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 시간의 시각화 □
그렇게 시작된 2학기.
이제 팀 수진은 따로 움직인다.
나는 혼자 미대 건물로 향했다.
이번 수업은 '시간의 시각화'.
1학년 때는 기초 서양화, 기초 미술사 이런 식으로 광범위한 주제를 뭉뚱그려서 배운다.
하지만 3학년 쯤 되면 '시간의 시각화'처럼 세부적인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룬다.
'시간의 시각화니까······당연히 시간을 집중적으로 다루겠지?'
그리고 이 수업은 2학기에 새로 임용된 조교수인 강영 교수가 맡는 수업이었다.
강영은 내가 1학년 때 배운 서진석 교수나 이준성 교수보다 오히려 몇 살 어린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 서진석이나 이준성은 엄밀히 말하면 정식 교수가 아니라 시간강사였다.
그러나 강영 교수는 엄연히 정식 조교수.
갓 40대에 접어든 젊은 한국대 교수.
드문 채용이었다.
'그만큼 실력이 있단 말이겠지······.'
원래 나는 이런 소문에 어두운 편이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이준성 역시 조교수 후보였지만 더 젊은 강영이 발탁된 것으로 어렴풋이 들었다.
어린 강영이 나름 잘나가는 화가 이준성을 꺾은 것이다.
강영은 한국대를 졸업 후 해외에서 학위와 각종 상까지 수상한 정석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게다가 강영 교수의 아버지 역시 국립대의 미대 교수라고 했다.
'나이든 김태민 버전?'
물론 지금의 김태민은 교직을 이수하며 스스로 엘리트 코스에서 이탈했다.
아마 김태민이 정석 코스를 밟는다면 결국 강영 교수처럼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시간의 시각화'는 나 혼자 듣게 되었다.
유나와 수진 선배는 조소과 수업으로.
김태민은 교직 이수 때문에 시간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빠!"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바로 이정원.
그나저나 벌써 3학년 2학기인데도 오빠라는 말은 아직도 듣기 좋구나.
'유나한테 한 번만 오빠라고 불러달라고 한다면?'
아마도 곧바로 주먹이 날아올 것이다.
이제는 유나의 행동 패턴이 예상 가능하다.
그러고 보니 사귄지 3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소원권이 그대로 있었다.
'너무 무리한 소원은 나도 부탁하고 싶지 않았고······'
무리한 소원이 아니라면 굳이 소원권을 쓰지 않아도 유나가 내 부탁을 다 들어주니까.
아직은 소원권을 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3년.
때가 무르익었다고나 할까.
'소원권이 한 20장 있으면 유나한테 한 번쯤 오빠라고 불러 보라고 시켜보고 싶은데.'
하지만 소원권은 단 2장.
아쉽지만 귀중한 소원권을 그렇게 낭비할 순 없지.
아니면 새학기도 시작한 김에 한 번 더 덫을 놔 볼까?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며 이정원 옆에 앉았다.
"주원 오빠도 이 수업 신청 성공했구나. 강영 교수가 멋있다고 우리끼리 수강 신청 경쟁 붙었거든요. 나만 성공하고 동기들 다 실패했는데."
"그래? 난 몰랐네. 그냥 신청하니까 되던데."
"오빠 때문에 내 친구들 탈락했는데, 오빠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청했다니!"
재잘재잘.
이정원은 그렇게 떠들어댔다.
그나저나 경원 교수는 젊고 실력도 있으면서 멋있기까지 하다고?
짜증나는 타입이군.
"주원아! 정원아!"
그때 또 한 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김대성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 뒤에 앉았다.
"오올, 너희들도 수강신청 성공했구나. 역시 괜찮은 교수의 수업을 잡으려면 부지런해야 한다니까! 수강신청 열리자마자 키보드를 두드린 보람이 있군!"
그렇게 김대성도 뿌듯해했다.
