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구룡포 □
원장 선생님은 몇 번이나 남동민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아닙니다. 저도 오랜만에 학원 강의를 했더니 재미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남동민은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으아! 매일 교수 시중 들다가 오랜만에 학원 오니까 살 것 같다."
남동민에겐 학원 특강이 나름대로 힐링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내가 넉넉하게 보수도 챙겨줬으니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원장 선생님은 아직 목에 깁스도 풀지 못했고, 또 당분간 의자에 오래 앉아 있지도 못할 거라 하셨다.
하지만 남에게 학원을 맡길 분이 아니었다.
원장 선생님은 남동민 뿐만 아니라, 유나와 수진 선배, 그리고 김태민에게도 깍듯이 인사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큰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리고 내게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였다.
"네가 내 제자이긴 하지만, 도대체 한국대 서양화과에 어떻게 붙은 거냐?"
"그러게 말입니다."
원장 선생님은 10년 넘게 학원을 운영하셨다.
이제 연필선만 슬쩍 봐도 대강 그림 실력이 가늠되는 경지.
그런데 나랑 같은 학년에 남동민, 김태민, 한유나가 있으니······.
내가 봐도 신기하다.
내가 대체 어떻게 붙었을까?
그러니 원장 선생님은 나보다 몇 배로 신기하셨을 것이다.
원장 선생님은 내게 큰 형님이나 마찬가지라서 어떤 말을 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리고 또 내 실력을 가장 정확히 알고 계신 분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학원 일도 잘 마무리 되었다.
"주원아, 이번에 신세졌다."
"신세는요. 원장 선생님이 지금의 절 만들어 주셨는데요."
원장 선생님은 내게 고개를 끄덕여주셨다.
"주원아, 정말 고마워. 이 사람 사고 났다고 전화 받았을 때 정말 앞이 깜깜했었는데, 덕분에······"
"아닙니다. 앞으로도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그렇게 사모님께도 기분 좋게 인사드렸다.
그리고 남동민과 김태민, 수진 선배를 포항역까지 바래다 줬다.
"그럼 형 잘 들어가요. 수진 누나도요. 서울서 보자."
이제 내 옆엔 유나만 서 있었다.
* * *
3주가 넘는 체류였고, 또 오랜만의 입시 미술이라 준비할게 많았다.
그래서 나는 유나도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그동안 호텔을 잡아줬다.
3주 동안 유나는 종종 우리 집에 찾아와 어머니와 셋이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어머니는 유나만 보면 무조건 마냥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셨다.
"유나야. 고마워."
"고맙기는. 너도 우리 엄마랑 할머니한테 열심히 했잖아."
"그래도 고마워."
나야 아재의 삶을 한 번 겪었으니까, 가족을 챙기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
어른들을 대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유나가 우리 어머니를 챙겨주니 두 배로 고맙고 또 대견했다.
"이제 학원일 끝났으니까, 나도 제주도 갈래. 집에서 며칠은 지내야지. 그런데 제주도 가기 전에 어머니 모시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래."
내 마음 속에서 유나에 대한 충성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어머니가 식당 일을 쉬는 토요일.
난 어머니와 유나를 태우고 구룡포 바닷가 횟집으로 갔다.
멀리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횟집.
그리고 널따란 식탁에 끝없이 차려지는 음식들.
어머니는 가격표를 보고 살짝 긴장한 눈치셨다.
'내가 이제 부자라고 아무리 설명 드려도······'
어머니는 아직 이런 비싼 식당에는 적응이 되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어머니. 한 잔 받으세요!"
"응, 그래. 한 잔 다오."
그런 어머니께 유나가 애교를 부렸다.
그제야 어머니도 활짝 웃으시며 소주잔을 내미셨다.
콸콸콸.
나야 운전을 해야 하니 술을 마시진 못하지만,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효도하겠다고 마음만 먹고, 무심한 아들이라 잘 챙겨드리지도 못했는데······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
유나가 내 대신 효도를 해주는 기분이었다.
"어머, 유나야. 넌 개불도 먹을 줄 아니?"
"그럼요. 제가 제주도 출신이잖아요. 개불 못 먹으면 아빠한테 혼나요. 어머님은 개불 못 드세요?"
"으응. 난 좀 징그러워서."
"어머니! 오늘 한 번 도전해보세요. 소주랑 같이 먹으면 정말 찰 떡이에요. 어머? 어머니 잔 비었네요. 한 잔 더 받으세요!"
콸콸콸.
"유나 때문에 내가 술꾼 되겠다."
그렇게 배불리 회도 먹고.
우린 바닷가를 산책했다.
우리 집에서 구룡포 바다는 그리 멀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가난했고, 바쁘고 피곤했다.
그래서 이렇게 어머니와 내가 같이 바다에 나온 것은 전생에서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술기운 덕분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온 바다 때문인지, 아니면 유나 때문인지.
