도 입시를 시작하기 전에는 모두 자기 반, 자기 학교에서 그림으로 날리던 사람들이었다.
김대성 역시 지금은 무시당하지만, 한때는 그림 신동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칭찬을 듣고 정말 날아갈 듯 기뻤지. 그리고 엄마를 졸라서 미술학원에 등록했어. 알잖아? 미술 학원비 비싼 거. 우리 부모님도 날 위해서 큰 투자를 하신 거야. 내 내신도 나쁘지 않았으니까, 난 한국대 반에 편성되었어. 만약 일반 인문계라면 한국대를 꿈도 못 꾸는 점수였지. 그런데 내가 한국대반이라니. 인생이 완전 달라진 기분이었어."
"그랬군요."
"열심히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했지. 그리고 한국대반에서 상미와 진만이를 만난 거야. 상미는 지금도 예쁘지만 그때도 예뻤지."
"그, 그랬군요."
사실 윤상미는 화장이 너무 진해서 별 느낌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유나와 사귀다보니 터무니없이 눈이 높아진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대성이 너무 애잔하게 말해서 나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미는 모두에게 친절했어. 난 세상모르는 순진한 꼬마였고. 그래서 상미한테 반해버린 거야. 남자 학교에만 다니던 모범생이 사랑에 빠졌지."
모범생이라······
아무튼.
"그, 그랬군요."
지금의 김대성과 이미지가 너무 달라서 맞장구치는 것도 조금 고역이었다.
"그래서 형이 고백했나요?"
"아니, 차라리 고백하고 시원하게 차이기라도 했으면 괜찮았을 지도 몰라."
"차이는 것보다 더 안 좋은 일을 겪었던 겁니까?"
내 질문에 김대성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난 상미를 좋아했지만, 상미한테 말할 순 없었어. 고 1 이후 내 그림 실력은 제자리였어. 한국대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지. 고 3이 되었을 때, 내가 한국대에 붙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학원에 아무도 없었을 거야. 나도 안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어. 벌써 2년이나 부모님이 비싼 학원비를 내주셨으니까. 그런 내게 연애는 꿈도 못 꿀 일이었어."
입시 이야기와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나도 같이 마음이 뜨거워졌다.
"힘들었겠군요."
"맞아. 정말 그랬지. 그런데 사귀면 안 된다고 생각했더니 마음이 점점 더 간절해지는 거야."
"원래 감정이 그런 거죠."
"그리고 입시가 다가올수록 한국대 반은 점점 날카로워졌지. 알잖아? 한 학원에 한국대반이 이삼십 명이 있어도 그 중에 합격하는 사람은 하나 있을까 말까니까. 모두가 예민해지지. 그리고 그만큼 내 마음도 뜨거워졌어."
그리고 김대성은 코코아를 한모금 마시고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날, 그 일이 생긴 거야."
"무슨 일이 생긴 거죠?"
"고 3겨울이었어. 수능도 끝나고 우린 막판 스퍼트를 달리고 있었지. 상미는 감기에 걸렸어. 코를 훌쩍이면서도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지. 난 그런 상미를 보면서 내가 대신 아파줄 수 있다면, 그런 생각도 했어."
으으.
입시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사랑의 열병을 앓다니.
대체 김대성은 어떻게 합격한 걸까?
어찌 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날도 수업이 끝났지. 밤 11시가 넘었으니 모두 자기 자리를 서둘러 치웠어. 일찍 집에 가고 싶으니까. 그런데 상미가 떠난 자리에 휴지가 떨어져 있는 거야. 저녁 내내 코를 풀던 그 휴지들 중 하나였을 거야. 처음엔 정말 순수한 생각으로 상미대신 그 휴지를 주워서 버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
처음엔 그랬다고?
"그럼 그 휴지를 주워서 버리지 않았단 말인가요?"
"그, 그게······나도 모르게 쓰레기통 대신 내 주머니에 넣고 말았어."
"상미 누나가 코를 푼 휴지를 형 주머니에 챙겼다고요?"
"아니! 그, 그렇게 더러운 휴지는 아니었어! 그냥 맑은 콧물만 닦은 비교적 깨끗한 휴지였어! 그리고 집에 가자마자 곧바로 버렸어!"