난 그냥 느긋하게 신청하니까 되던데······
그때 끼이이익.
강의실 문이 한 번 더 열리고, 순간 김대성의 표정이 변했다.
응? 세상 용감한 김대성이 왜 이러지?
나도 자연스레 김대성의 시선을 따라 강의실의 문 쪽을 바라보았다.
덩치가 있고 능글능글한 스포츠 머리가 김대성을 향해 손을 들었다.
"여어! 대성아. 여기서 다 만나네!"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조소과였지?'
한국대 미대는 학생이 많지 않다.
그래서 다른 과 학생도 이름까지는 몰라도 대부분 얼굴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유나와 수진 선배 덕분에 조소과 쪽으로 자주 다니곤 했었다.
'김대성이랑 아는 사이였구나. 그런데 김대성 반응이 왜 이럴까?'
그리고 조소과 덩치 뒤로 화장이 진한 여학생 하나가 따라 들어왔다.
"상미 언니? 언니 언제 한국 돌아왔어요?"
그 화장 진한 여학생에게 이정원이 아는 척했다.
"응. 이번 학기부터야. 어, 뭐야? 대성이도 이 수업 듣는 거야? 재밌겠다."
대체 이 두 사람이 누구길래 마치 불독을 만난 톰처럼 김대성이 긴장하는 걸까?
내가 김대성의 사연을 궁금해하는 날이 오다니.
내가 궁금한 표정을 짓자, 이정원이 내게 외쳤다.
"아! 주원 오빠는 상미 언니 모르겠구나! 인사해요! 여긴 상미 언니. 오빠 휴학했을 때 입학했어요. 언니도 우리 서양화과예요. 교환학생 갔다가 이번 학기에 오셨나 봐요!"
내 후배였군.
상미라는 사람이 김대성에게 반말을 했지만 그건 흔한 일이었다.
한국대 서양화과는 N수생이 흔했기 때문에 나이와 학번은 별 상관이 없었다.
그래서 선배라고 대접받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주원씨 맞죠? 텔레비전 나왔던 사람. 나는 대성이랑 학원 동기, 윤상미예요. 말 편하게 해도 되죠?"
"네, 그럼요."
"그럼 잘 부탁해. 주원 선배."
윤상미와 김대성은 학원 동기였군.
한국대 입시는 복잡해서, 큰 학원은 한국대 반이 따로 있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한국대에는 학원 동기가 꽤 있다.
수진 선배와 정화 선배도 학원 동기였다.
별로 나쁘지 않은 인상의 두 사람인데, 김대성의 표정은 영 불편해 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강영 교수가 들어왔다.
키는 크지 않지만, 날씬하고 다부진 몸.
이지적인 얼굴.
여학생들한테 인기가 많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서진석 교수는 사람 좋은 신사 느낌.
이준성 교수가 싱거운 술꾼 삼촌 느낌이라면······
강영은 냉소적인 지성인 느낌이 났다.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짜 한국대 교수를 만난,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 이름은 강영이다. 한 학기 동안 이 수업 '시간의 시각화'를 맡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시간의 시각화는 내가 제안한 수업이다. 그래서 나도 꽤 기대가 된다."
강영은 자기소개는 간단하게 생략했다.
"내가 궁금한 사람은 검색해봐라. 검색하면 다 나온다."
오올.
유명인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했으면 허세처럼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영 교수가 이렇게 말하니 허세가 아니라, 그냥 자기소개가 귀찮은 것처럼 느껴졌다.
참고로 강영 교수는 서양화 전공이 아니었다.
그 역시 한국대 조소과 출신이었고, 설치미술과 영상으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서양화과의 영역이 확대되는 추세라서, 설치 작가 강영이 서양화과 교수로 부임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한 학기 동안 우리는 같이 지내게 된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결국 서로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소개를 하지 않더라도 상관없겠지. 보통 첫 주 수업은 간단하게 건너뛰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바쁜 사람이다. 너희도 바쁠 테고. 그러니 서로의 시간을 의미 없게 낭비하지 말자. 곧바로 수업을 시작하겠다."