어머니도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어머니와 유나가 나란히 모래밭을 걷고, 난 조금 뒤에서 따라 걸었다.
"주원아. 어머니랑 나, 사진 찍어줘. 어머니. 저랑 같이 사진 찍어요."
"그래, 주원아. 우리 둘, 예쁘게 잘 찍어 봐."
그리고 둘은 바다를 배경으로 모래밭 위에 섰다.
찰칵.
서울에 가면 이 사진을 뽑아서 어머니께도 보내드리고 나도 하나 간직해야지.
내게 소중한 두 사람이 같이 담긴 사진.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 이 두 사람의 사진을 함께 찍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머니가 너무 좋아하셔서 유나가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다음 날은 포항 근처의 경주와 불국사로 드라이브했다.
쌈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그리고 경주에 간 김에 황남빵 가게에도 들렀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으니까.'
중요한 거래처나, 친구들에게 택배로 황남빵을 보내기로 했다.
'제주도에도 여러 상자 보내야지.'
은혜는 확실히 갚는 이주원.
제주도에 황남빵 폭격을 내릴 생각이다.
그런데 세어보니, 보내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은성사부터, 승희씨까지.
그리고 한철이부터 형원 선배, 정화 선배······
끝이 없구나.
나는 혼자 웃음이 났다.
'선물 보낼 사람이 많다는 것도 나름 뿌듯하구나. 그리고 돈 걱정 없이 선물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도 정말 뿌듯하구나.'
이래저래 전생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그렇게 포항의 일을 마무리 하고, 제주도로 가는 유나를 바래다 줬다.
"며칠 후에 서울에서 봐."
"응."
* * *
그렇게 성큼 2학기가 다가왔다.
1학년 때엔 멤버들이 다 같이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우리들의 수업도 갈라졌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것도 우리들이 성장하는 과정 중 하나겠지.'
김태민은 3학년 1학기부터 교직을 이수했다.
서양화과 학생이 교직을 이수하면, 4학년 땐 교생 실습도 가야 한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임용고시를 쳐서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물론 사립학교에는 임용고시를 치지 않아도 선생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림 천재 김태민이 중학교나 고등학교 미술 선생님이 될 자격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처음엔 솔직히 충격이었다.
난 당연히 김태민이 유학을 갈 줄 알았다.
"나도 1학년 땐 그렇게 생각했어. 내가 당연히 유학을 갈 줄 알았지."
"그런데 왜? 왜 갑자기 선생님이 될 생각을 한 거야?"
김태민은 곧바로 대답을 못하고 부끄러워했다.
그렇다는 건?
"수진 누나 때문이야?"
"어."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까, 안정된 직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돈을 벌고, 직업을 얻어서 누군가를 보살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가질 수 있는 직업 중에 가장 안전하고, 나한테 어울리는 일이 미술 선생님인 것 같아."
"그렇구나. 알 것 같다. 무슨 말인지."
김태민도 이제 스물다섯 살.
마냥 소년 같던 김태민도 자기 방식대로 서서히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선생님이 되려는 이유도 멋있구나.'
친구로서 응원해줘야지.
그리고 미술 선생님이 되어서도 그림은 계속 그릴 수 있으니까.
해외 명문대로 유학을 가고, 학위를 얻고, 교수가 되고, 유명한 상을 타고, 스타 예술가가 되고······
어쩌면 그런 것보다는 시골 학교의 미술 선생님이 김태민에게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냥 어디서든 계속 그림만 그려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너 임용 고시는 자신 있는 거야? 진짜 어렵다던데."
"열심히 해봐야지."
"수진 누나가 부럽다."
"어? 응?"
이 녀석.
왜 놀라는 거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인생계획에 자기를 포함시키고, 자신을 위한 미래를 준비하면 고맙고 행복하지 않을까? 그 이야기였어."
"아······그렇구나."
김태민 이 놈.
왜 이렇게 안심하는 건데?
"그런데 너도 마찬가지잖아. 미래를 위해 유나와 공동 명의로 계속 건물을 모으고 있잖아."
"그, 그렇긴 하지."
왜 김태민의 인생계획은 순수하고 멋있어 보이는데, 나의 인생 계획은 속물적으로 느껴지는 걸까.
역시 김태민은 강적이었다.
'건물을 가지고도 이길 수 없다니.'
그리고 유나와 수진 선배는 조소과를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한국대는 복수 전공, 혹은 부전공이 필수였다.
특히 서양화과 학생에게 조소과 수업은 매우 유용하다.
요즘은 화가라고 해서 그림만 그리는 경우는 드물다.
설치나 입체 작업, 혹은 영상도 같이 하는 경우가 거의 일반적이었다.
특히 조소는 다루는 재료가 다양하다.
폴리 뭐시기······라는 각종 플라스틱부터, 그라인더로 쇠를 다듬고 용접도 하고, 흙으로 빚고 굽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를 선반에서 잘라 목공 작업도 한다.