자세히 설명할수록 김대성이 더 이상하게 보였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정말 내가 미쳤었나봐. 입시가 다가와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 상미를 좋아해서 그랬는지······ 크윽."
그래, 내가 이해를 하자.
김대성이 상식 밖의 행동을 한 게 처음도 아니다.
어쩌면 김대성이야 말로 진짜 예술가일지도 모른다.
예술가는 원래 살짝 미친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설마 그걸 들킨 건가요?"
"아니야. 난 그렇게 허술하진 않았어."
남이 버린 휴지를 챙긴 주제에 허술하진 않았다고?
"그날 밤. 집에 가서 나도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어. 내가 왜 그랬을까. 나도 많이 반성했어. 상미한테도 미안하고. 난 누굴 좋아하는 게 처음이라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던 거야."
첫사랑을 할 때 사람들이 확실히 미치긴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코 푼 휴지를 훔치는 것은 아니다.
이제 김대성을 이해하는 것은 포기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결말은 궁금했다.
"그때 진만이는 학원에서 나랑 제일 친한 친구였어."
"정말요?"
"응. 그땐 진만이가 지금처럼 키도 크지 않고, 홀쭉했어. 그 자식 한국대 입학하고 나서 키 큰 거야."
"그래서요?"
"난 진만이에게 내가 상미가 코 푼 휴지를 집에 가져간 걸 이야기했어. 내가 그만큼 상미를 좋아한다고. 지금은 고백할 수 없지만, 한국대 합격하면 그땐 말해보겠다고.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았거든."
하긴 그럴 때가 있지.
나도 유나와 사귀기 전, 아무나 붙잡고 내가 유나를 좋아한다고, 유나 정말 예쁘지 않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적이 있었다.
'난 운이 정말 좋았어.'
유나가 내게 기회를 많이 줬다.
그리고 우린 사귀기 전부터 정말 친했다.
그래서 나는 김대성 같은 마음고생은 하지 않았다.
문득 유나가 고맙게 느껴졌다.
물론 고마운 것과 오빠는 별개다.
"진만이에게 털어놓으니까 후련했어. 다시 의욕이 차올랐지. 그리고 다음 날 학원에 가기 전 잠깐 컴퓨터를 켰는데······"
"켰는데?"
"학원 친구들 네이트온 인사말이 싹 다 바뀌어 있는 거야."
"어떻게요?"
"코 팽팽, 코 팡팡, 코 펑펑, 콧물 찍, 코 훌쩍, 코 후루룩······. 그런 식으로. 한국대 반 전부가 별명이 바뀌어 있었어."
"임진만이 소문낸 거예요?"
김대성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시가 코앞이라 학원을 옮길 수도 없었어. 당연히 난 신나게 놀림 당했어. 여학생들은 날 벌레 보듯 했고.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거야. 내가 한국대 서양화과에 붙어버린 거지! 정말 기적이었어. 우리 엄마 아빠는 좋아서 울고, 난 좋으면서도 비참해서 울고. 아무튼 복잡했지."
"형, 좋게 생각해요. 형이 결국 이긴 거예요. 물론 남의 휴지를 챙긴 것은 이상했지만, 그래도 형을 놀린 사람들한테는 합격이 최고의 복수니까요."
"나도 그런 줄 알았어. 한국대에 와서 새출발하면 될 줄 알았지. 그런데 진만이도 조소과에 붙은 거야."
"설마?"
"맞아. 진만이가 원래 주목받고 싶어하는 성격이거든. 그 자식이 연합엠티에서 내 휴지 이야기를 터뜨려 버린 거야. 나랑 같은 학번은 모두 그 이야기를 알게 된 거지. 그래서 난 결국 군대로 도피했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제야 김대성이 일찍 군대를 간 진짜 이유가 밝혀졌다.
"군대까지 갔다오면 진만이랑 엮일 일이 없을 줄 알았어. 그런데 이번에는 상미가 4수를 해서 서양화과에 들어온 거야."
"으악. 정말 끔직하군요."
"그래. 그래서 상미랑 마주치지 않으려고 디자인과 복수 전공을 신청했어."