첫날부터 곧바로 수업에 들어가다니.
이준성 교수와는 다른 의미로 강적이었다.
"아마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배웠을 것이다. x축, y축, z축. 그렇게 3축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하나의 축이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시간은 세상을 이루는 가장 흔한 원소인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주제이다."
타닥. 타다닥.
강영 교수는 컴퓨터에 가져온 USB를 꽂고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준성은 컴퓨터에 서툴러서 자주 반장이나 조교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었다.
확실히 강영의 젊음이 느껴졌다.
"그래서 당연히 시간은 역사적으로도 예술의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우리는 이 수업에서 시간을 시각화 하는 방법을 배우고 연구할 것이다."
찰칵.
스크린에는 강영 교수가 준비한 화면이 떠올랐다.
첫 번째 화면은 해골이었다.
"해골은 오래전부터 서양화의 단골 소재이자 주제였다. 중세의 정물화에서 해골은 죽음을 상징한다. 죽음이 곧 시간이다. 시간은 곧 인간의 필연이다."
솔직히 호기심에 가볍게 신청한 수업이었다.
하지만 생각 외로 강영 교수의 포스가 강했다.
게다가 시간.
나는 인간의 필연이라는 시간을 거스른 회귀자였다.
해골 그림을 보자 갑자기 그 사실이 실감이 나고 이 수업에 강한 흥미가 생겼다.
이것은 해골 그림의 힘일까?
아니면 강영 교수의 힘일까?
"중세의 해골 정물화는 르네상스와 낭만주의 시대를 거쳐 현대에도 끊임없이 재등장한다. 앤디워홀과 데미안 허스트의 해골 작업 역시 굉장히 유명하다."
찰칵.
이번에는 여러 장의 자화상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해골 외에도 시간을 다루는 미술적 시도는 끝도 없다. 이 그림들은 렘브란트다. 렘브란트는 부지런히 자화상을 그렸다. 자신에게 얼마나 객관적일 수 있느냐가 좋은 예술가의 자질이라고 믿는다. 렘브란트는 냉정하고 엄격하게 자신의 연대기를 그리며 그림 속에 시간을 담아냈다."
확실히 대가의 그림은 시선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었다.
그 외에도 강영 교수는 시간을 다루는 몇 가지 작품을 더 보여줬다.
"자, 내가 이렇게 열심히 자료를 준비했으니, 너희들도 열심히 수업을 따라와야겠지? 곧바로 과제를 내겠다. 첫 주제는 바로 '시간'이다. 이번 학기 내내 우리는 시간에 대해 탐구할 것이다. 그러니 본격적인 학기가 시작되기 전, 날 것 그대로의 너희가 생각하는 시간을 알고 싶다. 3주의 시간을 주겠다. 3주 후에 시간에 관한 작품들을 가지고 크리틱을 하겠다."
그렇게 수업이 마무리되는 줄 알았는데, 강영 교수가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하나 제안을 하지. 모두 알다시피, 이번 학기가 내가 한국대 수업을 맡은 첫 학기다. 그래서 '시간의 시각화'라는 같은 주제로 대학원에서도 수업한다. 학기가 끝날 무렵에 대학원 학생들과 한 학기의 결과물로 간단한 합동 전시를 하려고 계획 중이다. 그러니 너희들 중 가장 좋은 작업을 하는 학생을 선발해서 대학원생들의 합동 전시에 포함시키겠다. 대학원생들에게도, 너희들에게도 괜찮은 동기 부여가 될 거라 생각한다."
대학원생과의 합동 전시라······
학부생인 우리에게는 정말 강력한 동기 부여일 수도 있었다.
어느 정도 규모의 전시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한국대 대학원생들의 전시라면 어느 정도 수준도 있을 것이고, 보는 사람도 꽤 있을지 모른다.