조소의 그런 재료들은 전문 지식이 없으면 다루기도 어렵고 때론 상당히 위험하다.
그러니 서양화과 학생이 조소를 부전공으로 선택해서 그런 지식들을 미리 배워두면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수강 신청 날.
우린 같이 모였다.
"유나야. 수진 누나. 이번에 조소과 수업 어떤 거 신청했어요?"
나와 김태민이 함께 물어봤다.
하지만 유나와 수진 선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빛을 교환했다.
뭐지?
"미안하지만 이번 학기부터 너희들한테 조소과 수업 시간표는 공개하지 않을 거야."
"네? 그럼 우리가 조소과 수업 어떻게 도와줘요?"
1학기 때 두 사람은 흙으로 인체 전신상을 만드는 수업을 했다.
그래서 나와 김태민이 조소과 작업실을 찾아가 뼈대를 용접하고, 무거운 흙덩이를 날랐다.
"그래서 우리 시간표를 두 사람한테 공개하지 않는 거야. 너희 두 사람이 다 해버리면 우리가 조소과 수업을 듣는 의미가 없잖아."
나와 김태민은 동시에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라인더는 정말 위험해요. 그리고 몸에 안 좋은 약품도 많이 다루니까······"
"괜찮아. 조심해서 하면 돼."
"그래. 그리고 두 사람도 바쁘잖아. 그러니까 너희 둘은 이제 조소과는 출입 금지야. 이제 그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마."
나와 김태민은 입술을 내밀고 울상을 지었다.
사실 우리가 조소과 수업에 쫓아다니는 것은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한유나와 이수진은 자타공인 서양화과 최고의 미녀.
그리고 조소과는 미대에서 남학생이 제일 많은 학과다.
우린 힘든 조소과 수업을 돕겠다며 접근하는 모든 음흉한 시도들을 원천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의 조소과 출입을 봉쇄당했다.
"유나야. 항상 조심하고, 위험한 재료 다룰 때는 단단히 정신 차려. 그리고 조금이라도 망설여지거나 모르는 거 있으면 꼭 날 불러. 알겠지?"
"주원아. 그냥 신경 꺼."
유나는 단호했다.
그리고 나는 영문학을 부전공으로 택했다.
사실 내가 영문학을 택한 것은 유현이의 영향이 컸다.
유현이가 대학에 가기 전 형원 선배한테 상담을 했었다.
"형원이 형, 제가 요즘 소설가라는 직업에 관심이 생겼는데, 저도 형처럼 국문학과에 가야 할까요? 아니면 극작과?"
하지만 형원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실은 나는 국문학과에 간 걸 후회하고 있어. 학자가 되려면 또 모를까, 소설가가 되려면 그냥 읽는 것을 즐기면 될 것 같아. 극작과도 별로인 것 같아. 글의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는 즐거움을 찾는 게 먼저인 것 같거든."
"그럼 형, 형은 어떤 과를 추천하세요?"
"글쎄, 만약 내가 고 3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마 다른 나라의 문학을 배울 것 같아. 외국어를 배우면, 내가 즐길 수 있는 문학이 두 배로 늘어나는 거니까. 외국어를 배우면 사회생활에도 도움이 될 테고."
형원 선배의 조언대로 유현이는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나도 그때 옆에서 듣고 있었다.
'형원 선배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아.'
안 그래도 나의 그림 세계를 넓히려면 문학을 배워야 할 것 같았다.
형원 선배의 말발을 보며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영어를 배워두면 사업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
그래서 나는 특이하게 미대가 아닌 문과 계열을 부전공으로 택한 것이었다.
그렇게 우린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도 같이 듣는 수업도 몇 개 남긴 했다.
이를테면 회화 4.
[ 담당교수 : 이준성 ]
익숙한 이름.
1학년 때 기초 서양화 2를 들을 때 이준성 교수의 수업을 들었었다.
'그때 느낌은······'
많이 과격하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1학년 때 강한 예방 주사를 맞아서 도움이 된 것 같았다.
수강신청 컴퓨터 앞에서 우리 네 명은 잠시 고민했다.
"어때? 들어볼까?"
우리 네 명은 서로의 표정을 살피며 잠깐 고민했다.
약간 이런 느낌이었다.
'매운 맛 조절이 가능한 카레집에 갔을 때, 3단계 매운 맛이 제일 맛있는 걸 알면서도 5단계 매운 맛에 도전해보고 싶은 기분······'
"해보자. 우리도 이제 나이 먹었으니까. 일방적으로 욕을 먹진 않을 거야."
이건 김태민.
"그래, 졸업하기 전에 당당히 맞서 보자."
요건 유나.
"나야, 뭐."
"나도, 뭐."
이건 수진 선배와 나.
결국 우린 또 한 번 이준성 교수의 수업을 신청했다.