"그랬군요. 난 형이 디자인에 뜻을 품고, 새사람이 돼서 열심히 공부를 시작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상미 누나를 피해서 간 거였군요."
참고로 내 생각에 모든 미대 중에 제일 힘든 전공이 디자인과 인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군대도 가고, 복수 전공까지 했는데. 이번엔 상미랑 진만이가 둘이서 같이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주원아, 코 푼 휴지는 내가 미쳤던 게 맞아. 정말 잘못한 거지. 하지만 이젠 잊혀지고 싶어. 그 휴지도 그냥 얼떨결에 집에 가져간 거야. 정말 다른 이유는 절대 없었어! 집에 가자마자 정말 곧바로 버렸어! 그렇지 않아도 난 그림에 자신이 없었는데, 진만이랑 상미까지 나타나니까 이제는 도저히 과제를 시작할 수가 없어."
김대성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나 역시 상조에게 놀림당하며 지난 인생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물론 지금도 코 푼 휴지를 왜 챙겼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김대성의 인생이 나와 같은 수렁에 빠지는 것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형, 오히려 이건 기회인지도 몰라요."
"응?"
"임진만과 마주 볼 기회요. 언제까지 코 푼 휴지에서 도망칠 순 없어요. 형은 이제 코 푼 휴지를 극복해야 해요. 이 기회에 실력으로 임진만과 정면 승부를 하는 겁니다. 상미 누나한테도요. 코 푼 휴지를 가져간 변태가 아니라, 그건 정말 실수였다고. 그리고 지금은 제대로 된 예술가가 되었다고 인정받는 겁니다."
"상미가 나를 변태로 생각하고 있을까?"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런데 내가 실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어떡하지? 상미가 4수로 합격하긴 했지만 그림은 정말 잘 그린단 말이야. 진만이도 실력이 상당해."
"그래서요? 또 도망칠 겁니까? 강영 교수의 수업을 철회할 겁니까? 서양화과 졸전도 미루고요? 형은 대성병지에요. 공만 잡으면 일단 달리고 보던 그 용감한 김대성은 어디로 간 겁니까?"
난 이제 더 이상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지금 김대성에게 하는 말은 예전의 나에게 해주고 싶던 바로 그 말이었다.
"형 도망치면 안 돼요. 한 번 도망치면 평생 도망쳐야 해요."
"내가 할 수 있을까?"
"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한 번, 나랑 같이 해봐요."
크윽.
김대성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고마워, 주원아. 역시 너 밖에 없어."
김대성은 결국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오래 울진 않았다.
"그런데 시간의 시각화는 어떡하지? 어설프게 그렸다간 오히려 놀림 당할지도 몰라. 그래서 너무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그리겠어."
으음.
확실히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이젤 앞에 앉아서,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일이다.
지금의 불안정한 내면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김대성에게 굉장히 가혹한 일일 것이다.
"형,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떻게?"
"강영 교수는 조소를 전공했죠. 그리고 설치 작가고요."
"그, 그렇지?"
"서양화과에서 강영을 교수로 뽑은 것은 학생들의 작업 영역을 넓히려는 거죠."
"그래서?"
"그러니까 이번에는 형이 그림 대신 입체로 하는 겁니다. 오히려 입체 작업이 강영 교수의 공감을 끌어내기 훨씬 쉬울지도 몰라요. 형이 당장 그림에는 자신 없을지 몰라도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잖아요."
"그래! 맞아! 역시 이주원! 너라면 답을 줄 줄 알았어! 고마워! 고마워, 주원아!"
그렇게 김대성은 한참이나 고맙다고 외치더니 신나서 작업실을 뛰쳐나갔다.
내 아이디어가 도움이 된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게 왜 남의 코 푼 휴지를 챙겨가지고.
'아무튼 임진만, 너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어버린 캔커피를 들이키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유나와 수진 선배에게 추근댄 것으로 모자라, 서양화과의 귀염둥이 대성병지까지 괴롭히다니.
우리 서양화과 삼총사.
아니, 서양화과 최강 콤비와 김대성.
우리 셋이 반드시 너를 응징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