게다가 강영 교수 첫 학기 과제전이라면, 본인도 꽤 신경 쓸 것이다.
그렇게 첫날부터, 작품 내적이나 외적이나 꽤 흥미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오빠, 회화 4는 어느 교수 수업 들어요?"
한국대 필수 과목의 경우, 몇몇 수업은 동일한 수업이 여러 개 개설된다.
그래서 학생이 자신의 취향에 맞게 교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실기 수업이라 학생 수가 많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예술 수업인만큼 교수와 학생의 성향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준성 교수."
"어? 나돈데. 그럼 같이 점심 먹고 들어가면 되겠다. 오빠, 어느 식당 가요?"
"학생회관 가자. 오늘 순두부찌개래."
그때 뒤에서 김대성이 끼어들었다.
"형도 이준성 교수예요?"
"당연하지. 이준성과 나의 마지막 승부라고나 할까······"
* * *
간단한 식사 후.
재잘거리는 이정원과 김대성을 데리고 회화 4의 강의실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김태민이 창가에 혼자 앉아 있었다.
"어? 태민아. 점심은?"
"그냥 때웠어."
"수진 누나는?"
"유나랑 같이 오고 있대."
그렇게 김태민 뒤에 김대성과 함께 앉았다.
"와, 신난다. 멋진 오빠들한테 둘러 싸였다!"
이정원이 신나서 방방 뛰었다.
이제 곧 유나도 올텐데.
이 녀석 좀 위험한 느낌이 난다.
그나저나 김대성은 왜 뿌듯해 하는 건데?
설마 자기도 멋진 오빠들에 합류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때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다.
'어라 저 친구는?"
시간의 시각화 수업도 같이 들었던 조소과 덩치였다.
과연 그 덩치를 보자 또 한 번 김대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덩치 뒤에 딱 달라붙는 스키니 진을 입은 남학생 하나가 따라 들어왔다.
나는 그 멸치도 알고 있었다.
역시 조소과였다.
서양화과 학생들이 다른 과를 배우는 것처럼, 다른 과 학생들도 서양화과를 배운다.
그리고 서양화과는 인기가 좋다.
'만만한 게 그림, 살짝 그런 느낌?'
서양화과가 확실히 다른 미대보다 육체적으로 편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디자인이나 조소과도 입시는 그림으로 치른다.
그래서 서양화과는 부전공으로 인기가 많았고, 다른 과 학생이 수업을 듣는 일도 아주 흔했다.
그리고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익숙한 두 사람이 도착했다.
수진 선배와 유나.
우리가 손을 들고 둘을 부르려는 찰나.
"수진아, 유나야. 이리 와. 여기 앉아!"
"수진 누나, 유나 누나. 점심 먹었어요?"
덩치와 멸치가 두 사람을 붙잡았다.
"아? 그, 그게······"
수진 선배가 우리를 가리키며 일행이 있다고 말하려는 찰나.
"두 사람 조소과 수업은 우리가 가이드해 주니까, 서양화과 수업은 두 사람이 우리를 가이드 해 줘야죠! 설마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여기서 우릴 그냥 모른 척하지는 않겠죠?"
"그래, 사람이 그럼 안 되지. 수진아, 유나야, 여기 앉아."
그렇게 반강제로 덩치와 멸치는 두 사람을 자기 앞에 앉혀 버렸다.
그리고 멸치가 신나게 떠들어댔다.
"아, 잘 됐다. 이거 회화 수업인데, 나 아직 유화 물감 쓰는 법도 잘 몰라요. 누나들이 가르쳐주세요!"
저 놈들이!
물론 수업시간에 하루 정도 떨어져 앉는 건 분명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대수로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용서할 생각은 없다.'
서양화과는 내 본진.
감히 내 본진에서 회귀자의 여친을 강탈해가다니.
멸치와 덩치.
너희들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